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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신작단편/레이스 짜는 여자/김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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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신작단편/레이스 짜는 여자/김이정
꼭 10년 만이었다. 그녀의 아이가 돌이 다 돼 갈 무렵, 부기가 미처 다 빠지지 않은 푸석푸석한 얼굴로 한국에 온 그녀를 마포에 있는 그녀의 언니 집에서 만난 이후 꼭 10년이 흘러 있었다. 그때도 프랑스로 간 그녀가 5년 만에 비자 문제 때문에 잠시 귀국한 것이니 그녀가 한국을 떠난 지도 어느새 15년이 넘었다.
“여전하구나!”
샤를르 드 골 공항으로 마중 나온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첫 마디를 건넸다. 스산하고 추운 영국에서 혼자 열흘 동안 지내다 온 탓에 프랑스의 공항에서 만난 그녀가 몹시도 반가웠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더 신기했다. 아니 그녀의 얼굴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눈 끝엔 부챗살 같은 주름이 깊이 파여 있었고 입 주위도 팔자 주름이 더 선명해졌으며 피부도 세월의 흐름만큼 윤기와 탄력을 잃어 더 이상 젊지 않은, 40대 여인의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다만 짙은 감색의 자켓을 단추 하나 남김없이 모두 다 채우고 허리벨트까지 단정히 묶은 채 검정색 정장바지를 받쳐 입은 것이 유행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앞머리는 직접 자른 듯 가위자국이 또렷하고 뒷머리는 묶어 올린, 소위 헵번 스타일이 변함없다는 말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양팔을 크게 벌려 포옹을 한 후 오른쪽 뺨을 갖다 댔다. 갑작스런 서양식 인사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더 힘껏 그녀를 안았다. 로션도 바르지 않은 그녀의 뺨이 건조했다. 나 역시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다고 영국을 떠나오면서 깨끗한 옷을 골라 입었지만 결국 청바지와 티셔츠 위에 걸쳐 입은 헐렁한 남방차림이었고 머리 역시 30대 중반부터 내내 고수해 온 강한 웨이브의 긴 머리였다.
“그래, 우리 고집이 어디 간들 변하겠니?”
진심이었다. 그녀가 세월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은 얼굴로 전혀 변하지 않은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여전히 청바지와 티셔츠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고집만 늘어가고 있었다. 동의라도 한다는 듯 그녀가 씩 웃으며 내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최소한의 짐만 챙겼는데도 가방은 혼자 들기 힘에 부쳤다.
“가방도 무겁고 아침부터 서둘렀더니 너무 힘들어. 택시 타자.”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는 그녀의 팔을 잡고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먼저 택시에 올라탔다. 운전석을 투명 플라스틱으로 둘러싼 칸막이가 설치돼 있었다. 낯선 땅을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다니다가도 문득 누군가 내게 총이나 칼을 겨누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풍경들이었다. 영국에서 밤의 주유소를 보고나서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흰옷 입은 거 보니 한국사람 만난 실감 난다. 여기 사람들은 흰옷 잘 안 입어.”
배시시한 그녀의 미소를 보니 영국에서 지내는 열흘 동안 뼛속까지 배어든 한기가 어지간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히드로 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파리에 도착할 무렵 들려온 프랑스 기장의 매력적인 중저음 불어 안내방송 덕분에 살갗에 붙은 얼음조각들이 한 꺼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는데 그녀를 만나 모처럼 한국말을 쓰자 나는 큰 위로라도 받은 것처럼 급기야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녀의 집은 파리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택시가 멈춰선 오래된 아파트는 샹제리제가 있는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30분쯤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10분 정도 더 가는 곳이라고 했다.
“호텔이나 한국 민박집 가면 편하겠지만 좀 불편하더라도 그냥 여기서 같이 지내자.”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복잡했다. 집안에 들어간 내가 당황한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한 탓이었다.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자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밖에서 보는 것보다 좁고 어둡고 낡은 데다 거실도 따로 없이 방이 두 개밖에 안 되어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영국에 가는 김에 파리에 들른다고 메일을 보냈을 때 그녀는 대뜸 자기 집에 와서 지내라고 했다. 처음 나는 가난한 살림에 나까지 얹혀 지낼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의 집에서 지낼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저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시내에서 만나 식사나 함께 하거나 그녀의 집을 한 번쯤 방문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집에 와서 지내라니 나는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니 방이 여유 있다면 모처럼 그녀와 함께 지내고 싶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녀가 어쩌다 서울에 올라오면 우리 집에서 함께 잔 이후 한 번도 그녀와 숙식을 함께 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인터넷을 검색해 저가호텔 두 군데와 한인민박집 두 곳의 전화번호를 적어오긴 했다.
