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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신작단편/ 부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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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96회 작성일 11-05-2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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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월요일
부희령



그늘의 가장자리에서, 여자는 잠시 머뭇거린다. 눈이 부시다. 이제 한 걸음만 내딛으면 뜨겁게 달궈진 오후의 햇살이 정수리로 쏟아져 내릴 것이다. 여자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락가락한다. 뒤돌아서 다시 계단을 내려가 버릴까? 약속은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서 다음에 만나자고 할까? 아니, 문자를 보내는 게 더 나을까?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여자는 떠밀리듯 허둥지둥 빛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겨우 한 두 걸음 떼었을 뿐인데도 여자의 온 몸에 끓어오른 시럽 같은 공기가 끈적이며 달라붙는다. 여자의 등줄기와 목덜미에 일제히 소름이 돋는다.  
종로 3가역 5번 출구를 빠져 나오자 여자의 눈에 김밥집이 눈에 띈다.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시간을 보낼 겸, 더위도 피할 겸, 여자는 분식집 문을 밀고 들어선다.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 옆에 탁자 네다섯 개가 한 줄로 놓인, 좁고 긴 공간이 나타난다. 에어컨 바람 탓에 공기는 서늘하다. 여자는 문 바로 앞자리에 앉는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난 터라, 분식집 안에는 여자를 제외한 손님 두어 명이 앉아 있을 뿐이다. 여자가 앉은 자리의 맞은 편, 좁고 긴 공간의 저쪽에 주방이 있다. 주방에서 음식이 나오는 배식구 위에 21인치쯤 되어 보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철제 앵글에 고정되어 매달려 있다.   
“뭐 줄까?”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나와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주면서 여자를 향해 묻는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린다. 여자와 같은 나이 또래의 아주머니는 여자를 흘낏 보더니 다시 묻는다.
“뭐 드려?”   
여자는 참치 김밥을 달라고 말한 뒤, 라면을 추가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둔다. 만날 사람과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아주머니는 주방 앞 탁자에 펼쳐져 있는 김밥 재료들 앞에 가서 앉는다. 
상대해야 하는 학부모들이 여자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여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습지 교사 일을 그만두었다. 그 때 여자는 분식집에서 김밥 마는 일을 할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천원대의 시급이었으므로, 하루 여덟 시간 닷새 동안 일하면 학습지 교사 일 할 때와 수입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여자는, 몸은 힘들지 모르지만,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마음은 편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사람을 구한다는 쪽지가 붙어 있는 동네 김밥집 앞까지 갔다가, 여자는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한참 밖에서 서성였다. 분식집 전면은 통 유리창이었고, 그 뒤에 여자보다 많아야 서너 살 정도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하나가 앉아, 머릿수건을 두른 채 김밥을 말고 있었다. 마침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여자는 또 잠시 머뭇거리다가, 머릿수건을 두른 아주머니에게 참치 김밥 이 인분을 포장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자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안함과 쑥스러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겨우 천 원짜리 지폐 석장을 내밀 것이면서,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주문’하고 ‘요구’해도 되는 것일까? 김밥을 마는 아주머니는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밥솥에서 갓난아기 머리통 만하게 뭉쳐진 밥을 꺼내 김 위에 펴 놓고, 스테인리스 통에 담겨 있는 속 재료들을 밥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김발도 없이, 펼쳐진 김과 밥과 속 재료들을 그대로 능숙하게, 쓰윽, 말았다. 여자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상태로, 은박지에 싼 김밥 두 줄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결국 김밥 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자가 김밥 마는 일을 하지 못할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해야 할 이유가 수두룩했다. 당장 돈이 필요했고, 어중간하게 나이만 먹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여자는 분식집에 들어가 김밥을 시켜 먹는 일이나, 그곳에서 김밥을 말아 돈을 버는 일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막상 그 일을 하려고 하자, 무엇인가가 여자를 가로막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섭기까지 했다. 유리창 뒤에서 김밥을 마는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여자는 깨달았다. 한 번 그곳으로 들어가면,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으리라는 것을. 그곳은 그저 죽지 않을 만큼 버티는 시간만을 허락하는 곳이었다. 여자는, 아직은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여자는 자기의 생각에 화들짝 놀랐지만,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김밥을 먹으면서 여자는 생각한다. 
