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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2010년 겨울호)/신작시/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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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
일요일의 혀 외 1편
모든 전쟁은 스스로에게 성전聖戰이기에, 성스러움이 악입니다. 성스럽기에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나에게도, 적에게도, 저 악에게도. 겸손한 얼굴 속에 도리어 흉물스러운 이빨이 도사립니다. 세상의 모든 극렬한 대립은 근친상간의 역사만 같아서 비밀이고, 비밀의 전희입니다. 대립이 생산하는 위기라는 단어의 전희. 끝없이 연장되는 위기들이 평범한 현재를 구성하고 지탱합니다. 낡은 2층집 난간에 기대어 서서 엄마가 둘인 아이와 아버지가 없는 아이의 소꿉장난을 내려다보는 일요일 오후의 권태 속에도, 점점 가짓수가 줄어들어가는 반찬 속에도 전희는 있습니다. 전희가 있어 5분도 안 돼 아이들은 울며 치고 박고, 늙어가는 나의 배는 팽창합니다. 일요일은 되도록이면 전심으로 성스러워야 합니다, 일요일에 일어난 전쟁처럼. 아이들은 빽빽 울다가도 깔깔 웃고 전도 행렬은 날로 길어집니다. 때문에 가끔 이곳은 천국의 꼭대기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90도로 인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진실과 나의 진실은 다르지만, 다르다는 사실에 멈춘다면 다를 바 없습니다. 대중들은 적이 존재해야 성스러움을 느끼기 마련이기에, 세상의 모든 판관들의 주된 업무는 적을 심어주는 것. 적의 사람다움을 박탈하면 할수록 모두가 고르게 성스러워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적해서는 성스러울 수 없습니다. 늑대의 가시를 온몸에 두른 사람이었던 것의 눈물과 여전히 꼬리뼈가 자라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일요일 오후의 소리가 새어나오는 이빨. 그 흉물스러운 이빨 사이에 끼인 것은 누구의 살에서 떼어낸 고기 쪼가리입니까. 일요일의 얼굴 뒤에 서 있는 것의 뿔과 주둥아리를 그려보십시오, 일요일이 끝날 때까지. 그것은 혹시 당신의 다리 사이에서 본 것과 닮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눈에 너무 가까이에 있어 흉측한 이것은 시시때때
로 떠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들을 사람이 하는 말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의 관절을 꺾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난 지옥에서라도 몸을 팔겠습니다.
마리포사
혁명의 첫날을 기억하나? 나는 서둘러 서가의 책들을 폐기했지. 이 연기가 나의 몸을 떠올려줄 것이라고 믿는 양,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담배를 피웠지. 북쪽 끝은 본 적도 없고 지도에도 없는데, 지도에도 없는 것들이 나타난 것이네. 나는 온종일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자전에서 사라진 말들을 상상했네. 다음날이면 으레 책상에 앉아 전표들을 정리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하지만 이 전표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수많은 허수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자네의 유령과 서랍 속에 나란히 누워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말했지. 내일 아침이면 이마에 뿔이 달린 사람들이 운전을 할 게야. 사무장은 새로운 색깔의 완장을 차고 있겠지. 자네의 유령은 그까짓 일로 사내 녀석이 겁먹으면 쓰겠느냐며 힘내라고 했지만, 미안하게도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네. 서랍의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그래, 자네 말대로 이제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지. 일체의 감정이 사라졌어. 그것은 저 꽃이 덜 아름답기 때문이네. 그런데 저 꽃의 이름은 무엇인가? 베고니아? 달리아? 식물도감에서 본 꽃과 실제의 꽃이 너무나 다르듯, 나는 소설 속의 감정들을 내게서 느낄 수조차 없지. 그런데 나는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비의 혀 때문에 서가 앞에 서성여야 했던가. 서랍은 열리질 않고, 나는 아직도 첫날이네. 첫날의 나날들인데, 서류가방 속 주판이 저 혼자 덜그럭거리는 바람에 밤새 숫자들을 더하고 빼고 곱할 수밖에 없었네. 그래, 달라질 건 없지. 마트로쉬카처럼 자네의 유령 안에는 또 다른 자네의 유령들이 나오고 나와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북쪽 끝으로 서둘러 달려가네. 나는 또 다시 서가의 책들을 태우고, 그런데 자네 서류가방을 놓고 갔군. 대체 나는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김안∙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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