부엌에 딸린 작은 방은 피아노와 책상까지 들어가 있어 큰 캐리어를 들여놓으니 잠잘 공간도 없이 방이 가득 차버렸다. 순간 호텔로 갈까하는 내 마음의 갈등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을 한 것이다.
“나는 좋은데 너희가 불편할까봐…….”
나는 ‘너희’가 누구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리고 불편한 마음이 들킨 게 미안해 다급히 미소를 지어보이며 벽에 걸린 아이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종이구나!”
내 목소가 과장해서 튀어나왔다.
“응. 좀 이따 레슨 마치고 돌아올 거야.”
그제야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이 누르러졌다.
아이와 둘이서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남편과 아들 세종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니 동거인일 뿐 법적 남편은 아니었으나 아이의 아빠임은 분명한 남자였다.
“수진의 친구는 처음 만나요. 그것도 한국에서 온 친구라니 너무 기뻐요!”
저녁에 들어온 남자는 능숙한 영어로 나를 반겼다. 프랑스 이름으로 루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작은 키에 둥글둥글한 얼굴을 한 전형적인 중국인이었다. 순하고 너그러워 보였다. 비자가 만료된 탓에 불법체류자 신세여서 공식적인 일자리는 구할 수 없어 아이들 피아노레슨을 한다고 했다. 안방에도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작은 집에 피아노가 두 대나 있는 까닭이 모두 루이 때문인 듯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남자를 두고 그녀는 내게 작은 방으로 가자고 했다. 그녀의 아들 세종은 초등학교 5학년으로 첼로를 하고 있었다.
“저 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 버렸어.”
그녀는 첼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내년에 파리 예비음악원에 간다는 아들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방세가 떨어져 남자와 동거를 하다가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꼬여버린 계획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음악뿐만 아니라 학습능력도 뛰어나 초등학교 과정도 2년이나 월반을 했다고 했다. 재능이 뛰어난 아들을 앞에 두고 태연히 원망을 드러내는 그녀를 보며 세종이 한국말을 모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들 세종은 ‘안녕하세요’와 자신의 이름 정도만 한국말로 할 수 있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의 복잡한 혈통에 매이지 않겠다는 듯 아이는 불어만 사용했다.
“한국말 굳이 안 가르쳤어. 얘가 한국 가서 살 것도 아니고……. 아니 내가 가르치고 싶지 않았어.”
그나마 프랑스어와 비슷한 발음의 ‘세종’이란 이름을 붙여준 것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와의 인연 값을 충분히 지불했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코리아란 나라의 문자를 만든 왕의 이름이라는 건 세종도 알고 있었다.
하긴 그녀에게 그까짓 원망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들은 욕설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급살 맞을 년들 콩밭에 물 안 주고 어디 가서 처자빠졌다냐?”
그녀의 조모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욕은 그저 일상어에 불과했다. 가뭄으로 말라가는 콩밭을 향한 탄식일 뿐이었다.
“이 육시 헐 년들, 내 등골 빼 먹으려고 태어난 년들, 가랭이를 찢어죽일 년들!”
장터에서 난전의 자릿세를 받는 게 직업이어서 지세쟁이라 불리던 그녀의 아버지가 대낮부터 장터에서 술이 취하기 시작해 저녁이 되면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해보다 더 붉은 얼굴로 길 위를 구르고 논두렁에 빠져가면서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입을 떼는 것도 줄줄이 딸만 다섯인 그녀의 자매들을 향해 뱉어내는 욕설이었다. 키 작고 마른 몸매로 병약한 그녀의 아버지는 평소엔 얌전하기 짝이 없는 남자로 집에서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지만 술만 마시면 온갖 쌍욕을 쏟아내거나 쓰러져 흙이 잔뜩 묻은 몸으로 동네 길을 비틀거렸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게 늘 문제였다. 동네사람들 말로는 알콜 중독이라고 했다. 때론 취한 그의 뒤를 동네 사내아이들이 뒤따르며 집적대다가 그가 돌아보면 쏜살같이 도망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 도망가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집안에 틀어박혀 문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았다. 가끔 양은솥이 마당으로 던져지고 밥상 다리가 부러져도 그녀는 동네아이들이 놀고 있는 정자 아래로 절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래 한국이라면 지긋지긋해 했잖아. 기를 쓰고 도망 온 곳에서 뭐 하러 애한테까지 그곳 말을 가르치고 싶겠니?”
