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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봄호) 집중조명/ 고인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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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순간을 유영하는 ‘꽃’의 곡예
―유혜영의 신작시 작품세계
고인환|문학평론가
1.
유혜영 시인의 시는 곱씹을수록 그윽한 맛이 난다. 쉽게 이해되고 평범한 듯이 보이는 시어들의 숲을 차분하게 거닐다 보면 어느덧 웅숭깊은 서정의 진경 앞에 서게 된다.
시인이 수놓은 언어의 오솔길을 따라가 보자.
그가 내 눈 속에 들어와 살고 있다
눈 속에서 나를 향해 훨훨 날아온다
앞태가 곱다가 뒤태는 처연하기도 하다
눈길이 멀고 멀어도 끝끝내 따라 잡는다
그가 오면 내 눈은 그를 잡으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앞이 캄캄해진다
나보다 먼저 나를 찾아내고 나보다 먼저 웃는다
눈 속에서 반짝이는 그의 별자리에는
원추리도 피고 꽹과리 소리도 울린다
눈 속에 달이 떠올라 먼 바다가 밀려오면
그가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튼다
깊을수록 거세지는 파도처럼 통증이 눈을 덮쳐도
그의 그물망을 뚫지 못하는 내 눈
속에서 나는 그를 꺼내지 못한다
―「집착」 전문
시인의 ‘눈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곱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한 ‘그/그것’은 무엇일까? ‘그가 오면’ 시인의 눈은 ‘그를 잡으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앞이 캄캄해진다.’ 시인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내고 시인보다 먼저 웃는, 시인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그/그것’은 무엇일까?
시를 조금 더 읽어보자. ‘눈 속에서 반짝이는 그의 별자리에는/원추리도 피고 꽹과리 소리도 울린다.’ ‘눈 속에 달이 떠올라 먼 바다가 밀려’와도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튼다.’ ‘통증이 눈을 덮쳐’ 눈물이 흘러도 시인은 눈 속에서 ‘그를 꺼내지 못한다.’
시인이 이토록 ‘집착’하는 ‘그/그것’은 ‘시’가 아닐까? 자신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 ‘시(그)’의 ‘그물망’ 앞에 어찌할 수 없어 바르르 떠는 순정한 마음을 시인은 아름다운 연애시의 형태로 수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유혜영 시인에게 시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 운명처럼 시인의 삶에 스며든 시에 대한 애틋한 ‘집착’이야말로 유혜영 서정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리라.
2.
이제 시와 몸을 섞고 있는 서정의 무늬들을 감상할 차례이다.
아침에도 일몰이고 점심에도 일몰이고 저녁에도 일몰이네.
씨 없는 열매를 먹고 꽃 없이 열매가 익은 나무를 심네.
다독다독 어둠을 달래며 마음이 먼저 방망이 불을 켜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세포 분열을 하는 불빛이 홀로 외롭네
―「그 여자의 집」 전문
시인의 몸은 모든 것이 시들고 희미해지는, 생명의 에너지가 서서히 소진되는 황혼의 시간, 즉 ‘일몰’의 순간을 견디고 있다. ‘씨 없는 열매를 먹고 꽃 없이 열매가 익는 나무’를 품고 있는 ‘그 여자의 집.’ 마치 생명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쓸쓸한 육신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다독다독 어둠을 달래며’ ‘먼저’ ‘방방이 불’을 켜는 ‘마음’이 있기에 시인의 집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세포 분열’을 하는, ‘일몰’ 속에서 어둠을 벗 삼아 ‘홀로’ 외롭게 빛나는 이 ‘불빛’이야말로 유혜영 시인의 시가 빚어내는 은은한 젊음의 언어이다. 이 그윽한 빛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가을과 겨울 사이, 혹은 장년과 노년 사이에서 ‘세포 분열’하는 이 ‘벼랑 위에 핀 꽃’들의 곡예가 삶의 ‘허방’을 넘어 ‘황홀’하게 튀어 오르는 신비로운 장면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그녀가 절벽 위에서 뛰어다닌다. 팔짝팔짝 날다람쥐 같은 그녀를 절벽이 허둥지둥 쫓아다닌다. 돌이며 넝쿨이며 뿌리, 줄을 타고, 공중그네를 뛰고, 거꾸로 매달린다. 서커스처럼 황홀하다. 그녀는 손풍금 튕기면서 유연하게 재주를 넘는다.
