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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고명철 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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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比․批|작품론
‘솟구치는 소멸’의 길
―정지아의 봄빛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지아 씨,
저는 간혹 제가 문학평론가로서 읽고 쓰는 관성적 비평 행위에 이끌리는 것보다 다른 평범한 독자들처럼 작품을 편하게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저절로 솟구치는 그 어떤 감동의 순간에 푹 빠져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인지의 끝에서 오는, 과학적 사유의 지평을 힘겹게 횡단하는 과정에서 순간 드러나는 작품의 비의성秘儀性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있지도 않은, 게다가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비의성을 이러저러한 이론으로써 억지로 포장하고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작품이 품고 있는 것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작품 스스로 비의성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관성적 비평을 극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의 비평을 경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말이 비평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불필요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소설집 봄빛(창비, 2008)을 대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관성적 비평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는 주문을 되뇌어봅니다.
저는 당신의 두 번째 소설집 봄빛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화두에 붙잡혔습니다. 아주 진부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과 소멸이란 문제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곤혹스럽게 마주쳐야 할 예술의 과제일 겁니다. 딱히 죽음과 소멸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음과 소멸의 과정을 외면할 수 없기에, 모든 예술가들은 나름대로의 문제의식 속에서 죽음과 소멸을 대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소멸에 깃든 비의성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비의성이 뿜어내는 진실이 삶을 살아가는 뭇 존재들과 어떠한 창조적 만남을 생성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죽음과 소멸에 대한 예술적 탐구는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게 아닌, 삶의 또 다른 내용형식을 이루는 것인 셈이죠.
우선, 봄빛의 표제작인 「봄빛」을 관심 있게 읽어보았습니다. 치매의 증세를 보이는 늙은 아버지는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자식들과 세상 앞에 당당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세월에 장사 없듯, 죽음의 문턱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결국 설마했던 아버지의 치매 증세는 병리학적 사실로 입증되었고, 병원에서 치매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그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이 모습을 지켜보며 작가인 당신은 작품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매선고를 받고도 잠들 수밖에 없을 만큼 부모님의 몸이 늙었음을 깨달은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기가 촉촉이 눈에 고였다. 참으로 오랜만의 눈물이었다. 당황조차 할 겨를도 없이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에 닿은 물기는 짜디짰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고리대금업자 같은 비정한 세월이 자신으로부터도 수금을 시작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떤 세월을 보냈듯 그는 아버지와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품안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했다. (중략) 그들(부모님―인용자)이 그의 생명을 키워냈듯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었다.(「봄빛」, 47∼48쪽)
저는 이 대목을 접하면서 작중인물과 겹쳐지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당신은 첫 소설집 행복(창비, 2004)에서 당신의 가족사, 특히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작품 역시 표제작인 「행복」이었는데요. 젊은 시절 지리산에서 빨치산 유격대원이었던 부모님은 이제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인간으로 내 부모를 바라보았던 적도 있었다. 이상을 위해 목숨도 내걸었던 부모님은 내 삶의 지표였고, 고난에 찬 두 분의 인생은 감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해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부모님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던 혁명가가 아니라 다만 가난하고 볼품없는 늙은네일 뿐이었다.(「행복」, 행복, 20】21쪽)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장엄한 전망과 그것을 이루어내고자 혼신의 힘을 쏟은 혁명가로서의 삶에 투철한 부모가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늙어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소멸의 양태입니다.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 지닌, 소멸해가는 존재가 지닌 삶의 순정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게 있습니다. 세상의 뭇존재들은 소멸하는 것이고, 결국 소멸을 통해 현실의 무상감과 덧없음이 권능화됨으로써 자칫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가 없다는, 가치 허무주의의 늪에 허우적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뜩이나 무차별적 상대주의적 관점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무엇 하나 가치다운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설령 힘겹게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숱한 가치들 중 하나의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인식 속에서 가치 허무주의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당신의 작품을 찬찬히 읽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주목하는 것은 소멸 그 자체가 아니라 소멸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존재의 아픔입니다. 소멸하는 당사자는 물론, 소멸을 지켜보아야 하는 자들 모두의 아픔에 주목합니다. 가령,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소멸」의 경우를 살펴보죠.