무엇인가 잘못된 게 있을 거라고, 어쩌면 환경 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자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는 여자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애지중지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자가 매를 맞거나 밥을 굶으며 자란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집은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다. 여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다투었다. 물건을 던지기도 했고, 드잡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의 집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여자의 결혼 생활도 그러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자의 눈에 화목한 가정 같은 것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김밥을 다 먹고, 은빛 스테인리스 컵에 담긴 차가운 보리차를 마시면서, 여자는 생각한다. 어쩌면 잘못된 건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이 탓이 아니라, 여자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아들의 태권도 사범 부인과 함께 은행에 갔던 때를 떠올린다. 사범 부인은 분명히 천만 원을 추가 대출을 받는데 필요한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대출을 담당하던 은행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추가 대출과 원래 대출의 보증인이 다를 수는 없다고, 보증을 서려면 앞서 받은 오천 만원의 보증까지 승계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태권도 사범은 그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음주 운전을 한 가해자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보험도 들지 않은 차여서 병원비를 낼 일이 막막하다고 했다. 여자는 사범 부인의 간절한 눈빛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제 곧 외국에 출장 간 제부가 와서 다시 보증을 서 줄 것이라고, 그 때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겠다고, 사범 부인은 장담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면, 그 언저리 어디선가 부터였다. 여자는 사범 부인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자기 자신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분식집을 나와 여전히 맹렬한 더위 속을 걷는다. 길옆에 늘어 서 있는 가로수들 사이사이로 빈 병과 깡통을 가득 담은 자루들, 정체 모를 액체가 고여 있는 사각 양철통, 누렇게 변해버린 스티로폼 상자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잡동사니들과 쏟아지는 햇볕을 피해 건물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지어진 지 삼, 사십 년은 족히 되었을 낡은 건물의 입구에서 의치를 한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올 법한 냄새들이 뿜어져 나온다. 모퉁이를 돈다. 거리 한 귀퉁이 손바닥만 한 나무 그늘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야바위판을 벌여 놓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고, 어떤 사람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여자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낙원상가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연탄불 위에서 하얗게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는 양은솥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정체모를 고기들, 무지갯빛 기름띠를 만들며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물웅덩이 사이를 걸어간다. 구정물 위에 뜬 무지개. 아름답거나 빛나지는 않아도 그것은 무지개, 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건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것과 같은 뜻인가?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도 않지만, 그건 같은 뜻도 아닌 것 같다. 무지개나 연꽃은, 개천에서 난 용과는 다른 그 무엇일 것 같다…….  여자는 그야말로 잡스럽고 헛된 생각들 속을 부유하다가 진열장 쟁반 위에 놓인 돼지머리와 눈이 마주친다. 정확히 말하면 눈이 마주친 게 아니다. 여자의 눈이 죽은 돼지의 콧구멍을 본 것이다. 
자기처럼 자의식이 강하면 모든 게 다 힘들어, 이 일이라서 특별히 힘든 게 아니라고. 물론 사람 백 명을 만나도 계약이 하나도 안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거절을 당하다 보면 여유가 생기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상처에 굳은살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게 돼. 자존심이 생기는 거지. 자존심과 자의식은 전혀 다른 거야ㅡ, 팀장은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어제 아침, 여자가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매우 어렵게 꺼냈을 때였다. 보험설계사 연수를 받고 난 뒤 두 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동안 여자의 실적은 실적이랄 것도 없이, 남 보기에 민망한 것이었다. 