그녀가 나를 보고 쓰게 웃었다.
“그래, 프랑스에서 한국 말 쓸 일도 없을 텐데 뭐.”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그런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할까봐 허겁지겁 그녀에게 동조했다. 사실이 그랬다. 일생에 한번이라도 한국에 갈 일이 있을까 싶은 아이가 단지 자신의 어머니 나라 말이라고 한국말을 배우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녀가 얼마나 한국을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던가.
“난 커서 꼭 외국에 가서 살 거야.”
초등학생인 그녀는 뜨개질실을 작은 손가락에 야무지게 감아 들고 그보다 더 야무진 입술을 달싹여 선언이라도 하듯 말하곤 했다. 동네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뜨개질이라면 제일 잘 하는 그녀는 늘 뜨개질바늘과 실을 갖고 다녔다.
“연, 구, 심!”
열 살짜리 그녀가 뜨개질실을 들고 외치는 소리였다. 몇 가지 뜨개질의 기본을 배운 후부터 그녀는 늘 혼자 궁리해 새로운 모양과 패턴을 짜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목도리를 뜬 다음 친구의 빨강색 벙어리장갑을 옆에 놓고 보면서 똑같은 장갑을 짜냈다. 장갑에서 조끼로 조끼에서 스웨터로 그녀의 실력은 나날이 진보했다. 비단 뜨개질뿐만 아니라 그녀는 손재주가 뛰어났고 그림도 잘 그렸다.
충청도 산골짜기에서 외국이라곤 동네 이장아저씨가 다녀왔다는 월남과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이래 혈맹이 됐다는 미국, 우리나라를 36년간이나 지배를 했다는 일본 정도가 기껏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일 때였다. 그런데 외국이라니,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외국에 가서 살기는커녕 단한번이라도 갈 수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난, 꼭 프랑스로 유학 갈 거야.”
고등학교 졸업 직후 만난 그녀는 좀 더 구체적이 돼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중학교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온 나는 그녀와 편지를 계속 주고받다가 서울의 언니 집에 온 그녀를 어쩌다 한 번씩 만나곤 했다. 그녀는 집안 형편상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공무원시험이라도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지방에선 명문이라는 여고를 다니는 내내 미술반을 했지만 미술학원을 다닐 돈이 없어 미대 입시는 일찌감치 포기한 뒤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미술반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7남매나 되는 아이들을 중학교까지 보내는 것도 힘든 게 그녀의 집안 형편이었다.
“내 힘으로 꼭 프랑스에 가서 그림 공부할 거야.”
그녀의 손에는 프랑스어 책이 들려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 발음에 매료돼 프랑스어만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그녀는 국내에서 출판된 프랑스어 학습서를 모두 다 봤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프랑스어 책이라곤 한 권도 보지 못한 채 여자대학 불문과에 턱걸이로 겨우 합격을 한 상태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프랑스어 책들을 흘깃거리며 심한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아니 프랑스어 책을 한 권도 보지 못한 사실을 들킬까봐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야, 너 미팅 안 할래? 여자 한 명 모자라는데. 남자애들이 다섯 명인데 모두 법대 합격한 애들이래.”
난 교회 선배가 합격을 축하한다며 주선한 미팅이 생각나 대뜸 그녀에게 말했다.
“한국대학 관심 없다고 했잖아.”
피뢰침처럼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그녀에게 한 말이 얼마나 치졸하고도 유치한 질투심인지 문득 깨달았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손때가 잔뜩 묻은 프랑스어 책이야말로 그녀의 자존심이자 안간힘이란 걸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겨우 깨달았다.
