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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김영식/그와 나 사이를 걷다/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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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25회 작성일 11-05-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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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 사이를 걷다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권진규
김영식



일본의 명문 무사시노미술대학교는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 중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를 선정해 그의 회고전(2009.10.19∼12.5)을 열었다. 주인공은 1953년 졸업생으로 전시회에는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생전에는 한국 미술계의 냉대로 고독한 삶을 스스로 마감한 권진규(1922∼1973). 망우리공원의 깊은 숲속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2010년의 화려한 부활
무사시노미술대학교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가 다녔고, 이와이 슌지의 영화 「4월 이야기」에 나온 학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유명화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일본 최고의 사립 미대이다. 그 대학에서 엄정한 심사를 거쳐 80주년 기념전의 작가로 꼽은 이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권진규였다.
무사시노대학의 쿠로카와 교수와 박형국 교수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250여명의 인터뷰와 100여명으로부터의 자료 입수를 하며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권진규의 작품 두 점을 소장하고 있는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작품 대여를 의뢰하자 미술관은 아예 공동개최를 하자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으로서는 미술관 사상 일본 작가를 제외한 아시아 작가로는 권진규가 처음이었다. 인터넷상에 공개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2009년도 사업계획서에는 권진규전을 개최함에 있어서, 1)권진규 및 한국 근대조각에 대한 연구조사를 무사시노미술대학 및 한국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진행, 2)전시회에 맞추어 무사시노미술대학과 협동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 3)권진규전의 한국국립현대미술관과의 공동개최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진행, 4)목표 관람객수 9천명. 등의 내용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모두 순조롭게 실행된 것으로 언론은 전한다.
여전히 사대주의적 기질이 다분한 문화후진국의 우리는 그동안 권진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거나 홍보하지 못하다가 이번에도 그랬던가 하며 일본의 뒤를 좇아갔다. 미술계의 문제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국의 훌륭한 예술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대접해 주지 못하는 필자를 포함한 일반인의 무교양과 무관심을 더욱 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전시회에 이어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2009. 12. 22∼2010. 2. 28)는 국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74년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전, 15주기인 1988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25주기인 1998년에는 가나아트센터가 개관기념으로, 30주기인 2003년에는 인사아트센터가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권진규 회고전을 연 바가 있었으나 이렇게 대규모로 양국 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홍보된 전작전은 처음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도 권진규의 대표작 ‘지원의 얼굴’의 모델 장지원(서양화가. 63)의 인터뷰를 TV에서 보게 되어 오래 전 딸(지원)과 함께 찾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곧바로 전시회로 달려가지 않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지만, 인터넷상에서 ‘망우리공원’을 검색하다 우연히 권진규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도 바로 올해의 전시회 기사 덕분이었다.
이인성, 이중섭 외로 권진규라는 우리 근대미술의 선구자가 또 한 분 망우리공원에 있었다니! 전시회는 놓쳤지만 그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고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권진규 작품(6월 19일 현재 1967년작 「말머리」가 전시되어 있다)을 보러갔으며, 6월 26일에는 성북구 동선동에 있는 권진규 아틀리에(문의 02-3675-3401. 매월 마지막 토요일 20명 선착순)도 찾아가 보았다.

일본전 포스터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파
1922년 함흥의 부유한 사업가 권정주의 차남으로 태어난 권진규는 어려서부터 강변의 모래나 점토로 인형 만들기를 좋아했으며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즐겼다. 건강 문제로 공기 맑은 호반 도시 춘천의 춘천중학에 들어가 우등으로 졸업(1943년. 21세)한 후 미술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당시 일본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형 진원을 따라 도쿄에 간 기회에 사설 미술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게 되지만 일제의 징용정책으로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1944년 탈출하여 귀국한 후 고향의 과수원에 은둔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 가족은 서울로 이주하고 권진규는 이쾌대(1913∼1965?.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전신 제국미술학교 출신)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미술의 기초를 배우며 이쾌대로부터 무사시노의 교수이며 부르델의 제자인 조각가 시미즈 다카시清水多嘉示(1897∼1981)에 관해 듣게 되어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유학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8년 의대를 졸업한 형이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병을 위해 일본에 건너간 후 다음 해 형의 사망 후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다 1949년(28세)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53년(32세)로 대학을 졸업했다.
권진규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매년 이과전二科展(1916년 관전에서 독립한 재야 미술 단체인 이과회의 전시회)에서 매번 입선(1953년은 특선)하며 조각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지만 마땅한 직업이 없는 일본 생활은 빈곤했다. 학교 후배 도모智와 결혼하고 마네킹 제작, 영화사 촬영 세트 제작 등의 일을 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하여 1958년에는 일양회一陽會(1955년 이과회에서 분파)에도 두 점이 입선하여 회원이 된다. ≪무사시노 미술≫ 창립 30주년 기념 특집호에서는 「두상」(No.20)을 다루며 ‘조각과를 졸업한 곤도(권진규)는 그동안 이과전에서도 수상했지만, 올 해 일양회에서도 수상했고 회우로 추천되었다.’고 우수한 졸업생으로 소개되었다. 
1959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부인을 두고 홀로 귀국한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곳은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일본보다 훨씬 낙후된 이곳의 대중은 여전히 화가를 환쟁이로, 조각가를 석수장이쯤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미술계에서는 일본에서 불쑥 나타난 이방인 권진규를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또, 당시는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라 모든 문화는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과 유럽이 표본이 되었다. 또한 국내는 인맥과 학맥으로 그리고 사회적 교제의 능력으로 국전에 입선을 하고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는 후진적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국내에 인맥도 없고 사교성도 없는 그는 외로운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국전’에 대해 조각가 차근호는 이렇게 말했다.