작중인물 여자에게 외로움은 어떤 특별한 감정의 상태가 아닙니다. “혼자라는 것은 여자에게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로,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늘 그래왔던 것”(74쪽)입니다. 사회적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는 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 상처이고 치유해야 할 정신적 질환이지만, “혼자 있는 순간에야 여자는 비로소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고,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여자는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 같”(75쪽)은, 즉 그에게 외로움은 생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외로움을 생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을까요.
그는 아버지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에 동반된 상처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를 형식적 부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로 유지해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에 안착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어둠의 정령이라도 보고 있는 듯” “결국 아버지는 그 어둠에 의해 잡아먹혔”(80쪽)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배신을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듯 했”(81쪽)습니다. 이렇듯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만의 외로움과 상처를 죽음의 형식을 통해 세상에 드러냅니다. 하여, 그들의 자식인 여자는 그들의 죽음에 깃든 비의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라지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의 모순”, 즉 “소멸을 준비하는 삶”(81쪽)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도저히 살 수 없으므로, 소멸해가기 위한 삶을 살았으며,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상처를 감내하면서 소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여자는 마침내 “소멸과 소멸 사이에 생선토막처럼 끼어 있는 생명이란 그 자체가 우주의 본질을 체현하는 것”이고, “소멸에 저항하여 불멸을 꿈꾸지 않는다면, 생명은 스스로의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게 된다”(84쪽)는 비의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생명은 스스로의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 저는 앞서 잠시 말했듯이, 이번 소설집 봄빛을 읽으면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화두를 갖게 되었다고 했는데, 「소멸」을 읽는 내내 이 화두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바로 예의 문장에 이르는 순간 어떤 것을 발견한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당신이 애착을 갖는 인물은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는 생명들로서, 소멸은 분명 두려운 것이되, 다가오는 소멸에 비굴해지는 게 아니라, 그 소멸을 외면하지 않고 담대히 감당하는 생의 위의威儀를 지닌 존재의 가치에 주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선가요. 「봄빛」에서 치매 선고를 받은 노인의 죽음을 향한 삶이 욕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삶이 또 다른 삶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입니다. “소진을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힘을 모두어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89쪽)은 소멸에 굴복당하는 게 아닌, 삶의 종언이 아닌, 도리어 소멸을 창조적으로 내파內破하는, 하여 소멸을 생의 격동으로 감당하는, ‘스러져가는 소멸’의 형식을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으로 전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을 지닌 존재의 위의를 이해했을 때, 「순정」의 인물들은 살아 있는 실체로 다가왔습니다. 작중인물 강우는 “조국과 민중의 해방”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 너나없이 평등한 세상”(98쪽)을 향한 이념에 충실한 빨치산이 아닙니다. 우연히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원이 된 강우는 “노동자, 농민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101쪽)을 확고히 지닌 빨치산들과 함께 힘겨운 산생활을 하던 중, 보급투쟁을 나서기 전 남부군의 최고 지도자 이현상이 한 줌의 쌀을 강우의 손에 쥐어주면서, “강우야, 살 길을 뿌리치지는 마라”(101쪽)라는 마지막 말을 듣습니다. 강우는 하산하여 순경이 되면서 목숨을 보전하게 되는데, 살아 남은 자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면서 강우는 깨닫습니다.