“네가 참 부러웠어.”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주는 틈틈이 방송통신대학 불문과에 다닌 그녀가 결국 파리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내게 고백했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수원의 여자고등학교에서 불어교사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활 4년 동안 언어나 문학, 어디서도 뛰는 가슴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적당히 교직학점이나 이수해 두자고 타협한 결과였다. 삶이 겨울날 따뜻한 이불속처럼 그렇게 안온하게 유지되리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너무 뜨거워도 살이 데이고 너무 차가워도 몸이 얼어버리므로 적당한 온기를 지닌 이불속 같은 평온이 계속 유지된다면 그 역시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했다. 기를 쓰고 어딘가로 가 봐도 그곳 역시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나는 프랑스로 떠나는 그녀를 배웅했다. 아니 겨우 석 달 지낼 수 있다는 돈을 들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그녀가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러웠다. 돌이 잔뜩 든 배낭을 지고 먼 길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곧 배낭은 어깨를 내리누를 것이고,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돌을 하나씩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어쩌면 자신의 배낭에서 나온 돌부리에 발을 다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진심으로 안쓰러워 공항에서 찔끔 눈물을 흘렸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내가 머물고 있는 안전지대가 새삼 안심이 되고 고맙기까지 했다.
파리에 온지 15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안전지대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미처 도달하지 못한 거리 때문에 지치고 날선 얼굴이었다.
“저렇게 재능이 뛰어난 아이가 네 욕망을 대신 채워주진 않니? 다른 엄마들처럼 대리만족하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잖아.”
그녀의 남편이 아침 일찍 동네 입구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고소한 크로아상을 뜯으며 나는 그녀를 안타까워했다. 어리석은 질문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내 친구들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럴 수 있었으면 뭐 하러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왔겠니?”
공항에서 처음 보았던 인상대로 그녀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순간 나는 도대체 그녀의 이 끈질긴 욕망의 정체가 무엇일까 새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공부를 해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선 프랑스문학과 독일문학과의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유학생들이 손쉽게 학위를 얻는 방법인 프랑스 문학과 한국문학과의 비교문학도 아니고 독일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언어에 재능이 있다 해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첼로를 시작하면서 뒷바라지에 논문은 들여다 볼 새도 없다고 했다. 보통만 하면 좋으련만 절대음감을 타고 났다는 아이에 대한 레슨 선생들의 찬사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 흔한 고물차 하나도 없는 형편에 키도 작은 아이가 제 몸보다 큰 첼로를 갖고 다녀야하므로 아이의 등하교는 물론이고 레슨에도 꼭 따라 다녀야한다고 했다. 틈틈이 돈이 적게 들면서 좋은 선생을 찾아내거나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회보장제도를 활용해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는 각종 지원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것도 그녀의 임무 중 하나였다. 그래도 부족한 레슨비를 보충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었으므로 놀고 싶어 하는 아이를 연습시키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하긴. 그랬겠지.”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등은 이제 아이까지 태운 채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산책이나 나가자. 좁아터진 집에서 이러지 말고.”
그녀가 자켓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새삼 그녀의 집이 답답했다. 장롱이 없어 수납공간이 부족한 집안 곳곳에 짐이 고스란히 쌓여 좁은 집은 더 비좁아보였다. 제대로 된 살림살이가 갖춰지지 않은 채 두 사람의 짐이 합쳐진 데다 아이의 물건들까지 뒤섞여 집안은 마치 피난선 같았다.
“얼마 전부터 너무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어. 넌 요즘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골목 안에 있는 스페니쉬 레스토랑을 지나며 그녀가 물었다. 집값이 시내보다 싼 편이어서 스페인이나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골목 안 풍경이 파리 시내와는 다른, 묘한 이국적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9월 초임에도 이미 가을과 다를 바 없는 날씨였다. 거리엔 단풍도 들지 않은 채 말라버린 낙엽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흰 페인트가 칠해진 덧문을 닫은 집에서 노란 불빛들이 새나왔다. 그녀의 집도 덧문을 닫으면 노란 불빛들이 새어나와 지나가는 누군가에겐 아늑하고 따사로워 보일 것이다.
“하고 싶은 거?”
나는 갑자기 당황했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해야 할 것들에 매달려 살아온 시간이었다.
“널 보니 꿈이란 건 유전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녀가 외국으로 가고 싶다며 외국어에 남는 시간을 모두 쏟을 때도 나는 소위 꿈이란 걸 꾸지 않았다.
“유전자?”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마흔다섯 살의 그녀가 역시 마흔다섯 살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기 다른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그래. 그건 그냥 타고나는 것 같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향한 욕망이 팽팽한 그녀가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냐, 그건 유전자가 아니라 그냥 결핍인지도 몰라.”
내 말을 곱씹기라도 하는 듯 한동안 침묵하며 걷던 그녀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단호한 어조였다.