팀장은 올해의 보험 왕 타이틀을 서너 번이나 거머쥔 사람이었다. 검은 색이나 감색의 단정한 옷을 즐겨 입었다. 그 대신 장신구만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려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이나 고객에게 그 사실을 늘 납득시켜야 해요. 팀장은 언제나 논리보다는 확신의 힘이 강한 법이라고 강조했다. 팀장이 아니었다면 여자가 보험설계사 라는 일을 시작할 엄두나 낼 수 있었을까? ㅡ그 돈, 물론 가슴 아프지.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자기가 힘들게 살아온 세월에 대한 보상이었잖아. 하지만 잊어버려. 인생 수업료라고 생각해. 여기서 일하면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벌 수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 팀장은 자신의 급여가 들어오는 통장을 여자에게 보여 주었다. 여자는 통장에 찍힌 숫자들을 보면서 가슴이 뛰었다.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기랑 나랑 다를 게 뭐가 있어? 하면 되는 거야. 팀장은 여자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여자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 팀장 말만 믿으면 모든 혼돈과 불안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것만 같았다.
자의식. 팀장은 여자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명민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팀장의 입에서 자의식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여자에게 자의식이란 죽은 돼지의 콧구멍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때 돼지가 돼지임을 증명해 주는 가장 강력한 징표였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가끔 죽은 돼지의 부릅뜬 눈으로 잘못 보이는, 그저 코에 뚫려 있는 구멍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쟁반 위에 놓인 머리가 한 때 살아 숨 쉬는 돼지였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징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죽은 돼지는 이미 돼지가 아니다. 머리고기거나 편육, 삼겹살 또는 제육볶음인 것이다. 아는 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하던 끝에 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아니 그 순간이 다가 오기 이전부터 여자는 두려움을 느꼈다. 말을 꺼내기에 가장 적당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호흡을 고른다. 이제 기껏해야 머리고기일 뿐이고, 어쩌면 편육이거나 순대일지도 모르는 여자는, 여전히 살아있는 돼지일지도 모른다는 미혹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벌름거릴 수조차 없는 콧구멍에 힘을 주면서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돼지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이미 웬만한 보험은 다 들었다는 말을 할 때, 여자의 언니 목소리는, 열무김치가 잘 익었으니까 좀 가져가라, 할 때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또는 다르게 들렸다. 그것은 팀장이 말한 여자의 자의식 때문이었을까?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아야 한다. 감상이나 연민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자의식은 돈을 벌어주지 않으니, 자의식 ‘따위’ 라고 불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자의 언니는 암 보험을 들어주었다. 계약서를 쓰면서 여자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니가 고액의 보험금을 타려면 암에 걸리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가? 물론 보험에 든다고 해도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암에 걸리면, 보험을 들어두었던 게 더 유리하다. 그렇지만 암에 걸리지 않는다면 보험금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 아무튼 언니가 보험금을 내면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로 했다. 언니에게 보험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암은 워낙 발병 확률이 높은 병이라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는 암 보험 들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해주었을 뿐이다.  
골목의 중간쯤에 낙원 상가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그 옆에는 극장 매표소 창구가 붙어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서는 표를 팔지 않으며, 낙원상가 4층은 이제 그 옛날의 허리우드 극장이 아니다. 지금은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같은 것을 상영하는 시네마테크로 바뀌었다. 여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예전 매표소 창구 위에 걸린 영화 포스터를 바라본다. ‘팔월의 일요일들.’
한 여자가 몽롱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몽롱한 눈길의 여자 옆에는 아래위로 얼굴이 반으로 잘린 두 남자의 모습이 박혀 있다. 하나는 안경을 끼고 있고, 하나는 안경을 끼지 않았다. 낯설다. 저런 사람들도 영화에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얼굴들이다. 몽롱한 눈길의 여자 얼굴 위에는 이런 글자들이 씌어 있다.       