“선상님, 나럴 잡지 그랬소. 나가 못 올 줄 알았으면 나가 이리 살 줄도 알았을 것 아니요. 산 것보담 못헌 인생이라도, 그래도 살라고 나럴 보냈소? 참말로 독허요이. 선상님이나 그래 살아보지 그랬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탁자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처럼 따스하던 이현상의 마지막 눈빛이 사라지고, 옥희 누님의 목화솜 같은 환한 웃음도 아득히 멀어졌다. 그 너머로 옥희 누님의 웃음을 닮은 목화 송이 같은 함박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 사이로 스물둘의 젊은 그가 걷고 있었다. 왕시루봉을 넘을 때 그는 왜 그랬는지 퍼붓는 눈 사이로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돌아본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천국이었다. 천국은 미래에 있지 않고 청춘을 바친 그 산속에 있다는 것을 젊은 그는 알지 못했다. 신념 때문이었든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든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이었다는 것을. 취한 그의 의식 속에서 젊은 그가 천국을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창밖의 눈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식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110∼111쪽)
강우는 이제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현상을 비롯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였던 옥희 누님과 산속 동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생을 버텼던 그 숭고한 뜻을 말이죠. 그들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뻔히 알면서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으면서도 구차히 삶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역사에 대한 전망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와 생경한 이념이 아닌, 그들의 생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또 다른 아름다운 생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죽음과 소멸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이었다”는 자기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의 소멸은 ‘스러지는 소멸’이 아닌 또 다른 생의 장엄한 진경眞境에 도달한 ‘솟구치는 소멸’이었습니다. 강우는 비로소 이현상이 들려준 말, “살 길을 뿌리치지는 마라”에 깃든 전언을 곱씹게 됩니다. 비록, 강우는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 동지들과 함께 장엄한 최후를 공유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빨치산 동지들이 앙가슴에 품었던 새로운 역사에 대한 전망을 향해 소멸을 감당하는 생의 힘을 보였다는 것을 증언해야 하며, 강우 역시 새롭게 주어진 삶의 과정 속에서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을 지닐 삶의 책무가 있습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잠시 허방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영감, 그 좋아하던 소주도 인자 싫소? 제우 한잔 묵고 마다요? 차라리 잘됐소. 맛난 것도 잊아불고, 좋던 것도 잊아불고, 그립던 것도 다 잊아불고, 올 때맹키 홀가분히 가씨요. 징헌 기억일랑 쩌 아지랑이 맹키 날레불고 말이어라. 영감, 보이요? 민들레 꽃씨가 날리그만이라. 모르제라. 우리맨치 징헌 세월을 산 워떤 영감의 징헌 기억이 꽃가루로 날린가도 말이어라. 자요, 영감? 그리 자고 또 자요? 거그는 워떻소? 꿈도 없이 다디단 이녘의 잠 속은 워떤게라? 나도 잠 델꼬 가씨요. 나도 이녘이랑 한날 한시에 갈라요. 혼자된 딸년이 걸리기는 하제만 인자 다 컸응게 원도 한도 없소. 항꾼에 갑시다. 가설랑은 다시 안 올라요. 암만 존 시상을 준다개도 나는 싫어라. 이녘 각시로도 싫어라. 무정한 이녘이 싫어서는 아니고라.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의 애달븐 운멩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허고 애달프요. 긍게 우리, 허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생명 가진 잡초로도 말고라, 사램으로도 말고라, 뵈도 않는 먼지 같은 것으로나 날라먼 나서 말이어라, 슬픔도 없이 기쁨도 없이, 여그저그 떠돔시로나, 암것에도 맘 주지 말고 말이어라, 시시허게 고로코롬이나 살아볼라먼 살아보등가요. 벹이 좋소. 짜울짜울, 나도 잠이 와라. 안 깼으면 좋겄소. 이냥 이대로 봄벹 속에 잠을 잠시로 다시는……(「세월」, 235∼236쪽)
치매에 걸린 늙은 남편에게 말을 건넵니다. 대화의 형식을 띨 뿐, 사실상 독백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노부부는 젊어서 빨치산 활동을 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기백과 신념은 세월 속에서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당신의 소설 미학의 한 정점을 슬쩍 엿보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네요.