“정말 그럴까? 모든 게 결핍인 걸까?”
나는 발걸음을 늦추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생각해보니 결핍에 의해 길을 가거나 바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정 많고 성실한 부모 밑에서 크게 결핍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결핍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적어도 그녀를 만난 유년 시절 이후 나는 늘 그녀보다는 안온하고 환한 양지에 기거했다.
“넌 결핍을 몰라. 그 절박한 허기를 네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입을 앙다물었다. 어릴 적부터의 습관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동네 큰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올 때도 그녀는 온몸을 수축시켜 문이라도 닫아버리듯 입을 앙다물었다. 그 어릴 시절로부터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듯한 그녀의 자세 때문이었을까.
“허기? 허기가 없다고 고통도 없는 건 아니야!”
그 때였다. 내 안에서 갑자기 날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순간 나는 놀란 채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토록 날선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나는 말을 뱉어내자마자 후회하기 시작했다.
“고통?”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너만 고통스러운 건 아니야.”
제어가 안 되는 페달을 계속 더 깊이 밟는 기분이었다. 잠깐 긴장감을 놓치자 머릿속이 제멋대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너, 무슨 일 있니?”
그녀가 당혹스런 얼굴로 되물어왔다.
무어지방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였다. 우연히 징검다리를 타고 들어간 영국유학생의 블로그에는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는 다트무어의 사진이 여러 장 올라와 있었다. 황량했다. 사진 속에서 싸늘한 바람이라도 불어올 것처럼 메마른 풍경이 순간 마음을 사로잡았다. 꽃은커녕 한 뼘 이상 되는 나무조차 보이지 않는 매끈한 구릉에 바위와 키 작은 관목만 따개비처럼 붙어 있었다. 종기처럼 솟은 바위들뿐 푸른 식물들이라곤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아니 황량함은 마치 대양의 너울처럼 넓게 펼쳐진 구릉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언덕의 굴곡이 완만하게,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히 펼쳐져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고 난 직후, 나는 갑자기 할인항공 사이트에 들어가 영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떠나야한다는 절박함만 있을 뿐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하루 종일 인터넷만 뒤지던 날이었다. 그날 밤,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시각에 나는 마침 세일이 하루 남은 유럽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일본에서 갈아타야 하는 제팬 에어라인이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동남아시아 항공보다 더 쌌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오사카 공항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무료 숙박까지 포함돼 있었다. 나는 언젠가 새벽 두시에 울며 전화를 걸어온 친구 덕분에 무작정 차를 몰고 지리산까지 달려갔던 때를 떠올리며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클릭했다. 복잡한 예매 절차를 마치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그곳에 더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될 터였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나는 무어의 드넓은 구릉을 보며 몇 번씩이나 되물었다. 그토록 힘겹고 지루한 시간을 날아서 온 곳이 하필이면 이렇게 꽃 한 송이도 없는 황무지란 말인가. 꽃이라기엔 너무 작은 히스꽃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드넓게 펼쳐진 구릉엔 낮은 키와 가시로 무장한 히스꽃 밖에 보이지 않았다. 깨알보다 더 클 것 같지도 않은 보라색 꽃은 꽃이라기도 무색할 만큼 초라하고 옹색했다. 고등학교 시절, 소설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온갖 상상을 펼쳤던 히스가 바로 이 황무지의 작고 초라한 꽃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났다.
그러나 초라한 히스도 무더기로 피어있을 땐 짙은 보라색 보자기라도 덮어놓은 듯 황량한 무어를 빛나게 했다. 나는 히스가 무더기로 피어있는 다트무어의 한가운데에 있는 비앤비Bed&Breakfast에서 열흘을 머물렀다. 휴가철이 지난 비앤비에는 손님이 없어 침대 네 개가 놓인 방을 혼자 독차지한 채 환갑이 넘었다는 거구의 주인여자와 나는 아침마다 함께 식사를 했다. 식탁에는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란 후라이와 토스트 두 조각, 베이컨과 토마토, 그리고 뜨거운 홍차가 올라왔다. 신기하게도 일주일 내내 그 낯선 음식들을 먹고도 토하지 않았다.