‘섹스는 어긋나고
고백은 쪽팔리며
의심이 난무하는’* 
포스터의 오른쪽 밑에 ‘팔월의 일요일들’이라는 영화 제목이 보인다. 여자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팔월의 일요일들’ 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여자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 아니 전남편이 남기고 간 수많은 책들 가운데 하나였다. 잠 안 오는 밤이면 여자는 책꽂이에 유령처럼 꽂혀 있는 전남편의 책들을 훑어보곤 했다. 우울과 몽상. 몽골 민속사. 처음 삼 분간. 도덕의 계보. 한국의 스승 지눌.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제목 하나하나를 읽고 있으면 누군가의 머릿속을 뒤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자는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어떻게든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책을 뽑아들고 읽기 시작하면, 서너 장을 넘기지 못했다. 집을 줄여 이사를 해야 했을 때, 여자는 그 책들을 모두 버려야 했다.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그 때 여자는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전남편에 대해 원망과 짜증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엉덩이에 묵직하고 단단한 물체가 와 닿는 느낌이 든다. 여자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목발을 들이 대고 서 있다. 목발 끝에 반창고와 함께 칭칭 감겨 있는 시커먼 붕대를 보는 순간, 여자는 울컥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 억지로 여자의 코와 입을 벌리고 주위에 진동하고 있는 누린내와 비린내 그리고 시궁창 냄새를 쏟아 붓고 있는 것 같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목발로 여자의 엉덩이를 찌르려 한다. 아니 이제는 엉덩이가 아니라 치골을 겨냥하고 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다. 순간 골목에 짧은 정적이 흐른다. 낙원 상가 계단으로 나무 궤짝을 옮기던 두 청년, 길에 바가지로 물을 뿌리고 있던 아주머니, 가방을 메고 지나가던 남자 중학생이 힐끔 여자를 바라본다.  
“여기서 떡 하니 길을 막고 서 있으면 어떡해?”
여자의 비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목발을 든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기 보다는 소리를 지르려 애쓴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남자의 목에서 묵직함도 날카로움도 없는 거친 바람 소리가 새어나온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이 있음직한 곳을 찾아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목구비랄 것도 없고 표정이랄 것도 없다. 몸뚱이 위에, 구멍이 몇 개 뚫려 있고, 온통 주름이 잡혀 있는, 누렇고 둥근 물체가 얹혀있을 뿐.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요. 그냥 가.”
바가지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던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핀잔하듯 여자에게 말을 던진다. 여자 때문에 물 끼얹는 일을 계속할 수 없어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인다. 여자가 멈칫거리며 움직이려 하자 목발이 다시 여자를 향해 다가온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여자는 다시 비명을 지른다. 남자는 유령처럼 허술하게 서 있지만, 단단하고 뭉툭한 목발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아이, 참. 뭐 하자는 거야, 시방?”
골목에 울려 퍼지는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에 이번에는 목발이 주춤한다. 남자는 잠시 고개를 돌려 길바닥에 가래침을 뱉는다. 그 틈을 타 여자는 쫓기듯 골목을 빠져 나온다. 골목 어귀에서 이십 미터쯤 벗어난 횡단보도 앞에 서서 건너편 신호등을 바라본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신호등의 빨간불을 노려보고 있다. 여자는 초조하지만, 성급히 뒤돌아보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하나 둘 셋, 여자는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쫓기듯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 인사동 골목으로 접어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라는 심정으로 여자는 엊그제와 어제, 졸업을 한 해 남기고 휴학을 한 뒤 그 뒤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대학 동창들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걸었다.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가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귀찮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동창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을 만큼 현명했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한 번 보자고 말하면 대부분 그 말에 흔쾌히, 또는 미적거리면서 맞장구를 쳐주기는 했지만, 정말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약속을 잡는 사람은 드물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면서 여자를 만나겠다는 말을 한 사람은, 잠시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던 선배 하나뿐이었다. 
선배가 설명해준 찻집을 찾기는 쉬웠다.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팀장은 여자에게 확실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며칠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자, 아자, 파이팅! 아침 미팅 때마다 팀원들과 외치던 구호가 귓가에서 윙윙거린다. 되든 안 되든 여자는 선배를 만나야한다고, 심호흡을 하면서 다짐한다. 직접적이고 또는 우회적인 수많은 거절들 속에서 그는 유일하게 여자를 만나 주겠다고 한 사람이다.  월요일 오후 네 시에. 애매한 시각이다. 

선배는 셔츠 주머니를 뒤져 담배 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갑 하나가 놓여 있다.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들고 불을 붙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선배의 정수리가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가마가 있는 부분에는 머리카락이 거의 한 줌도 남아 있지 않다. 