이번 소설집 봄빛은 첫 소설집 행복과 다른 관점에서 삶의 깊이를 천착하고 있는 게 유달리 보입니다. 행복이 인물과 사건의 관계에서 동태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봄빛인 경우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굴곡이 심한 서사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니라, 정태적 서사를 통해 삶의 깊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다소 밋밋하고 정통적 서사가 주를 이루다보니, 파격적 실험의 서사에 익숙한 최근 독자들에게는 소설로서의 매혹이 크지 않은 것으로 읽히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봄빛이 일궈낸 소설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말 그대로 소설을 ‘읽고 있다’는 실감이 확보된다고 할까요. 소설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읽는 행위를 통해 자연스레 어떤 장면과 소리를 떠올리게 되고, 그것들의 독특한 편집을 통해 소설의 미적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봄빛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설 언어의 물질성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습니다. 위 인용 부분만 해도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 정열적으로 자신이 믿었던 정치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았던 부부는 삶을 반추합니다. 따스하게 내리 쬐는 봄볕을 맞으면서 밀려드는 춘몽春夢을 간신히 버텨내면서, 띄엄띄엄, 그들 연배의 언어로 나지막이 말합니다. 뭇 살아 있는 것들의 애달픈 운명을. 그토록 그들이 뜨겁게 추구했던 역사의 전망은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으며, 생의 기운은 소멸하기 마련이고,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되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234쪽)처럼 과거의 흔적들을 반추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역사의 공식적 언어가 아닌, 역사의 변두리 언어를 통해 그들의 소멸해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노부부는 생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이 실현되지 않은 데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은 생의 애달픈 운명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흔적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할 뿐입니다.
저는 조금 전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봄볕을 한가로이 쐬고 있는 노부부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치매에 걸린 남편, 언제 죽음을 맞이할 지 알 수 없는 한가로운 산책, 그러한 남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는 부인, 젊을 때는 남편의 정치 활동을 뒷바라지하다가 늙어서는 남편의 병든 육신을 간호해야 하는 애달픈 운명, 삶의 순간들을 격정적으로 살아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소멸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봄볕이 포근할까요. 얼마나 봄빛이 감미로울까요. 당신은 이 봄볕과 봄빛의 아우라를 통해 ‘솟구치는 소멸’의 미적 감동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소멸해가는 육신, 만물의 소생을 북돋우는 봄볕과 봄빛, 이 대립의 극성이 갖는 것들이 서로 스며들면서 절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킵니다.
아차, 저는 이제야 몽골 초원의 노인이 들려준, “참 멀리도 왔소이. 나는 말이어라. 일평생 요 풍겡만 봤어라.”(「길1」, 192쪽)에 담긴 전언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네요. 한평생 몽골 초원의 골짜기에서 늙어간 노인은 치열히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의 생의 영토 안에서, 그의 생의 범주 안에서 충실히 삶을 살았습니다. 하여, 그에게 풍경은 삶의 모든 것인 셈입니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소멸해가는 삶을 당당히 살고 있습니다. 몽골의 노인은 ‘솟구치는 소멸’의 미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봄빛이 당신의 소설 세계에서 어떤 결절점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히 성급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후 당신은 ‘빨치산 부모’와 관련된 서사로부터 자유로울 듯합니다. 왠지, 봄빛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른바 ‘빨치산 서사’에 대한 한 매듭을 짓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것은 빨치산으로서 역사에 당당히 살았던 당신의 부모에 대한 삶을 미적으로 소멸하는 형식을 취하는, 그리하여 ‘솟구치는 소멸’의 미의 정점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봄빛 이후 어떠한 소설의 길을 걸어갈지 기대가 큽니다. 당신이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일이 쉽지 않은 만큼 어딘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서사의 길을 내딛는 당신과 함께 가렵니다.