균열은 구토로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1학기 초, 오후 수업 두 시간을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목구멍 위로 무언가 치밀었다. 아침부터 속이 메슥거리고 배가 아팠다. 전날 맥주를 두어 잔 마신 탓이어서 늘 그렇듯이 술자리 뒷치레인 줄 알고 아침에 매실액을 물에 타 마셨다. 점심으로 먹은 북어국도 효과가 없는지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후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가는 무렵 나는 결국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어제 안주로 먹은 닭튀김까지 모두 토했다. 나머지는 모두 설사로 내보내고 나니 속이 텅 비어 다탁 하나도 놓이지 않은 선사의 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정갈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메슥거림은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가시지 않았다. 약국에 가서 사흘 치 약을 지어먹고 메슥거림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 후로도 자주 속이 좋지 않지만 나는 만성위염환자들이 그렇듯이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1학기 기말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학교에선 인근의 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교사들을 상대로 1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했는데 옆의 수학담당 김 선생이 자신도 속이 안 좋다며 내시경을 하자고 했다. 나는 20대의 언젠가 속이 좋지 않아 의사의 말만 듣고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내시경을 했다가 온몸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어 그 후로 다시는 내시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하는 게 무섭다며 애원을 하는 김 선생의 엄살 때문에 나는 하는 수없이 수면내시경 신청서에 사인했다.
“위암2기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은 잔뜩 금이 가 있었던 것이다.
명치끝에서 약하지만 또렷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한국을 떠나온 후 거의 통증 없이 지냈는데 다시금 통증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박 선생, 도대체 제 정신이야?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래?”
학교를 휴직하고 집에 틀어박혀버린 나를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오던 김 선생은 영국으로 떠난다는 내게 화를 냈다.
“병든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범죄야!”
김 선생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 빛났다.
“여기 이렇게 있는 한 나는 암세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수술도 하기 전에 쓰러지고 말 거야.”
나는 20여일이 남은 수술날짜에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달력을 쳐다보았다. 암세포가 장막 바깥까지 침윤된 상태지만 다행히 다른 장기로 전이는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개복을 해봐야 정확한 진단이 나온다고 했다. 수술 후에는 항암치료도 해야 한다며 의사는 수술 전 적당한 운동과 충분한 휴식을 권유했다. 빈틈없이 들어찬 대학병원 스케줄에서 최대한 빠른 날짜로 잡아준 것이 20일 후였다. 나는 20일간의 집행유예를 어떻게 보내야할 지 몰라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나마 혼자 살아온 덕에 돌봐야 할 가족도 없었고 일찌감치 부모로부터 독립해 일일이 간섭을 받을 필요도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건 그냥 도망가는 거야.”
김 선생은 공항까지 따라와서도 끝내 화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도망이라도 갈 수 있으니 다행이지 뭐.”
도망이든 무엇이든 나는 한시바삐 그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위기를 맞이하는 가장 흔한 방법인지도 몰랐다.
너무 많이 잔 모양이었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는 2시가 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루이는 오늘 피아노 레슨 후 기차로 세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사는 친구에게 가서 자고 온다고 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나를 배려한 나들이 같았다. 그녀는 아들 세종의 첼로레슨 때문에 아침에 나가 오후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어젯밤 내게 현관열쇠를 준 그녀는 내 잠을 깨울까봐 발소리마저 죽이고 나간 모양이었다. 난 중정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소리에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9월 초순이지만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유럽 날씨 탓에 이불을 두 개나 덮고 잤어도 온몸이 뻐근했다. 나는 누워서 무심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귀가 딱 맞지 않는 좁은 창문 밖으로 나뭇잎 그림자가 얼비쳤다. 나는 일어나 창문을 가린 덧문을 밀어냈다. 아파트 한가운데에 중정이 있었고 그곳엔 포도나무를 비롯한 키 작은 자작나무 몇 그루와 장미넝쿨이 뒤섞여 있었다. 입주자들의 집에서 나온 것인 듯 화분도 몇 개 보였다. 제라늄화분 네 개와 로즈마리 화분 두 개였다. 모처럼 햇살이 환한 정원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디건을 들었다. 중정으로 나가 햇볕을 좀 더 쬐고 싶었다.