이게 정말 얼마만이냐, 정말 반갑다, 정말 오랜만이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ㅡ, 등등의 인사치레들을 한바탕 늘어놓은 뒤였다. 막상 마주 대하기 전까지는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던 얼굴이었으나 눈앞에 앉아 있으니 예전의 느낌이 선명해진다. 늘 말이 없고 수줍은 태도 아래 잘못 건드리면 터져버릴 듯, 뇌관을 숨겨놓은 느낌이 들던 사람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에 짙고 굵은 눈썹, 소녀처럼 뺨이 발그레했던 기억도 난다. 이제 복숭아 빛 뺨은 찾아볼 수 없고, 살이 찐 탓인지 얼굴 윤곽도 흐릿해져 있다. 
여자는 뿌연 담배 연기가 선배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가는 것을 보다가, 담배를 너무 많이 피는 거 아니냐고 말을 건넨다. 하루에 서너 갑은 핀다는 선배의 대답에 여자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제 우리가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선배는 맞장구를 치면서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기 하나가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생전에 보험을 많이 들어 두었을까 궁금할 뿐이다. 여자는 이제, 가족 앞으로 일, 이억 정도를 남기고 가지 않는다면, 보람도 없고 효용성도 없는 죽음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너도 그 때 설악산에는 갔었지?” 
한 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선배가 묻는다.  
“설악산……, 그게 언제였죠?” 
“내가 군대 가기 전 인데. 그러니까……”
여자가 대학에 입학하고 맞은 첫 여름방학이었다. 문득 무슨 계곡이니, 무슨 탕이니 폭포니 하는 곳마다 빛나고 있던 황홀한 푸른 물빛이 여자의 눈앞에 떠오른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던 여자는 그렇게 높고 큰 산에 올라가는 건 처음이었다.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연못에 고여 있는 물을 보았을 때는 놀라움인지 감동인지 알 수 없는 충격을 느꼈다. 그림이나 사진에서는 결코 본 적이 없는, 빛과 물이 만들어낸 생생한 무엇이 거기 있었다. 
처음에 백담사 계곡에서 출발할 때는 맑고 더운 날씨였다. 일행은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멱도 감으면서 느긋하게 산행을 했다. 그런데 계곡에서 벗어나 산 중턱쯤에 접어들 무렵, 모두들 이제 막 힘이 부쳐 숨을 몰아쉬면서 산에 오르고 있을 무렵, 소나기가 쏟아졌다. 엄청난 빗줄기였다. 비는 해질 무렵까지 서너 시간 정도 쏟아졌고, 그 와중에 함께 산에 오르던 일행은 서너 사람씩 흩어져 버렸다. 대부분은 소청인가 중청 대피소에서 다시 만났지만, 여자를 포함한 몇 명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낙오된 사람들이었군.”
“그러네요. 기억나요. 우리 그 때 횃불 들고 산에서 내려왔잖아요.” 
해질 무렵 비는 그쳤지만 춥고 배가 고팠다. 해가 지자, 투명함과 푸름, 심지어는 천국의 현현처럼 느껴지던 숲과 계곡은 깊고 무시무시한 어둠으로 변했다. 어둠은 끊임없이 바스락거리고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낙오된 사람들은 추위와 공포 속에서 떨었다. 해가 미처 다 지기도 전에 산속은 이미 주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랜턴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군용버너를 들고 온 누군가에게 휘발유가 조금 있었다. 나뭇가지에 휘발유를 적신 티셔츠를 감아 횃불을 만들었다. 
“아, 그거 내가 만들었잖아. 야, 그거 없었으면 어떡할 뻔 했냐.”    
랜턴을 든 사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리본을 확인하면서 앞장을 섰고, 횃불은 맨 뒤에 있던 사람이 들었다.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밤새 더듬더듬 산을 내려왔다. 날이 희미하게 밝을 무렵 흔들바위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보였다. 대청봉 주위를 빙 돌아 설악동 근처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계곡으로 내려가 넓은 바위 위에 누웠다. 모두들 탈진상태였다. 배가 고팠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생쌀과 감자, 양파 같은 것들뿐이었다. 날 감자를 계곡 물에 씻어 껍질도 까지 않고 나눠 먹었다. 