“해마다 국전이 열릴 무렵에는 으레 말썽이 많아진다. 더욱이 오랫동안 관권이 침염한 국전이 사월혁명을 계기로 하여 어느 정도 쇄신을 기할 수 있을지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전의 기구는 전폭적으로 개편돼야 할 것이고 운영권도 미술인의 손으로 넘겨놔야 마땅할 것이다. 구미 선진국가에 비하여 우리나라와 같이 전람회의 배경에서 관료적인 냄새가 지독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인습과 전통에 입각한 ‘아카데미즘’전이 있다면 반드시 그와 대립되는 ‘앙데빵당’적인 성격이 존립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국전을 추계와 추계로 갈라서 연2회 개회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 보수적인 노장파의 고집과 대우도 원만할 터이고 나가서는 진정한 전위적인 세력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동아일보>(1960. 7. 23)

동아일보 1963. 4. 18

권진규는 국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조각 부분의 심사위원은 두세 사람이 매년 이름을 올리며 장기 집권(?)을 하였고 어느 입선자는 심사위원의 제자였다. 그런 그들만의 잔치에 권진규가 작품을 낼 이유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미술초대 및 공모전’에 조각 부문의 수석으로 입선된 것이 유일하다.(동아일보. 1963. 4. 18)

기념상을 주문받아 만들기 위해 아틀리에의 천장도 높게 개조하였지만 주문은 없었다. 도둑조차 그의 작품을 가져가지 않았다. 어느 교회는 그에게 주문하여 만들게 한 예수상의 후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져가지 않았다. 서울공대와 홍익대, 수도여사대(세종대) 등에 시간 강사로 나갔을 뿐 정규 교수직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귀국 후 6년이나 지난 1965년에 수秀화랑 주최로 신문회관에서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자 한국 최초의 조각 개인전이 열렸지만 평판은 싸늘하기만 했다. 시대의 트렌드가 추상 조각이라 구상 조각은 시대착오적이나 창작 능력의 부재로 매도되었다. 더구나 신라 이후에 끊긴 전통 조각을 되살리겠다며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작업에 몰두하는 권진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테라코타terra cotta는 이태리어로 ‘구운흙’이라는 의미로 외국에서 전해진 단어이지만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 토용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토우가 있었다. 당시 좀체 남들이 하지 않는 테라코타를 하는 이유에 대해 권진규는 조선일보(1971. 6. 2)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여 전의 것이 있지요. 작가로서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브론즈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 금속이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재질이라면 흙은 현대인의 고향을 상징하는 재질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흙에서 멀어질수록 심신의 건강을 잃는다. 따라서 현대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흙으로의 갈망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예술이 가진 효용의 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고 한다면, 권진규의 테라코타야말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게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건칠乾漆은 신라 때 중국 한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목공예품에 옻나무 즙을 발라 윤기를 내고 표면을 보호하는 기법이다. 권진규는 석고형 위에 칠액을 적신 삼베를 겹겹이 발라 말리는 작업을, 때로는 진흙으로 대충의 모양을
지원의 얼굴
만들고 삼베를 감아 칠을 바르고 말린 후 속의 진흙을 빼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 옻나무 특유의 색과 질감은 바로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기법이었다.
테라코타와 건칠의 작가 권진규는 너무 시대를 앞섰던 것일까? 가요보다는 팝송을, TV의 골든타임은 외화를, 국내소설보다는 번역서가 판치는 시대였으니 다른 문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양의 문화를 체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여 자기 것을 만들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권진규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존재가 커져만 간다. 

30년 전에도 바람은 일본에서
하지만 한국 미술계가 수용하지 못한 한국작가 권진규를 30년 전 그때도 일본이 껴안았다. 9촌 조카가 되는 서양화가 권옥연(1923∼ )의 알선으로 1968년 7월에 도쿄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강인한たくましい 리얼리즘’이라는 제목 하에 ‘흉상은……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깎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forme(형상)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像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고 하면서, ‘빈곤한 일본 조각계에 자극을 주는’ 것으로 높게 평가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은 작품 「애자」와 「춘엽니」를 영구 소장하였으며, 화랑은 체재비와 제작비를 부담하겠다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을 권하였다. 또 모교의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의 배려로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의 교수직(비상근 강사)이 내정되었으나 이는 후에 아쉽게도 학내 분규로 인해 무기 연기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권진규는 일본에서의 전시회 성공에 힘입어 한때 왕성하게 제작에 힘을 기울였으나 여전히 한국 미술계와 일반의 냉담 때문에, 2010년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에 연이은 전시회를 국내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결국 니혼바시 화랑의 일본 체재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생각하던 중, 마침 다행히도 명동화랑(대표 김문수)이 나서서 생활비를 대주며 개인전을 열도록 권유하였다. 조선일보(1971. 6. 2)에 실린 기사는 그때의 사정을 알려준다. 기자는 ‘하마터면 저력 있는 조각가 한 사람을 일본에 뺏길 뻔했다.’며 전시회를 준비하는 권진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권진규는 ‘자기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될 수 있으면 조국에 있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서 결혼한 도모의 처가는 권진규의 귀화를 권유했지만 끝내 귀화하지 않았던 사실이나 훗날 도모의 증언(「그이의 조각은 따뜻했어요」, ≪계간미술≫, 1986년 겨울호)을 보더라도 권진규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 
또 이어서, 한국의 조각계와 조각에 대한 평소의 신념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권진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습니다. 한국 조작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돼 있습니다. 우리의 조각은 신라 때 위대했고 고려 때 정지했고 조선조 때는 바로크(장식화)화했습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이런 각오로 권진규는 최선을 다해 마침내 1971년 12월에 개인전을 열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미술계는 권진규를 포용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반응 및 판매가 저조해 권진규와 화랑은 실의에 빠졌다. 일본 전시회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던 그의 영혼과 육신은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고대 마두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 포절 끝에 고사枯死
전시회 실패 이후 고혈압과 수전증 등으로 작품 제작에 거의 손을 떼고 있을 즈음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에 화가의 수상(8) 「예술적 산보」라는 권진규의 글이 실렸다.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하리라. 포절 끝에 고사枯死하리라.”(가지가 꺾여도 절개를 지키리라. 절개를 지키며 말라 죽으리라.) 나뭇가지가 바람이 꺾이는 겨울날의 밤, 마디는 마냥 굵어지고 봄의 꽃순을 잉태한다. 나무들이 합창할 때 항용 가지들은 속곳을 내던진 여자같이 분수를 몰랐고 불타는 숯덩어리처럼 마냥 타오르다가 점점이 까맣게 삭는다.
허영과 종교로 분식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 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송곳으로 찔러보아도 피가 솟아나올 것 같지 않다.