그때 그 엽서들이 눈에 띈 건 순전히 벽 가득 쏟아져 들어온 햇살 때문이었다. 중정으로 나가려던 나는 불현듯 그녀의 책상 앞에 멈춰 서 햇살 환한 벽면을 바라보았다. 겨우 컴퓨터 하나가 올라가 있는 작은 책상 앞에는 여러 장의 그림엽서들이 붙어있었다. 그녀의 집에 온 첫날부터 대충 훑어보았던 것들이다. 피카소의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인’, 에곤 쉴레의 크로키와 발자크의 초상과 발자크가 그린 누워있는 여인, 플로베르의 초상 등이 빼곡했다. 프랑스까지 왔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가난한 그녀가 일찌감치 포기한 세계와 차선으로 택한 문학이라는 세계가 그녀의 마음속 풍경처럼 뒤섞여 있었다. 나는 벽 앞에 서서 그림엽서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녀가 중학교 때부터 좋아한 고흐와 모네의 그림이 제일 많았다. 프랑스 와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처음 한국에 다니러 왔던 그녀가 말했다. 비록 그림엽서에 불과했지만 인쇄가 좋아 하나하나 살펴보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그림 한 장 한 장마다 그녀의 내면과 어디서 맞닿을까를 생각하는 맛도 괜찮았다. 그때 갑자기 엽서 한 장이 내 시선을 확 끌어 당겼다. 여인의 이마였다.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의 흰 이마가 나를 건드렸다. 내 몸속 어디선가 가는 떨림이 일었다. 여자는 손에 들고 있는 바느질감과 완벽히 하나가 된 듯 보였다.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자와 들고 있는 옷감이 완벽히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치감. 먼지 하나 틈입할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한 몰아였다. 우리 인생의 어느 때에 저런 한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 내 인생에도 저토록 완벽한 순간이 있었을까, 저절로 되돌아보게 했다. 여자의 이마는 고요하지만 충만했다. 깊은 명상에 든 스님 같기도 하고 자기 생과 치열한 대결을 하고 있는 검객 같기도 했다. 그림은 베르메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자였다.
돌연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디서 솟아난 물인지 알 수 없었다. 대서양 물이 넘쳐 어느새 내 몸속까지 스민 것일까. 나는 당황해 시선을 중정 쪽으로 돌렸다. 낡은 나무창틀에 켜켜이 먼지가 앉은 남루한 풍경이었다. 수맥이라도 건드린 듯 눈물이 샘솟았다.
그때였다. 현관에서 투박한 나무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밀어내기라도 할 듯 천천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손에 와인이 두 병이나 든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다른 손엔 어린이용 첼로케이스가 들려있었다. 세종인 밖에서 놀기라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왠지 이걸 사고 싶더라니.”
어느새 급히 훔친 내 눈물자국을 본 모양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쟁반에 와인 잔 두 개와 치즈 한 덩이를 챙겨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미처 개지 못한 이불 위에 쟁반이 놓여졌다.
“생각해보니 너랑은 술 한 잔 마신 기억이 없었어. 하긴 내가 처음 술 마시기 시작한 곳이 여기니 당연한 일이지만. 모처럼 한국말로 술주정할 수 있는 기회더라고.”
그녀가 레드와인 두 병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알콜 중독으로 끝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그녀는 자기 평생 절대로 술을 마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국기에 대한 맹세보다 더 단호하게 말하곤 했었다. 그런 그녀가 빠른 속도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기 와서 배운 것 중에 술이 제일 근사해.”
그녀의 와인 잔은 채워지기가 무섭게 비어갔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건 그저 겉모습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그 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가장 단호한 금기였던 술이라니. 내겐 아직도 생생한 술 취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겐 이미 지워진 존재인 걸까. 단숨에 와인 반병을 비워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내 앞에 놓인 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나는 그제야 겨우 와인 잔에 입을 슬며시 대었다. 두 모금의 와인이 벽으로 새어드는 비처럼 내 몸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왜 안마시니? 너 술 좋아했잖아.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학사주점에 날 데리고 가 난 한 잔도 안마셨는데 너 혼자 취했었잖아. 이 좋은 걸 우리 아버지 때문에 자칫하면 모르고 평생 살 뻔했어. 그거야 말로 억울한 일이잖니?”
그녀가 내 앞의 잔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와인 잔을 들고 입에 살짝 댔다. 풍부한 탄닌향이 코끝을 통해 온몸 가득 번지는 기분이었다. 동네 수퍼마켓에 가득 진열된 와인 병들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 일었다. 서울에선 큰맘 먹어야 살 수 있던 브랜드도 여기선 물 값보다 좀 더 주면 살 수 있었다. 아니 물 값보다 싼 와인도 수두룩했다.