그는 한때는 길이었으나 사람들이 찾지 않아 희미해진 길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갔다. 오래 쉰 탓인지 내리막길인 탓인지 무릎이 시큰거렸다. 죽을 때까지 앞으로도 더 걸어야 할 터였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울려퍼졌다. 그에게는 평생 걸어온 길이지만 뒤따라오는 사내에게는 낯선 길, 그러나 길은 길일 뿐이다. 길은 땅거미 속에 아련히 이어져 있었다. 산밑 막다른 그의 마을로도,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내의 마을로도, 그리고 또 가보지 않은 세상의 어딘가로도 그 길은 이어져 있을 터였다.(「길 2」, 214∼215쪽)
‘솟구치는 소멸’의 길
―정지아의 봄빛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지아 씨,
저는 간혹 제가 문학평론가로서 읽고 쓰는 관성적 비평 행위에 이끌리는 것보다 다른 평범한 독자들처럼 작품을 편하게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저절로 솟구치는 그 어떤 감동의 순간에 푹 빠져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인지의 끝에서 오는, 과학적 사유의 지평을 힘겹게 횡단하는 과정에서 순간 드러나는 작품의 비의성秘儀性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있지도 않은, 게다가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비의성을 이러저러한 이론으로써 억지로 포장하고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작품이 품고 있는 것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작품 스스로 비의성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관성적 비평을 극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의 비평을 경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말이 비평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불필요한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소설집 봄빛(창비, 2008)을 대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관성적 비평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는 주문을 되뇌어봅니다.
저는 당신의 두 번째 소설집 봄빛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화두에 붙잡혔습니다. 아주 진부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과 소멸이란 문제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가들이 곤혹스럽게 마주쳐야 할 예술의 과제일 겁니다. 딱히 죽음과 소멸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음과 소멸의 과정을 외면할 수 없기에, 모든 예술가들은 나름대로의 문제의식 속에서 죽음과 소멸을 대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과 소멸에 깃든 비의성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비의성이 뿜어내는 진실이 삶을 살아가는 뭇 존재들과 어떠한 창조적 만남을 생성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죽음과 소멸에 대한 예술적 탐구는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게 아닌, 삶의 또 다른 내용형식을 이루는 것인 셈이죠.
우선, 봄빛의 표제작인 「봄빛」을 관심 있게 읽어보았습니다. 치매의 증세를 보이는 늙은 아버지는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자식들과 세상 앞에 당당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세월에 장사 없듯, 죽음의 문턱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서고 있습니다. 결국 설마했던 아버지의 치매 증세는 병리학적 사실로 입증되었고, 병원에서 치매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그러한 삶의 이치를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이 모습을 지켜보며 작가인 당신은 작품의 말미를 다음과 같이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매선고를 받고도 잠들 수밖에 없을 만큼 부모님의 몸이 늙었음을 깨달은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기가 촉촉이 눈에 고였다. 참으로 오랜만의 눈물이었다. 당황조차 할 겨를도 없이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에 닿은 물기는 짜디짰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고리대금업자 같은 비정한 세월이 자신으로부터도 수금을 시작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떤 세월을 보냈듯 그는 아버지와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품안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했다. (중략) 그들(부모님―인용자)이 그의 생명을 키워냈듯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었다.(「봄빛」, 47∼48쪽)
저는 이 대목을 접하면서 작중인물과 겹쳐지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당신은 첫 소설집 행복(창비, 2004)에서 당신의 가족사, 특히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작품 역시 표제작인 「행복」이었는데요. 젊은 시절 지리산에서 빨치산 유격대원이었던 부모님은 이제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인간으로 내 부모를 바라보았던 적도 있었다. 이상을 위해 목숨도 내걸었던 부모님은 내 삶의 지표였고, 고난에 찬 두 분의 인생은 감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해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부모님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던 혁명가가 아니라 다만 가난하고 볼품없는 늙은네일 뿐이었다.(「행복」, 행복, 20】21쪽)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장엄한 전망과 그것을 이루어내고자 혼신의 힘을 쏟은 혁명가로서의 삶에 투철한 부모가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늙어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소멸의 양태입니다.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 지닌, 소멸해가는 존재가 지닌 삶의 순정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게 있습니다. 세상의 뭇존재들은 소멸하는 것이고, 결국 소멸을 통해 현실의 무상감과 덧없음이 권능화됨으로써 자칫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가 없다는, 가치 허무주의의 늪에 허우적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뜩이나 무차별적 상대주의적 관점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무엇 하나 가치다운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설령 힘겹게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숱한 가치들 중 하나의 상대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인식 속에서 가치 허무주의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당신의 작품을 찬찬히 읽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주목하는 것은 소멸 그 자체가 아니라 소멸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존재의 아픔입니다. 소멸하는 당사자는 물론, 소멸을 지켜보아야 하는 자들 모두의 아픔에 주목합니다. 가령,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소멸」의 경우를 살펴보죠.