“그걸 어떻게 먹었는지 몰라.” 
여자와 선배는 마주보며 웃는다. 날감자의 아릿한 맛이 여자의 혀끝에 맴돈다. 
“넌 졸업 안 했다면서? 복학 하고 나서 얘기 들었다. 휴학하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던데.”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수많은 말과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한 때 여자가 가치 있다고 믿었던 것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죄책감, 배신, 좌절, 회의. 낙오. 무지개 그리고 연꽃. 투명한 물빛. 하지만 여자는 그냥 집안 형편이 안 좋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고 대충 얼버무린다. 
“그럴수록 졸업을 했어야지. 그래야 취직해서 돈을 벌지.”
과연 그 말대로 살아오면서 여자는 졸업을 하지 못한 걸 여러 번 후회했다. 제대로 된 회사에 이력서를 넣기도 힘들었고, 학원 강사나 학습지 방문 교사 일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면에서 쉽게 시작할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보험설계사 일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선배에게 내민다.  

찻집에서 나오면서 시계를 본다. 다섯 시 사십오 분.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아직도 더위는 여전하다.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앞장서서 걷던 선배가 인사동에서 낙원 상가 쪽으로 빠지는 골목으로 접어든다. 순대국 냄새를 맡으며 여자는 목발 짚은 남자를 잠시 떠올린다. 이제는 그렇게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아까는 쓸데없는 생각들에 잠겨 과민해져 있던 것 같다. 여자는 목발이 닿았던 스커트 자락을 손으로 툭툭 털어낸다. 
선배는 간판에 붉은 글씨로 ‘삼겹살 꽃등심 갈비 냉면’이라고 커다랗게 씌어 있는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서니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선배는 홀 안에 비어 있는 탁자들을 지나 방으로 성큼 올라선다. 기름때가 꼬질꼬질하게 밴 방석 위에 앉자마자  호기롭게 말한다.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다 시켜. 오늘은 내가 한 턱 쏜다.”
여자는 메뉴판을 훑어본다. 꽃등심, 갈비, 뚝배기불고기, 돼지왕갈비, 삼겹살…냉면. 냉면이 먹고 싶다. 물냉면이 좋을까 비빔냉면이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선배가 넌지시 말한다.  
“삼겹살에 소주, 좋지? 꽃등심은 좀 그렇고……. 하하하.”  
큰 소리로 어색하게 웃던 선배가 갑자기 양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보험설계사 일은 언제부터 했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혼한 뒤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 일을 시작했다고 대답한다. 선배는 놀라면서 이혼했냐고, 정말 이혼했냐고 되묻는다. 여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선배는 한 동안 말이 없다가, 언제, 왜 그랬냐고 묻는다. 여자는 말을 하기가 귀찮아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선배는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 비슷한 말을 서너 번 되풀이 한다. 그러다가 자기도 결혼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럼, 부인을 사랑하지 않으세요? 갑작스런 여자의 질문에 선배는 당황한 듯 보인다.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이들이 있고, 애 엄마니까, 선배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린다. 여자는 종업원이 가져온 삼겹살을 불판에 올려  놓으며, 선배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선배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여자에게 건네준다. ‘○○보증보험회사’ 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불판 위의 삼겹살이 누린내를 풍기면서 타고 있다. 선배는 여자에게 소주를 권하고 자기도 잔에도 한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킨다. 소주 두어 잔에 여자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다. 새삼스레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셔 눈물이 고이는 것도 같다. 선배의 눈자위는 어느 새 벌겋게 물들어 있다. 
“제가 어떤 사람 보증을 서 줬다가……, 손해를 많이 봤어요.”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에 갑자기 목이 멘다. 그래서 위자료로 받은 작은 연립주택을 팔아야 했다고, 아들을 친가로 보내고, 지금 월세 방에서 살고 있다고, 돈을 벌어서 아들을 데려오고 싶다고, 여자는 울먹이며 말한다. 
“자, 한 잔 더 하지.” 