“암세포와 알콜 중에 어느 놈이 더 셀까?”
나는 결국 남은 와인을 마저 마시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분 좋게 흔들리던 그녀의 시선이 순간 의혹으로 멈춰 섰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다시 한 잔을 더 마셔버렸다.
면역력을 잃은 몸속으로 들어간 와인은 빠르게 흡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속의 암세포와 알코올이 창과 방패를 들고 결투라도 벌이는 것인지 뱃속이 뒤틀리고 목구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어제 저녁에 먹은 야채샐러드까지 모두 토해냈다. 여행을 떠나온 후 처음 일어난 증세였다.
“무슨 일 있구나!”
그녀가 당혹스런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내 인생에 이런 복병이 숨어 있을 줄 몰랐어.”
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마른 품에 안겨 그동안 억지로 막고 있던 울음을 남김없이 쏟아낸 후였다.
“널 볼 때마다 세상엔 그늘 없는 곳도 존재하는구나 싶었는데…….”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경혈자리를 꾹꾹 눌러댔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다는 루이에게 배운 것이라 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어 세종이 네 살 때 아이와 함께 집을 나가 무작정 스웨덴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그녀는 그 후 그를 친구로만 대하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솔직히 얘기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언제든 떠나기로 약속했는데 아직까지 둘 다 새로운 연인이 생기지 않아 그냥 동거인으로 지낸다고 했다.
“하긴 나도 그렇게 원했던 파리까지 와서 이렇게 매여 살게 될 줄 몰랐어.”
생각해보니 그녀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싸우지 않고 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내 기억에도 그러했다.
“그래서 너를 만나고 싶었나봐. 그 땅을 떠나면 암세포에서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무어의 황무지도 결국은 그녀를 만나고 싶은 내 마음 속 핑계였는지도 몰랐다.
“못된 것. 안 아플 때는 연락도 없더니.”
그녀가 긴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듯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냥 너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아. 잘난 척하더니 된통 당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우습지만 내 안에 아주 오래된 죄책감이 있는데 바로 너야. 너를 볼 때마다 알량한 내 처지에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곤 했어. 그게 결국 잘난 척이었다는 거지. 내 몸에 암세포가 있다는 걸 알고 난 후 겨우 깨달았어.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는지.”
어느 새 울음기가 싹 가셔버렸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내 몸속에서 살고 있는 암세포를 인정할 수 있게 된 걸까. 말로 뱉어내고 나니 실감이 났다.
“경험하지 않으면 정말 모르는 세상이 꼭 있다니까. 이 술처럼.”
그녀가 쓴 웃음을 지으며 남은 와인을 병째 들이켰다. 어느새 물기가 밴 음성이었다.
“난 술이라는 내 인생의 제일 큰 금기를 깨고 나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건 그냥 아버지의 삶이었을 뿐이야. 내 몫의 술은 따로 있는 거더라고. 내 아이의 뛰어난 재능으로 내 욕망이 절대로 채워지지 않듯이 말이야.”
내가 베고 누운 그녀의 허벅지에서 돌연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졌다. 온몸의 근육이 곧 마라톤이라도 뛸 사람처럼 시퍼렇게 살아났다. 느닷없이 싱싱한 푸성귀가 떠올랐다.
“욕망이라고……?”
나는 한 번도 내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낯선 단어를 중얼거려보았다.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온 자의 당혹스러움인지도 몰랐다. 혹은 뒤늦게 함정에 빠져 사다리도 없이 맨손으로 어두운 벽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 자의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다시 뱃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부인할 수 없는 존재의 비명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귀를 막지 않고 고스란히 그 비명소리를 들었다. 차라리 후련했다.
그녀가 내 배를 조심스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야배야 자야배야 임진년에 묻힌 배야 니 배는 똥배고 내 손은 약손이다.
어릴 적 배가 아플 때마다 엄마가 배를 문질러주며 읊조렸던 가락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익숙한 손동작과 가락이 많이 해본 솜씨였다. 세종이 아플 때마다 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딱딱하던 배가 조금씩 부드러워 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손이 따뜻한 그녀가 쉬지 않고 배를 문질렀다.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잠이 올 것 같았다.
“사실은 나, 무서워.”
나는 반쯤 잠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서워서 미치겠다고.”
고추다 후추다 생강이다 마늘이다.
노래가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었다. 배를 문지르는 그녀의 손바닥이 잘 달궈진 온돌처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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