전신이 니승尼僧이 아니라 해도 좋다.
전신이 수녀가 아니라 해도 좋다.
지금은 호적에 올라 있지 않아도, 
지금은 이부종사할지어도,

진흙을 씌우어서, 나의 노실爐室에 화장火葬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어느 해 봄, 이국의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날 때까지를 기약하던 그 사람이 어느 해 가을에 바보소리와 함께 흐느껴 사라져 갔고 이제 오늘은 필부고자匹夫孤子로 진흙 속에 묻혀 있다. 옛적에는 기식을 할 왕도 있었거늘 이제는 그러한 왕들도 없다.
표박유전漂迫流轉이 미의 피안길이 아니기를, 운명이 비극의 서설이 아니기를 바라는 나머지 생존하는 자의 최소한의 주장이 용서되기를…….
어느 착란자의 영상影像에서 진실의 편린이 투영되었을 적에 적이 평상자는 자기 자체를 의심한다.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어야 한다. 그릇된 증언은 주식거래소에서 이루어지고 사랑과 미는 그 동반자에게 안겨주어야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까막까치가 꿈의 청조를 닮아 하늘로 날아 보내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업을 하는 고독한 예술가는 봄날에 파랑새처럼 하늘을 날아보고자 하였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2년 3월에 권진규는 이중섭전을 두 번이나 찾아가 보았다. 이중섭의 「황소」를 조각으로 만들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서양미술의 한국화, 토착화를 강조하며, 대표적 인물로 이쾌대, 이중섭, 박수근을 칭찬하였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동류 미술가들에게 동감을 표현하며 당시의 풍조에 대한 울분을 드러낸 것일까. 몇 번의 결혼 실패로 삶의 동반자도 없이, 몸 하나 뉘일 정도의 쪽방에서 자고 낮에는 음침한 작업실에서 팔리지 않는 작품을
권진규 아뜰리에. 설명: 2010년 6월 26일 후덥지근한 날에 찾아간 권진규의 아틀리에 안에는 작은 우물이 있을 정도로 습한 기운이 가득 찼다. 음울한 고독의 그림자가 작업실 안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2층에 당시의 아틀리에 사진이 걸려 있다.
만드는 예술가의 몸과 정신은 말라만 갔다. 

1973년 1월 고려대학교박물관은 개관을 앞두고 권진규의 작품을 사고자 하였다. 권진규는 「마두」, 「자각상」의 두 점을 팔고 다시 박물관의 요청에 따라 「비구니」를 기증했다. 5월 3일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식에 참석한 권진규는 다시 다음날 5월 4일 아침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작품을 한참 바라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5시 아뜰리에의 이층 쇠사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결국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은 죽어가는 자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가지가 꺾여도折枝 절개를 잃지 않고抱節 그는 끝내 말라죽은枯死 것인가.
묘는 관리사무소에서 동락천 방향으로 8분 정도 거리에 있다. 모퉁이를 두 개 돌아 노고산 위령비 가기 100보 전에 작은 계곡이 나오면 오른쪽에 평해 황씨(201451) 묘가 보이고 그 왼쪽에 난 작은 길로 올라가 계곡이 끝나는
권진규 비석
지점에서 건너편으로 넘어가 201743번을 찾으면 된다. 인적이 드문 숲속 한 가운데에 가족 무덤 4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맨 왼쪽이 형 진원의 묘이고 다음이 모친 조춘, 부친 권정주의 순이며 맨 오른쪽이 권진규의 묘다. 관리사무소의 자료에는 권진규의 묘번이 201720번으로 되어 있으나 그 번호는 보이지 않는다. 맨 왼쪽 권진원의 번호판 201743번만이 남아 있다.