선배가 여자의 말을 자르면서 비어있는 여자의 잔에 술을 따른다. 여자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푼다. 선배가 소주 한 병을 더 시킨다. 식당 안은 어느 새 사람들로 가득 차 종업원을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가 주위 소음에 묻혀 버린다. 옆 자리에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들 셋이 와서 앉는다. 여자의 바로 옆에 앉은 남자가 양말을 벗어 돌돌 말더니 여자의 가방 옆으로 던진다. …앞으로 이천까지는 갈 거야. 지금 빼면 손해야. 글쎄. 그럴까. 외국인들이 팔기 시작하면 바닥을 알 수 없어. 괜히 상투 잡고 망하는 꼴 아닐까?…… 여자는 자기 가방에 밀착되어 있는 옆 사람의 양말에 신경이 쓰여,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불판 위의 삼겹살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 
“너 그 때 왜 내 손을 뿌리쳤냐?”
느닷없이 선배가 묻는다.  
“그 바위 위에서 말이야. 네가 먼저 내 옆에 누웠던 거잖아.”
선배의 붉어진 눈망울에는 물기가 묻어 있다. 여자는 뇌관,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난 그 때 놀러 갈 형편이 아니었어. 돈 많이 준다는 입주 과외 자리도 있었고. 회계사 시험 준비 때문에 학원도 다녀야 했지. 그런데 네가 나를 꼬드겼잖아. 내가 안 가면, 너도 안 가겠다고 했어. 기억 나냐? 도서관에서였는데.”
도서관이라니. 여자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해 여름 동아리에서 설악산 등반을 하기로 했고, 여자는 동아리 동기 중에 마음에 두고 있는 남학생이 있었다. 여자는 갈 사람이 없어서 산행이 무산될까봐 몸이 달았고, 동아리방이나 도서관에서 만나는 선배, 동기들에게 설악산에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내가 안 가면 너도 안가겠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설악산에 간 거였어…… 난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선배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있는 힘껏 잡는다. 여자는 잔속에 담겨 있는 투명한 소주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다.
“그런데 왜 내 손을 뿌리쳤냐? 공부도 일자리도 포기하고, 네 말 때문에 설악산까지 갔는데 말이야.”  
여자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득히 먼 저쪽 세상의 일 같다.    
“그래서 그 철학과 다니는 놈하고 결혼했다면서? 뭐, 보고 들은 건 많아서 폼 잡고 앉아 말은 그럴싸하게 잘 하던 놈이었지. 그게 그러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던 때니까.”   
여자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선배는 혼자 말을 이어간다. 
“그래, 낙오는 한 번이면 족하지.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다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하는 거야. 너 루저가 뭔지 알아? 루저는 길을 잃어버린 놈들이야. 낙오자라고…. 너 나한테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온 거지? 그래. 좋아. 내가 보험 하나 들어준다고 네 형편이 뭐가 달라지겠냐? 사람들이 돈을 왜 버는 줄 아냐? 물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온갖 더러운 꼴 참으면서 돈을 번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거 아니다. 먹고 살려고 돈 버는 게 아니라고. 돈을 벌어야 딴 놈들에게 되갚아줄 수 있거든. 웃기지. 너 웃냐? 너 그거 웃긴 거 아니다. 사람이란 말이야. 자기가 더러운 꼴을 당하거나 남에게 더러운 꼴을 줘야 살 수 있는 존재야. 밟히지 않으려면 밟아야 하는 거라고.”
횡설수설하는 선배의 입에서 씹다만 삼겹살 조각이 튀어 나온다. 
어디선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린다. 선배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핸드폰을 꺼낸다. 번호를 확인한 뒤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홀 쪽으로 걸어 나간다. 아, 그래? 그 얘기는 아까 그렇게 끝난 거 아니었나? ……응. ……응. 뭐야, 이거. 난 다 마무리하고 퇴근한 건데. 이제 와서 딴 소리하면 어떡하나? ……응. ……응. 에이, 씨. 알았어. 기다려. 곧 갈게. 선배는 자리로 돌아와 마시다 만 소주잔을 비운다. 여자는 초조해진다. 