오금이 저려 다가갈 수는 없지만, 어찌어찌 하여 벼랑 끝에 서다보면 슬쩍, 한발 헛디디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허공이다. 시퍼런 칼을 들고 훨훨 날아 거미줄 같은 운명의 줄을 툭툭 끊어버린다. 무정한 하늘빛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거미줄에 걸려있다. 우우우, 몰려다니는 진혼곡 소리 들으며 길 잃은 사슴이 울고 있다.
줄넘기를 할까요.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들어오세요. 집은 어디이고 나이는 몇이세요. 이름이 뭐예요. 통성명을 하고 들어가는 유방암 병동에는 하루에도 몇 개씩 허방이 생긴다. 저승문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다가 절로 벼랑으로 뚝 떨어진다. 그녀가 절벽을 씽씽 돌린다. 떨어지는 꽃잎이 통통 튀어 오른다
―「벼랑 위에 핀 꽃」 전문
‘일몰’의 순간을 유영하던 ‘꽃’이 돌연 ‘절벽 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날다람쥐’로 몸을 바꾼다. ‘돌이며 넝쿨이며 뿌리, 줄을 타고, 공중그네를 뛰고, 거꾸로 매달’리는 ‘그녀’의 ‘서커스’는 황홀하다. ‘손풍금 튕기면서 유연하게 재주를 넘는’ 모습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절벽’이 ‘허둥지둥’ 쫓아다니기 바쁠 정도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벼랑 끝’에서 ‘허공’을 향해 곡예를 하는 ‘꽃’의 모습이 애처롭고 눈물겹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걸려있는 ‘거미줄 같은 운명의 줄’이 ‘시퍼런’ 칼날에 ‘툭툭’ 끊어지는 허공에, ‘우우우, 몰려다니는 진혼곡 소리 들으며 길 잃은 사슴이 울고 있’는 ‘무정한 하늘’ 아래, 시인은 언어의 활시위를 장전한다. 시인의 언어는 ‘절벽을 씽씽 돌’리며 ‘하루에도 몇 개씩’ ‘벼랑으로’ ‘떨어지는 꽃잎’들을 다시 ‘통통 튀어 오’르게 한다. 언어가 삶의 ‘절벽’, ‘허방’을 집어삼키고 경쾌하게 비상하는 장면이다.
이렇듯 유혜영 시인의 시는 삶을 짓누르는 고통의 ‘벼랑’을 경쾌하고 유연한 언어의 ‘곡예’로 가로지르고 있다.
3.
유혜영 시인의 시는 삶의 무게를 곰삭인 그윽한 향취를 머금고 진부한 일상을 경쾌하고 가볍게 타고 넘는다.
젊은 남녀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이다. 공기방울 같은 몸을 부스럭거리며 소리 내지 않고 길고 긴 대화를 한다. 벌침 같은 손가락이 헤실거리는 꽃잎을 꼭 누르면 짜르르 고압전류처럼 불이 번쩍거린다. 열차 안의 모든 풍경들이 꾸욱 꾹 가속페달을 밟는다. 청보리가 쑥쑥 자라면서 풀냄새가 모든 코를 자극한다. 스믈스믈 안개가 자욱하다. 화들짝. 시절도 모르고 꽃망울이 터진다. 취한 바람이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낸다. 어깨에서 허리로 기어가는 손끝에서 모든 입술들이 타고 있다. 열망이 열 개, 백 개, 만개의 꽃을 일시에 피우고 있다
―「지하철 풍경」 전문
지하철 안에서 젊은 남녀가 ‘공기방울 같은 몸을 부스럭거리며 소리 내지 않고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하다. 이들의 몸짓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길이 그윽하면서도 경쾌하다. ‘벌침 같은 손가락이 헤실거리는 꽃잎을 꼭 누르면 짜르르 고압전류처럼 불이 번쩍거린다.’ 젊은 남녀의 몸짓 언어가 ‘고압전류’로 몸을 바꾸어 어느덧 ‘열차 안’에 스며든다. ‘열차 안의 모든 풍경들이 꾸욱 꾹 가속페달을 밟는다.’ 가속이 붙은 풍경들이 열차 밖으로 퍼져나간다. ‘청보리가 쑥쑥 자라면서 풀냄새가 모든 코를 자극한다.’ ‘스믈스믈 안개’가 일더니 이윽고 ‘화들짝, 시절도 모르고 꽃망울이 터진다.’ 젊음의 열망에 후끈 ‘취한 바람이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고, 그 ‘열망’에 타는 ‘입술들’이 ‘열 개, 백 개, 천 개, 만 개의 꽃을 일시에’ 피운다.