일본의 명문 무사시노미술대학교는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 중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를 선정해 그의 회고전(2009.10.19∼12.5)을 열었다. 주인공은 1953년 졸업생으로 전시회에는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생전에는 한국 미술계의 냉대로 고독한 삶을 스스로 마감한 권진규(1922∼1973). 망우리공원의 깊은 숲속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2010년의 화려한 부활
무사시노미술대학교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가 다녔고, 이와이 슌지의 영화 「4월 이야기」에 나온 학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유명화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일본 최고의 사립 미대이다. 그 대학에서 엄정한 심사를 거쳐 80주년 기념전의 작가로 꼽은 이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권진규였다.
무사시노대학의 쿠로카와 교수와 박형국 교수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250여명의 인터뷰와 100여명으로부터의 자료 입수를 하며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권진규의 작품 두 점을 소장하고 있는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작품 대여를 의뢰하자 미술관은 아예 공동개최를 하자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으로서는 미술관 사상 일본 작가를 제외한 아시아 작가로는 권진규가 처음이었다. 인터넷상에 공개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2009년도 사업계획서에는 권진규전을 개최함에 있어서, 1)권진규 및 한국 근대조각에 대한 연구조사를 무사시노미술대학 및 한국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진행, 2)전시회에 맞추어 무사시노미술대학과 협동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 3)권진규전의 한국국립현대미술관과의 공동개최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진행, 4)목표 관람객수 9천명. 등의 내용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모두 순조롭게 실행된 것으로 언론은 전한다.
여전히 사대주의적 기질이 다분한 문화후진국의 우리는 그동안 권진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거나 홍보하지 못하다가 이번에도 그랬던가 하며 일본의 뒤를 좇아갔다. 미술계의 문제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국의 훌륭한 예술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대접해 주지 못하는 필자를 포함한 일반인의 무교양과 무관심을 더욱 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전시회에 이어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2009. 12. 22∼2010. 2. 28)는 국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74년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전, 15주기인 1988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25주기인 1998년에는 가나아트센터가 개관기념으로, 30주기인 2003년에는 인사아트센터가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권진규 회고전을 연 바가 있었으나 이렇게 대규모로 양국 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홍보된 전작전은 처음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도 권진규의 대표작 ‘지원의 얼굴’의 모델 장지원(서양화가. 63)의 인터뷰를 TV에서 보게 되어 오래 전 딸(지원)과 함께 찾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곧바로 전시회로 달려가지 않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지만, 인터넷상에서 ‘망우리공원’을 검색하다 우연히 권진규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도 바로 올해의 전시회 기사 덕분이었다.
이인성, 이중섭 외로 권진규라는 우리 근대미술의 선구자가 또 한 분 망우리공원에 있었다니! 전시회는 놓쳤지만 그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고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권진규 작품(6월 19일 현재 1967년작 「말머리」가 전시되어 있다)을 보러갔으며, 6월 26일에는 성북구 동선동에 있는 권진규 아틀리에(문의 02-3675-3401. 매월 마지막 토요일 20명 선착순)도 찾아가 보았다.

일본전 포스터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파
1922년 함흥의 부유한 사업가 권정주의 차남으로 태어난 권진규는 어려서부터 강변의 모래나 점토로 인형 만들기를 좋아했으며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즐겼다. 건강 문제로 공기 맑은 호반 도시 춘천의 춘천중학에 들어가 우등으로 졸업(1943년. 21세)한 후 미술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당시 일본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형 진원을 따라 도쿄에 간 기회에 사설 미술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게 되지만 일제의 징용정책으로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1944년 탈출하여 귀국한 후 고향의 과수원에 은둔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 가족은 서울로 이주하고 권진규는 이쾌대(1913∼1965?.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전신 제국미술학교 출신)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미술의 기초를 배우며 이쾌대로부터 무사시노의 교수이며 부르델의 제자인 조각가 시미즈 다카시清水多嘉示(1897∼1981)에 관해 듣게 되어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유학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8년 의대를 졸업한 형이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병을 위해 일본에 건너간 후 다음 해 형의 사망 후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다 1949년(28세)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53년(32세)로 대학을 졸업했다.
권진규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매년 이과전二科展(1916년 관전에서 독립한 재야 미술 단체인 이과회의 전시회)에서 매번 입선(1953년은 특선)하며 조각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지만 마땅한 직업이 없는 일본 생활은 빈곤했다. 학교 후배 도모智와 결혼하고 마네킹 제작, 영화사 촬영 세트 제작 등의 일을 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하여 1958년에는 일양회一陽會(1955년 이과회에서 분파)에도 두 점이 입선하여 회원이 된다. ≪무사시노 미술≫ 창립 30주년 기념 특집호에서는 「두상」(No.20)을 다루며 ‘조각과를 졸업한 곤도(권진규)는 그동안 이과전에서도 수상했지만, 올 해 일양회에서도 수상했고 회우로 추천되었다.’고 우수한 졸업생으로 소개되었다. 
1959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부인을 두고 홀로 귀국한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곳은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일본보다 훨씬 낙후된 이곳의 대중은 여전히 화가를 환쟁이로, 조각가를 석수장이쯤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미술계에서는 일본에서 불쑥 나타난 이방인 권진규를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또, 당시는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라 모든 문화는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과 유럽이 표본이 되었다. 또한 국내는 인맥과 학맥으로 그리고 사회적 교제의 능력으로 국전에 입선을 하고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는 후진적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국내에 인맥도 없고 사교성도 없는 그는 외로운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국전’에 대해 조각가 차근호는 이렇게 말했다.

“해마다 국전이 열릴 무렵에는 으레 말썽이 많아진다. 더욱이 오랫동안 관권이 침염한 국전이 사월혁명을 계기로 하여 어느 정도 쇄신을 기할 수 있을지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전의 기구는 전폭적으로 개편돼야 할 것이고 운영권도 미술인의 손으로 넘겨놔야 마땅할 것이다. 구미 선진국가에 비하여 우리나라와 같이 전람회의 배경에서 관료적인 냄새가 지독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인습과 전통에 입각한 ‘아카데미즘’전이 있다면 반드시 그와 대립되는 ‘앙데빵당’적인 성격이 존립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국전을 추계와 추계로 갈라서 연2회 개회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 보수적인 노장파의 고집과 대우도 원만할 터이고 나가서는 진정한 전위적인 세력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동아일보>(1960. 7. 23)

동아일보 1963. 4. 18

권진규는 국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조각 부분의 심사위원은 두세 사람이 매년 이름을 올리며 장기 집권(?)을 하였고 어느 입선자는 심사위원의 제자였다. 그런 그들만의 잔치에 권진규가 작품을 낼 이유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미술초대 및 공모전’에 조각 부문의 수석으로 입선된 것이 유일하다.(동아일보. 1963. 4. 18)