“어쩌지?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 말이야. 가 봐야겠는데.”
“지금요?”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선배는 탁자 위에 놓인 계산서를 들고 일어선다. 여자는 불판 위에서 아직도 타들어가고 있는 삼겹살을 힐끔거리며 선배의 뒤를 따른다. 식당 문 앞에서 선배는 여자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선배는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입 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옛날에 못했던 고백이라도 하려는 거야?”
여자가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선배가 갑자기 여자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러더니 여자를 자기 코앞까지 바짝 끌어당긴다. 여자는 선배의 손이 뜻밖에도 뜨겁고 억세다고 느낀다.
“기다릴래? 한 시간이면 끝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넉넉히 두 시간.” 
“네. 근처에서 시간 보내고 있을 테니 끝나면 연락 주세요.”
여자는 손을 빼지 못한 채 어색하게 선배와 얼굴을 마주대고 서 있다. 여자는 하품을 하고 난 뒤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선배의 눈을 정면으로 보기가 불편하다. 
“야, 너도 늙었어. 너 이젠 옛날 그 모습이 아니야.”
선배는 여자의 손을 놓으며 고개를 돌려 길바닥에 가래침을 뱉는다.

여자의 앞에는 대학생들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서 있다. 두 사람은 매표구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어느 영화를 볼 것인지에 대해 짧은 말다툼을 벌인다. 여자는 짜증이 난다.  먼저 표를 사게 좀 비켜 달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거린다. 
“팔월의 월요일들, 두 장 주세요.”  
남학생의 목소리를 듣고, 여자는 혼자 쓴웃음을 삼킨다. 영화 제목은 ‘팔월의 일요일들’이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여자는 충분히 착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일요일은 이미 지나갔다. 표를 받아든 남녀 한 쌍이 매표구 앞을 떠난다. 
“팔월의 월요일들, 한 장 주세요.”
여자는 반원형 매표구 속으로 목소리를 들이밀듯 속삭인다.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니까. 여자는 월요일이, 특히 무더운 팔월의 월요일이 어쩐지 낙오자들에게 어울리는 날 같다고 생각한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여자는 좌석 번호 도 확인하지 않고 통로 옆 아무 자리에나 가서 앉는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극장 안이 어두워지자, 여자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자에게 어둠은 이제 위협이라기보다는 안식이다. 여자는 아무도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굳이 누구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며 여자는 생각한다. 설악산 계곡의 바위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배의 손을 뿌리친 사람은 정말 여자였을까? 여자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황홀한 물빛을 바라보던 시간, 횃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쳐 나가던 시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게 이상하다.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선배는……, 여자는 선배의 벌겋게 물든 눈자위를 떠올린다. 그리고 유난히 뜨겁고 끈끈했던 손아귀도. 저 아래, 여자의 몸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역겨움이 꿈틀거리면서 올라온다. 여자는 심호흡을 하면서,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본다. 진동으로 맞춰져 있어 선배의 연락을 놓칠까봐 불안하다. 어쩌면 선배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락이 온다고 해도, 보험을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여자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아무 해답도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선배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보험이야 들어주면 좋고 안 들어줘도 상관없다. 그보다도 여자는 선배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태권도 사범 부인과 은행에 가게 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일 수도 있고, 대학을 졸업해서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말일 수도 있다. 선배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낙오자가 되는 게 그다지 끔찍한 일이 아니라는 말일 수도 있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처음에는 영화 속에서 들려오는 음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낮고 둔탁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무엇인가 바닥을 긁고 있는 소리다. 여자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객석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바라본다. 여자의 눈에 통로 위에서 움직이는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가 보인다. 무엇인가 여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소리는 더욱 또렷해진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스크린이 갑자기 밝아지자 기어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어떤 사람이 엎드려 무엇인가를 끌고 기어오고 있다. 여자는 갑자기 깨닫는다. 목발이다. 누군가 목발을 끌고 다가오고 있다. 이제 여자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여자는 두렵지 않다. 아무것도 잘못된 

부희령∙서울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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