젊은 남녀의 ‘열망’을 열차 안의 상황과 포개고, 이를 다시 봄을 불러오는 풍경으로 전이시키는 언어의 연금술이 돌올하다. 주위의 풍경을 끌어당겨 변화시키는 언어의 역동적 힘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호랑이코트」, 「닭님」, 「도깨비 방망이」 등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바탕으로,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잘 살린 정감 어린 이야기 시편들이다. 맛깔나고, 재미나고, 무섭고 경쾌한 에피소드의 연쇄가 독자들을 동심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깜깜한 밤이 온통 산발한 머리카락이다. 방문을 열고 배를 쥐어짜다가 후래쉬를 들고 마당으로 나선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머리털이 쭈삣거린다. 핏물 줄줄 흐르는 손톱이 뒷덜미를 덮친다. 휙, 돌아서며 후래쉬를 빙빙 돌리면 사라지고 없다. 냅다 변소로 뛰어간다. 쪼그리고 앉아 줄줄이 불러대던 감람나무 노래. 며칠 후 며칠 후 강 같은 평화 있으리. 사탕 얻어먹으며 주워들은 찬송가가 고마운 지킴이다. 볼일 끝나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한달음에 뛰어 들어와 벌떡벌떡 냉수 한 잔 들이킨다. 어두운 밤은 정말 무섭다. 어머니 일러주신 대로 닭장 앞으로 가 머리를 조아리며 손을 모은다. 닭님, 닭님, 제발 밤똥 좀 가져가 주세요. 하느님만큼 쎈 닭님이다
―「닭님」 전문
「닭님」은 짧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지만 아주 잘 구조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섬뜩한 비유, 긴박한 상황, 정감어린 추억, 절실하고 순박한 기도 등이 스미고 짜여 ‘밤똥’ 누는 상황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산발한 머리카락’이나 ‘핏물 줄줄 흐르는 손톱’ 등의 공포스러운 비유는 ‘냅다 변소로 뛰어간다’ 혹은 ‘벌떡벌떡 냉수 한 잔 들이킨다’ 등의 급박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견인하고 있으며, ‘볼일’ 보는 순간의 무서움을 잊게 해주는 ‘고마운 지킴이’(감람나무 노래, 찬송가)는 유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며 시적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이어 ‘어머니 일러주신 대로 닭장 앞으로 가 머리를 조아리며’ ‘닭님, 닭님, 제발 밤똥 좀 가져가 주세요’라고 ‘손을 모’으는 천진한 모습은 독자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이가 된 시인, 독자들에겐 그야말로 ‘하느님만큼 쎈 닭님이다.’
이 맛깔스럽고 투명한 언어의 향연에는 그 어떤 가공의 목소리도 스며들어 있지 않다. 다만 살아 움직이는 언어들의 몸짓이 새로운 세계(동심의 세계)와 얼굴을 맞대고 있을 따름이다. 시인과 함께 빠져든 동심의 세계는 ‘지금 여기’의 삶을 훈훈하게 보듬는데 기여하고 있다.
유혜영 시인은 일상의 풍경을 앞지르며 독특한 언어의 집을 구축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일몰’의 시간을 견디며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세포 분열’ 한다. 이 언어의 세포분열은 일상의 고통을 넘어 경쾌한 젊음의 ‘서커스’를 연출하며 현실을 새롭게 창조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끌어당겨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시인의 언어가 우리 시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고인환∙문학평론가,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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