기념상을 주문받아 만들기 위해 아틀리에의 천장도 높게 개조하였지만 주문은 없었다. 도둑조차 그의 작품을 가져가지 않았다. 어느 교회는 그에게 주문하여 만들게 한 예수상의 후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져가지 않았다. 서울공대와 홍익대, 수도여사대(세종대) 등에 시간 강사로 나갔을 뿐 정규 교수직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귀국 후 6년이나 지난 1965년에 수秀화랑 주최로 신문회관에서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자 한국 최초의 조각 개인전이 열렸지만 평판은 싸늘하기만 했다. 시대의 트렌드가 추상 조각이라 구상 조각은 시대착오적이나 창작 능력의 부재로 매도되었다. 더구나 신라 이후에 끊긴 전통 조각을 되살리겠다며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작업에 몰두하는 권진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테라코타terra cotta는 이태리어로 ‘구운흙’이라는 의미로 외국에서 전해진 단어이지만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 토용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토우가 있었다. 당시 좀체 남들이 하지 않는 테라코타를 하는 이유에 대해 권진규는 조선일보(1971. 6. 2)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여 전의 것이 있지요. 작가로서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브론즈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 금속이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재질이라면 흙은 현대인의 고향을 상징하는 재질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흙에서 멀어질수록 심신의 건강을 잃는다. 따라서 현대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흙으로의 갈망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예술이 가진 효용의 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고 한다면, 권진규의 테라코타야말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게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건칠乾漆은 신라 때 중국 한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목공예품에 옻나무 즙을 발라 윤기를 내고 표면을 보호하는 기법이다. 권진규는 석고형 위에 칠액을 적신 삼베를 겹겹이 발라 말리는 작업을, 때로는 진흙으로 대충의 모양을
지원의 얼굴
만들고 삼베를 감아 칠을 바르고 말린 후 속의 진흙을 빼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 옻나무 특유의 색과 질감은 바로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기법이었다.
테라코타와 건칠의 작가 권진규는 너무 시대를 앞섰던 것일까? 가요보다는 팝송을, TV의 골든타임은 외화를, 국내소설보다는 번역서가 판치는 시대였으니 다른 문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양의 문화를 체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여 자기 것을 만들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권진규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존재가 커져만 간다. 

30년 전에도 바람은 일본에서
하지만 한국 미술계가 수용하지 못한 한국작가 권진규를 30년 전 그때도 일본이 껴안았다. 9촌 조카가 되는 서양화가 권옥연(1923∼ )의 알선으로 1968년 7월에 도쿄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강인한たくましい 리얼리즘’이라는 제목 하에 ‘흉상은……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깎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forme(형상)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像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고 하면서, ‘빈곤한 일본 조각계에 자극을 주는’ 것으로 높게 평가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은 작품 「애자」와 「춘엽니」를 영구 소장하였으며, 화랑은 체재비와 제작비를 부담하겠다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을 권하였다. 또 모교의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의 배려로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의 교수직(비상근 강사)이 내정되었으나 이는 후에 아쉽게도 학내 분규로 인해 무기 연기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권진규는 일본에서의 전시회 성공에 힘입어 한때 왕성하게 제작에 힘을 기울였으나 여전히 한국 미술계와 일반의 냉담 때문에, 2010년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에 연이은 전시회를 국내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결국 니혼바시 화랑의 일본 체재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생각하던 중, 마침 다행히도 명동화랑(대표 김문수)이 나서서 생활비를 대주며 개인전을 열도록 권유하였다. 조선일보(1971. 6. 2)에 실린 기사는 그때의 사정을 알려준다. 기자는 ‘하마터면 저력 있는 조각가 한 사람을 일본에 뺏길 뻔했다.’며 전시회를 준비하는 권진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권진규는 ‘자기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될 수 있으면 조국에 있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서 결혼한 도모의 처가는 권진규의 귀화를 권유했지만 끝내 귀화하지 않았던 사실이나 훗날 도모의 증언(「그이의 조각은 따뜻했어요」, ≪계간미술≫, 1986년 겨울호)을 보더라도 권진규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 
또 이어서, 한국의 조각계와 조각에 대한 평소의 신념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권진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습니다. 한국 조작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돼 있습니다. 우리의 조각은 신라 때 위대했고 고려 때 정지했고 조선조 때는 바로크(장식화)화했습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이런 각오로 권진규는 최선을 다해 마침내 1971년 12월에 개인전을 열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미술계는 권진규를 포용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반응 및 판매가 저조해 권진규와 화랑은 실의에 빠졌다. 일본 전시회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던 그의 영혼과 육신은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고대 마두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 포절 끝에 고사枯死
전시회 실패 이후 고혈압과 수전증 등으로 작품 제작에 거의 손을 떼고 있을 즈음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에 화가의 수상(8) 「예술적 산보」라는 권진규의 글이 실렸다.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하리라. 포절 끝에 고사枯死하리라.”(가지가 꺾여도 절개를 지키리라. 절개를 지키며 말라 죽으리라.) 나뭇가지가 바람이 꺾이는 겨울날의 밤, 마디는 마냥 굵어지고 봄의 꽃순을 잉태한다. 나무들이 합창할 때 항용 가지들은 속곳을 내던진 여자같이 분수를 몰랐고 불타는 숯덩어리처럼 마냥 타오르다가 점점이 까맣게 삭는다.
허영과 종교로 분식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 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송곳으로 찔러보아도 피가 솟아나올 것 같지 않다.

