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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2010년 겨울호)/신작시/유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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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99회 작성일 11-05-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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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피사체  외 1편


잠든 자를 기록한 필름을 응시한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갇혀 있던 말들이 새어나온다 대낮에 과묵한 자는 한밤중에 달변이 된다고 믿는다

움켜쥐고 있던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망막에서 떠돌던 얼룩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자정의 세계는 무엇을 잃어버리는 시간
시간을 잃어버리는 무엇

관 속에 놓인 것처럼 그는 거의 숨을 쉬지도 않는다 고통도 슬픔도 다 잊은, 모두 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

누운 자는 넘어지지 않는다 그는 희미한 윤곽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는데

악몽이 흘러들고 망막에 떠다니는 그림자, 거친 숨이 오가기 시작하는 입술, 점, 점, 일그러지는 얼굴

그러나 꿈의 가장 큰 미덕은 깨어난다는 것, 빛이 끼어든 기억은 검게 타버리고 한 덩어리 초라한 물체의 형상만이 남는다

나는 나를 기록한 적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조차 없다





주전자


누가 내다 버렸을까 여기저기 우그러지고 칠이 벗겨진 달이 비를 맞는다 지붕도 처마도 가려주지 않아 광대뼈에 빗방울이 그대로 꽂힌다
높이 떠올랐을 때는 그 빛으로 여럿이 따뜻했겠다 한 식구 달을 두고 둘러앉아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기도 했으리
기울이면 온기가 흘러나오고 기울이면 사랑이 흘러나오고
달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한 잔 술을 마시는 자가 있었으리 달을 향해 두 손 모으는 자와 은은한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었으리
월식의 밤도 있었으리 그런 밤 곤궁한 얼굴들은 지척에 있어도 서로를 분간하지 못하였겠지만 그림자의 시간을 돌아서 다시 떠올랐을
저 노란 달!
여기저기 함몰된 채 비를 맞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주먹처럼 쏟아지는 세월의 골목에서 떨고 있다
이제 아무도 저것을 달이라 부르지 않는다 저 달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유병록∙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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