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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2010년 겨울호)/신작시/노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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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연
사진 외 1편
1.
만삭의 배로 미라가 된 여자
고대의 풍경 속에서 오려진 여자가
색이 바랜 채 놓여있다
여자의 시선은 멀리 저물어가는 하루를 응시한 채
고정되어 있다
아직 다 타들어가지 않은 노을이
움집 속으로 쏟아져 내리고
자궁 속으로 팽창되는 그림자들을 쓰다듬는다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던 고대의 붉은 나비 떼들이
정지된 여자의 표정을 떼어내
어디론가 휙 날아간다
여자의 텅 빈 얼굴 속으로
타다만 노을의 잔상이 매몰된다
2.
여자는 모로 누워 오랫동안 제 자궁 속에 고인 그림자를 내보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팽팽하게 부푼 그림자는 쉽사리 지상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점점 여자의 몸 속 모든 그림자들이 건조된다 딱딱해진 그림자들은 쉬지
않고 팽창해 여자의 온몸을 뒤덮는다
수많은 사진기들이, 일제히 쏟아지는 그림자들을 흡수하고 있다
모자이크 데이즈
그대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당신에게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월요일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힘껏 페달을 밟았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당신이 가꿔놓은 음지식물들을 쓰다듬으며 나는 생인손을 앓았다 날개만 남은 새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아 후드득 어디론가 날아갔다 자꾸만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은 날들이 몰려들었다
화요일
거리의 시인들이 유행이 지난 노래를 부르고 나는 당신에게로 가 편지를 쓴다 세상은 좁고 나와 당신은 멀었다 구겨진 태양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속으로 행적을 알 수 없는 꿈들이 지지직거리며 분해되었다
수요일
나는 당신을 상상하는 것이 즐겁다 걸을 때마다 휘청거리는 공기들 온 몸에 일순간 근육들이 달라붙는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처럼 모든 것에 속력이 붙는다 모자이크된 풍경 속으로 팽창되는 그림자들
목요일
사람들이 머쉬멜로우를 먹으며 TV를 본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사막화 현상이 지속되었다 당신을 상상하는 동안 당신이 구겨진 스크린 속으로 전송되었다 GS25 편의점에 진열된 일회용 눈물들을 마시러 나는 문을 나섰다
금요일
태양이 동쪽에서 뜨는지 서쪽에서 뜨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신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대한 음지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림자들이 위태로웠다 나는 자꾸만 목이 마르고
토요일
아이들이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따위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헌 집과 새 집의 경계를 모르는 아이들이 흙 속을 파헤치는 동안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었다 타다 만 눈물의 잔상들이 허공 속으로 매몰되고 있었다
일요일
더 이상 아이들은 두꺼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당신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노지연∙2009년 ≪시인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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