전신이 니승尼僧이 아니라 해도 좋다.
전신이 수녀가 아니라 해도 좋다.
지금은 호적에 올라 있지 않아도, 
지금은 이부종사할지어도,

진흙을 씌우어서, 나의 노실爐室에 화장火葬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어느 해 봄, 이국의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날 때까지를 기약하던 그 사람이 어느 해 가을에 바보소리와 함께 흐느껴 사라져 갔고 이제 오늘은 필부고자匹夫孤子로 진흙 속에 묻혀 있다. 옛적에는 기식을 할 왕도 있었거늘 이제는 그러한 왕들도 없다.
표박유전漂迫流轉이 미의 피안길이 아니기를, 운명이 비극의 서설이 아니기를 바라는 나머지 생존하는 자의 최소한의 주장이 용서되기를…….
어느 착란자의 영상影像에서 진실의 편린이 투영되었을 적에 적이 평상자는 자기 자체를 의심한다.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어야 한다. 그릇된 증언은 주식거래소에서 이루어지고 사랑과 미는 그 동반자에게 안겨주어야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까막까치가 꿈의 청조를 닮아 하늘로 날아 보내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업을 하는 고독한 예술가는 봄날에 파랑새처럼 하늘을 날아보고자 하였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2년 3월에 권진규는 이중섭전을 두 번이나 찾아가 보았다. 이중섭의 「황소」를 조각으로 만들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서양미술의 한국화, 토착화를 강조하며, 대표적 인물로 이쾌대, 이중섭, 박수근을 칭찬하였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동류 미술가들에게 동감을 표현하며 당시의 풍조에 대한 울분을 드러낸 것일까. 몇 번의 결혼 실패로 삶의 동반자도 없이, 몸 하나 뉘일 정도의 쪽방에서 자고 낮에는 음침한 작업실에서 팔리지 않는 작품을
권진규 아뜰리에. 설명: 2010년 6월 26일 후덥지근한 날에 찾아간 권진규의 아틀리에 안에는 작은 우물이 있을 정도로 습한 기운이 가득 찼다. 음울한 고독의 그림자가 작업실 안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2층에 당시의 아틀리에 사진이 걸려 있다.
만드는 예술가의 몸과 정신은 말라만 갔다. 

1973년 1월 고려대학교박물관은 개관을 앞두고 권진규의 작품을 사고자 하였다. 권진규는 「마두」, 「자각상」의 두 점을 팔고 다시 박물관의 요청에 따라 「비구니」를 기증했다. 5월 3일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식에 참석한 권진규는 다시 다음날 5월 4일 아침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작품을 한참 바라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5시 아뜰리에의 이층 쇠사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결국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은 죽어가는 자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가지가 꺾여도折枝 절개를 잃지 않고抱節 그는 끝내 말라죽은枯死 것인가.
묘는 관리사무소에서 동락천 방향으로 8분 정도 거리에 있다. 모퉁이를 두 개 돌아 노고산 위령비 가기 100보 전에 작은 계곡이 나오면 오른쪽에 평해 황씨(201451) 묘가 보이고 그 왼쪽에 난 작은 길로 올라가 계곡이 끝나는
권진규 비석
지점에서 건너편으로 넘어가 201743번을 찾으면 된다. 인적이 드문 숲속 한 가운데에 가족 무덤 4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맨 왼쪽이 형 진원의 묘이고 다음이 모친 조춘, 부친 권정주의 순이며 맨 오른쪽이 권진규의 묘다. 관리사무소의 자료에는 권진규의 묘번이 201720번으로 되어 있으나 그 번호는 보이지 않는다. 맨 왼쪽 권진원의 번호판 201743번만이 남아 있다.

일본의 명문 무사시노미술대학교는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 중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를 선정해 그의 회고전(2009.10.19∼12.5)을 열었다. 주인공은 1953년 졸업생으로 전시회에는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생전에는 한국 미술계의 냉대로 고독한 삶을 스스로 마감한 권진규(1922∼1973). 망우리공원의 깊은 숲속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2010년의 화려한 부활
무사시노미술대학교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가 다녔고, 이와이 슌지의 영화 「4월 이야기」에 나온 학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유명화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일본 최고의 사립 미대이다. 그 대학에서 엄정한 심사를 거쳐 80주년 기념전의 작가로 꼽은 이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권진규였다.
무사시노대학의 쿠로카와 교수와 박형국 교수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250여명의 인터뷰와 100여명으로부터의 자료 입수를 하며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권진규의 작품 두 점을 소장하고 있는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작품 대여를 의뢰하자 미술관은 아예 공동개최를 하자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으로서는 미술관 사상 일본 작가를 제외한 아시아 작가로는 권진규가 처음이었다. 인터넷상에 공개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2009년도 사업계획서에는 권진규전을 개최함에 있어서, 1)권진규 및 한국 근대조각에 대한 연구조사를 무사시노미술대학 및 한국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진행, 2)전시회에 맞추어 무사시노미술대학과 협동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 3)권진규전의 한국국립현대미술관과의 공동개최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진행, 4)목표 관람객수 9천명. 등의 내용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모두 순조롭게 실행된 것으로 언론은 전한다.
여전히 사대주의적 기질이 다분한 문화후진국의 우리는 그동안 권진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거나 홍보하지 못하다가 이번에도 그랬던가 하며 일본의 뒤를 좇아갔다. 미술계의 문제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국의 훌륭한 예술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대접해 주지 못하는 필자를 포함한 일반인의 무교양과 무관심을 더욱 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전시회에 이어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2009. 12. 22∼2010. 2. 28)는 국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74년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전, 15주기인 1988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25주기인 1998년에는 가나아트센터가 개관기념으로, 30주기인 2003년에는 인사아트센터가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권진규 회고전을 연 바가 있었으나 이렇게 대규모로 양국 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홍보된 전작전은 처음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도 권진규의 대표작 ‘지원의 얼굴’의 모델 장지원(서양화가. 63)의 인터뷰를 TV에서 보게 되어 오래 전 딸(지원)과 함께 찾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곧바로 전시회로 달려가지 않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지만, 인터넷상에서 ‘망우리공원’을 검색하다 우연히 권진규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도 바로 올해의 전시회 기사 덕분이었다.
이인성, 이중섭 외로 권진규라는 우리 근대미술의 선구자가 또 한 분 망우리공원에 있었다니! 전시회는 놓쳤지만 그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고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권진규 작품(6월 19일 현재 1967년작 「말머리」가 전시되어 있다)을 보러갔으며, 6월 26일에는 성북구 동선동에 있는 권진규 아틀리에(문의 02-3675-3401. 매월 마지막 토요일 20명 선착순)도 찾아가 보았다.