작중인물 여자에게 외로움은 어떤 특별한 감정의 상태가 아닙니다. “혼자라는 것은 여자에게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로,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늘 그래왔던 것”(74쪽)입니다. 사회적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는 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 상처이고 치유해야 할 정신적 질환이지만, “혼자 있는 순간에야 여자는 비로소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고,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여자는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 같”(75쪽)은, 즉 그에게 외로움은 생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유지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외로움을 생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을까요.
그는 아버지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에 동반된 상처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를 형식적 부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로 유지해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에 안착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어둠의 정령이라도 보고 있는 듯” “결국 아버지는 그 어둠에 의해 잡아먹혔”(80쪽)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배신을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듯 했”(81쪽)습니다. 이렇듯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만의 외로움과 상처를 죽음의 형식을 통해 세상에 드러냅니다. 하여, 그들의 자식인 여자는 그들의 죽음에 깃든 비의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라지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의 모순”, 즉 “소멸을 준비하는 삶”(81쪽)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도저히 살 수 없으므로, 소멸해가기 위한 삶을 살았으며,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상처를 감내하면서 소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여자는 마침내 “소멸과 소멸 사이에 생선토막처럼 끼어 있는 생명이란 그 자체가 우주의 본질을 체현하는 것”이고, “소멸에 저항하여 불멸을 꿈꾸지 않는다면, 생명은 스스로의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게 된다”(84쪽)는 비의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생명은 스스로의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 저는 앞서 잠시 말했듯이, 이번 소설집 봄빛을 읽으면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화두를 갖게 되었다고 했는데, 「소멸」을 읽는 내내 이 화두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바로 예의 문장에 이르는 순간 어떤 것을 발견한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당신이 애착을 갖는 인물은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는 생명들로서, 소멸은 분명 두려운 것이되, 다가오는 소멸에 비굴해지는 게 아니라, 그 소멸을 외면하지 않고 담대히 감당하는 생의 위의威儀를 지닌 존재의 가치에 주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선가요. 「봄빛」에서 치매 선고를 받은 노인의 죽음을 향한 삶이 욕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삶이 또 다른 삶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입니다. “소진을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힘을 모두어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89쪽)은 소멸에 굴복당하는 게 아닌, 삶의 종언이 아닌, 도리어 소멸을 창조적으로 내파內破하는, 하여 소멸을 생의 격동으로 감당하는, ‘스러져가는 소멸’의 형식을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으로 전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을 지닌 존재의 위의를 이해했을 때, 「순정」의 인물들은 살아 있는 실체로 다가왔습니다. 작중인물 강우는 “조국과 민중의 해방”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 너나없이 평등한 세상”(98쪽)을 향한 이념에 충실한 빨치산이 아닙니다. 우연히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원이 된 강우는 “노동자, 농민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101쪽)을 확고히 지닌 빨치산들과 함께 힘겨운 산생활을 하던 중, 보급투쟁을 나서기 전 남부군의 최고 지도자 이현상이 한 줌의 쌀을 강우의 손에 쥐어주면서, “강우야, 살 길을 뿌리치지는 마라”(101쪽)라는 마지막 말을 듣습니다. 강우는 하산하여 순경이 되면서 목숨을 보전하게 되는데, 살아 남은 자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면서 강우는 깨닫습니다.