일본전 포스터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파
1922년 함흥의 부유한 사업가 권정주의 차남으로 태어난 권진규는 어려서부터 강변의 모래나 점토로 인형 만들기를 좋아했으며 아버지가 사준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즐겼다. 건강 문제로 공기 맑은 호반 도시 춘천의 춘천중학에 들어가 우등으로 졸업(1943년. 21세)한 후 미술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당시 일본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형 진원을 따라 도쿄에 간 기회에 사설 미술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게 되지만 일제의 징용정책으로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1944년 탈출하여 귀국한 후 고향의 과수원에 은둔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 가족은 서울로 이주하고 권진규는 이쾌대(1913∼1965?.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전신 제국미술학교 출신)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미술의 기초를 배우며 이쾌대로부터 무사시노의 교수이며 부르델의 제자인 조각가 시미즈 다카시清水多嘉示(1897∼1981)에 관해 듣게 되어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유학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8년 의대를 졸업한 형이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병을 위해 일본에 건너간 후 다음 해 형의 사망 후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다 1949년(28세)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53년(32세)로 대학을 졸업했다.
권진규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매년 이과전二科展(1916년 관전에서 독립한 재야 미술 단체인 이과회의 전시회)에서 매번 입선(1953년은 특선)하며 조각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지만 마땅한 직업이 없는 일본 생활은 빈곤했다. 학교 후배 도모智와 결혼하고 마네킹 제작, 영화사 촬영 세트 제작 등의 일을 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하여 1958년에는 일양회一陽會(1955년 이과회에서 분파)에도 두 점이 입선하여 회원이 된다. ≪무사시노 미술≫ 창립 30주년 기념 특집호에서는 「두상」(No.20)을 다루며 ‘조각과를 졸업한 곤도(권진규)는 그동안 이과전에서도 수상했지만, 올 해 일양회에서도 수상했고 회우로 추천되었다.’고 우수한 졸업생으로 소개되었다. 
1959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부인을 두고 홀로 귀국한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곳은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일본보다 훨씬 낙후된 이곳의 대중은 여전히 화가를 환쟁이로, 조각가를 석수장이쯤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미술계에서는 일본에서 불쑥 나타난 이방인 권진규를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또, 당시는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라 모든 문화는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과 유럽이 표본이 되었다. 또한 국내는 인맥과 학맥으로 그리고 사회적 교제의 능력으로 국전에 입선을 하고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는 후진적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국내에 인맥도 없고 사교성도 없는 그는 외로운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국전’에 대해 조각가 차근호는 이렇게 말했다.

“해마다 국전이 열릴 무렵에는 으레 말썽이 많아진다. 더욱이 오랫동안 관권이 침염한 국전이 사월혁명을 계기로 하여 어느 정도 쇄신을 기할 수 있을지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전의 기구는 전폭적으로 개편돼야 할 것이고 운영권도 미술인의 손으로 넘겨놔야 마땅할 것이다. 구미 선진국가에 비하여 우리나라와 같이 전람회의 배경에서 관료적인 냄새가 지독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인습과 전통에 입각한 ‘아카데미즘’전이 있다면 반드시 그와 대립되는 ‘앙데빵당’적인 성격이 존립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국전을 추계와 추계로 갈라서 연2회 개회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 보수적인 노장파의 고집과 대우도 원만할 터이고 나가서는 진정한 전위적인 세력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동아일보>(1960. 7. 23)

동아일보 1963. 4. 18

권진규는 국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조각 부분의 심사위원은 두세 사람이 매년 이름을 올리며 장기 집권(?)을 하였고 어느 입선자는 심사위원의 제자였다. 그런 그들만의 잔치에 권진규가 작품을 낼 이유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일보 주최의 ‘현대미술초대 및 공모전’에 조각 부문의 수석으로 입선된 것이 유일하다.(동아일보. 1963. 4. 18)