“선상님, 나럴 잡지 그랬소. 나가 못 올 줄 알았으면 나가 이리 살 줄도 알았을 것 아니요. 산 것보담 못헌 인생이라도, 그래도 살라고 나럴 보냈소? 참말로 독허요이. 선상님이나 그래 살아보지 그랬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탁자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처럼 따스하던 이현상의 마지막 눈빛이 사라지고, 옥희 누님의 목화솜 같은 환한 웃음도 아득히 멀어졌다. 그 너머로 옥희 누님의 웃음을 닮은 목화 송이 같은 함박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 사이로 스물둘의 젊은 그가 걷고 있었다. 왕시루봉을 넘을 때 그는 왜 그랬는지 퍼붓는 눈 사이로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돌아본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천국이었다. 천국은 미래에 있지 않고 청춘을 바친 그 산속에 있다는 것을 젊은 그는 알지 못했다. 신념 때문이었든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든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이었다는 것을. 취한 그의 의식 속에서 젊은 그가 천국을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창밖의 눈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의식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110∼111쪽)
강우는 이제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현상을 비롯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였던 옥희 누님과 산속 동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곳에서 생을 버텼던 그 숭고한 뜻을 말이죠. 그들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뻔히 알면서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으면서도 구차히 삶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역사에 대한 전망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와 생경한 이념이 아닌, 그들의 생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또 다른 아름다운 생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죽음과 소멸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이었다”는 자기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의 소멸은 ‘스러지는 소멸’이 아닌 또 다른 생의 장엄한 진경眞境에 도달한 ‘솟구치는 소멸’이었습니다. 강우는 비로소 이현상이 들려준 말, “살 길을 뿌리치지는 마라”에 깃든 전언을 곱씹게 됩니다. 비록, 강우는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 동지들과 함께 장엄한 최후를 공유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빨치산 동지들이 앙가슴에 품었던 새로운 역사에 대한 전망을 향해 소멸을 감당하는 생의 힘을 보였다는 것을 증언해야 하며, 강우 역시 새롭게 주어진 삶의 과정 속에서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을 지닐 삶의 책무가 있습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잠시 허방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영감, 그 좋아하던 소주도 인자 싫소? 제우 한잔 묵고 마다요? 차라리 잘됐소. 맛난 것도 잊아불고, 좋던 것도 잊아불고, 그립던 것도 다 잊아불고, 올 때맹키 홀가분히 가씨요. 징헌 기억일랑 쩌 아지랑이 맹키 날레불고 말이어라. 영감, 보이요? 민들레 꽃씨가 날리그만이라. 모르제라. 우리맨치 징헌 세월을 산 워떤 영감의 징헌 기억이 꽃가루로 날린가도 말이어라. 자요, 영감? 그리 자고 또 자요? 거그는 워떻소? 꿈도 없이 다디단 이녘의 잠 속은 워떤게라? 나도 잠 델꼬 가씨요. 나도 이녘이랑 한날 한시에 갈라요. 혼자된 딸년이 걸리기는 하제만 인자 다 컸응게 원도 한도 없소. 항꾼에 갑시다. 가설랑은 다시 안 올라요. 암만 존 시상을 준다개도 나는 싫어라. 이녘 각시로도 싫어라. 무정한 이녘이 싫어서는 아니고라.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의 애달븐 운멩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허고 애달프요. 긍게 우리, 허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생명 가진 잡초로도 말고라, 사램으로도 말고라, 뵈도 않는 먼지 같은 것으로나 날라먼 나서 말이어라, 슬픔도 없이 기쁨도 없이, 여그저그 떠돔시로나, 암것에도 맘 주지 말고 말이어라, 시시허게 고로코롬이나 살아볼라먼 살아보등가요. 벹이 좋소. 짜울짜울, 나도 잠이 와라. 안 깼으면 좋겄소. 이냥 이대로 봄벹 속에 잠을 잠시로 다시는……(「세월」, 235∼236쪽)
치매에 걸린 늙은 남편에게 말을 건넵니다. 대화의 형식을 띨 뿐, 사실상 독백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노부부는 젊어서 빨치산 활동을 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기백과 신념은 세월 속에서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당신의 소설 미학의 한 정점을 슬쩍 엿보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네요.
이번 소설집 봄빛은 첫 소설집 행복과 다른 관점에서 삶의 깊이를 천착하고 있는 게 유달리 보입니다. 행복이 인물과 사건의 관계에서 동태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봄빛인 경우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굴곡이 심한 서사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니라, 정태적 서사를 통해 삶의 깊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다소 밋밋하고 정통적 서사가 주를 이루다보니, 파격적 실험의 서사에 익숙한 최근 독자들에게는 소설로서의 매혹이 크지 않은 것으로 읽히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봄빛이 일궈낸 소설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말 그대로 소설을 ‘읽고 있다’는 실감이 확보된다고 할까요. 소설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읽는 행위를 통해 자연스레 어떤 장면과 소리를 떠올리게 되고, 그것들의 독특한 편집을 통해 소설의 미적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봄빛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설 언어의 물질성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습니다. 위 인용 부분만 해도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 정열적으로 자신이 믿었던 정치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았던 부부는 삶을 반추합니다. 따스하게 내리 쬐는 봄볕을 맞으면서 밀려드는 춘몽春夢을 간신히 버텨내면서, 띄엄띄엄, 그들 연배의 언어로 나지막이 말합니다. 뭇 살아 있는 것들의 애달픈 운명을. 그토록 그들이 뜨겁게 추구했던 역사의 전망은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으며, 생의 기운은 소멸하기 마련이고,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되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234쪽)처럼 과거의 흔적들을 반추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역사의 공식적 언어가 아닌, 역사의 변두리 언어를 통해 그들의 소멸해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노부부는 생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이 실현되지 않은 데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꿈은 생의 애달픈 운명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흔적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할 뿐입니다.
저는 조금 전 ‘솟구치는 소멸’의 형식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봄볕을 한가로이 쐬고 있는 노부부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치매에 걸린 남편, 언제 죽음을 맞이할 지 알 수 없는 한가로운 산책, 그러한 남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는 부인, 젊을 때는 남편의 정치 활동을 뒷바라지하다가 늙어서는 남편의 병든 육신을 간호해야 하는 애달픈 운명, 삶의 순간들을 격정적으로 살아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소멸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봄볕이 포근할까요. 얼마나 봄빛이 감미로울까요. 당신은 이 봄볕과 봄빛의 아우라를 통해 ‘솟구치는 소멸’의 미적 감동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소멸해가는 육신, 만물의 소생을 북돋우는 봄볕과 봄빛, 이 대립의 극성이 갖는 것들이 서로 스며들면서 절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킵니다.
아차, 저는 이제야 몽골 초원의 노인이 들려준, “참 멀리도 왔소이. 나는 말이어라. 일평생 요 풍겡만 봤어라.”(「길1」, 192쪽)에 담긴 전언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네요. 한평생 몽골 초원의 골짜기에서 늙어간 노인은 치열히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의 생의 영토 안에서, 그의 생의 범주 안에서 충실히 삶을 살았습니다. 하여, 그에게 풍경은 삶의 모든 것인 셈입니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소멸해가는 삶을 당당히 살고 있습니다. 몽골의 노인은 ‘솟구치는 소멸’의 미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봄빛이 당신의 소설 세계에서 어떤 결절점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히 성급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후 당신은 ‘빨치산 부모’와 관련된 서사로부터 자유로울 듯합니다. 왠지, 봄빛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른바 ‘빨치산 서사’에 대한 한 매듭을 짓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것은 빨치산으로서 역사에 당당히 살았던 당신의 부모에 대한 삶을 미적으로 소멸하는 형식을 취하는, 그리하여 ‘솟구치는 소멸’의 미의 정점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봄빛 이후 어떠한 소설의 길을 걸어갈지 기대가 큽니다. 당신이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일이 쉽지 않은 만큼 어딘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서사의 길을 내딛는 당신과 함께 가렵니다.
그는 한때는 길이었으나 사람들이 찾지 않아 희미해진 길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갔다. 오래 쉰 탓인지 내리막길인 탓인지 무릎이 시큰거렸다. 죽을 때까지 앞으로도 더 걸어야 할 터였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울려퍼졌다. 그에게는 평생 걸어온 길이지만 뒤따라오는 사내에게는 낯선 길, 그러나 길은 길일 뿐이다. 길은 땅거미 속에 아련히 이어져 있었다. 산밑 막다른 그의 마을로도,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내의 마을로도, 그리고 또 가보지 않은 세상의 어딘가로도 그 길은 이어져 있을 터였다.(「길 2」, 214∼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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