기념상을 주문받아 만들기 위해 아틀리에의 천장도 높게 개조하였지만 주문은 없었다. 도둑조차 그의 작품을 가져가지 않았다. 어느 교회는 그에게 주문하여 만들게 한 예수상의 후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져가지 않았다. 서울공대와 홍익대, 수도여사대(세종대) 등에 시간 강사로 나갔을 뿐 정규 교수직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귀국 후 6년이나 지난 1965년에 수秀화랑 주최로 신문회관에서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자 한국 최초의 조각 개인전이 열렸지만 평판은 싸늘하기만 했다. 시대의 트렌드가 추상 조각이라 구상 조각은 시대착오적이나 창작 능력의 부재로 매도되었다. 더구나 신라 이후에 끊긴 전통 조각을 되살리겠다며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작업에 몰두하는 권진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테라코타terra cotta는 이태리어로 ‘구운흙’이라는 의미로 외국에서 전해진 단어이지만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 토용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토우가 있었다. 당시 좀체 남들이 하지 않는 테라코타를 하는 이유에 대해 권진규는 조선일보(1971. 6. 2)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여 전의 것이 있지요. 작가로서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브론즈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 금속이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재질이라면 흙은 현대인의 고향을 상징하는 재질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흙에서 멀어질수록 심신의 건강을 잃는다. 따라서 현대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흙으로의 갈망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예술이 가진 효용의 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고 한다면, 권진규의 테라코타야말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게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건칠乾漆은 신라 때 중국 한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목공예품에 옻나무 즙을 발라 윤기를 내고 표면을 보호하는 기법이다. 권진규는 석고형 위에 칠액을 적신 삼베를 겹겹이 발라 말리는 작업을, 때로는 진흙으로 대충의 모양을
지원의 얼굴
만들고 삼베를 감아 칠을 바르고 말린 후 속의 진흙을 빼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 옻나무 특유의 색과 질감은 바로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기법이었다.
테라코타와 건칠의 작가 권진규는 너무 시대를 앞섰던 것일까? 가요보다는 팝송을, TV의 골든타임은 외화를, 국내소설보다는 번역서가 판치는 시대였으니 다른 문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양의 문화를 체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여 자기 것을 만들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권진규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존재가 커져만 간다. 

30년 전에도 바람은 일본에서
하지만 한국 미술계가 수용하지 못한 한국작가 권진규를 30년 전 그때도 일본이 껴안았다. 9촌 조카가 되는 서양화가 권옥연(1923∼ )의 알선으로 1968년 7월에 도쿄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강인한たくましい 리얼리즘’이라는 제목 하에 ‘흉상은…… 단순한 초상만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살을 최대한 깎아내고 요약할 수 있는 포름forme(형상)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극한까지 추구한 얼굴 안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창조되어 있다. 중세 이전의 종교상像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감정의 고양이 느껴진다.’고 하면서, ‘빈곤한 일본 조각계에 자극을 주는’ 것으로 높게 평가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은 작품 「애자」와 「춘엽니」를 영구 소장하였으며, 화랑은 체재비와 제작비를 부담하겠다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을 권하였다. 또 모교의 스승 시미즈 다카시와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의 배려로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의 교수직(비상근 강사)이 내정되었으나 이는 후에 아쉽게도 학내 분규로 인해 무기 연기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권진규는 일본에서의 전시회 성공에 힘입어 한때 왕성하게 제작에 힘을 기울였으나 여전히 한국 미술계와 일반의 냉담 때문에, 2010년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에 연이은 전시회를 국내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결국 니혼바시 화랑의 일본 체재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생각하던 중, 마침 다행히도 명동화랑(대표 김문수)이 나서서 생활비를 대주며 개인전을 열도록 권유하였다. 조선일보(1971. 6. 2)에 실린 기사는 그때의 사정을 알려준다. 기자는 ‘하마터면 저력 있는 조각가 한 사람을 일본에 뺏길 뻔했다.’며 전시회를 준비하는 권진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권진규는 ‘자기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고 싶지만 될 수 있으면 조국에 있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서 결혼한 도모의 처가는 권진규의 귀화를 권유했지만 끝내 귀화하지 않았던 사실이나 훗날 도모의 증언(「그이의 조각은 따뜻했어요」, ≪계간미술≫, 1986년 겨울호)을 보더라도 권진규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 
또 이어서, 한국의 조각계와 조각에 대한 평소의 신념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권진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습니다. 한국 조작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돼 있습니다. 우리의 조각은 신라 때 위대했고 고려 때 정지했고 조선조 때는 바로크(장식화)화했습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되어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이런 각오로 권진규는 최선을 다해 마침내 1971년 12월에 개인전을 열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미술계는 권진규를 포용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반응 및 판매가 저조해 권진규와 화랑은 실의에 빠졌다. 일본 전시회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던 그의 영혼과 육신은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고대 마두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 포절 끝에 고사枯死
전시회 실패 이후 고혈압과 수전증 등으로 작품 제작에 거의 손을 떼고 있을 즈음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에 화가의 수상(8) 「예술적 산보」라는 권진규의 글이 실렸다. 

절지折枝여도 포절抱節하리라. 포절 끝에 고사枯死하리라.”(가지가 꺾여도 절개를 지키리라. 절개를 지키며 말라 죽으리라.) 나뭇가지가 바람이 꺾이는 겨울날의 밤, 마디는 마냥 굵어지고 봄의 꽃순을 잉태한다. 나무들이 합창할 때 항용 가지들은 속곳을 내던진 여자같이 분수를 몰랐고 불타는 숯덩어리처럼 마냥 타오르다가 점점이 까맣게 삭는다.
허영과 종교로 분식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 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송곳으로 찔러보아도 피가 솟아나올 것 같지 않다.

전신이 니승尼僧이 아니라 해도 좋다.
전신이 수녀가 아니라 해도 좋다.
지금은 호적에 올라 있지 않아도, 
지금은 이부종사할지어도,

진흙을 씌우어서, 나의 노실爐室에 화장火葬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
어느 해 봄, 이국의 하늘 아래서 다시 만날 때까지를 기약하던 그 사람이 어느 해 가을에 바보소리와 함께 흐느껴 사라져 갔고 이제 오늘은 필부고자匹夫孤子로 진흙 속에 묻혀 있다. 옛적에는 기식을 할 왕도 있었거늘 이제는 그러한 왕들도 없다.
표박유전漂迫流轉이 미의 피안길이 아니기를, 운명이 비극의 서설이 아니기를 바라는 나머지 생존하는 자의 최소한의 주장이 용서되기를…….
어느 착란자의 영상影像에서 진실의 편린이 투영되었을 적에 적이 평상자는 자기 자체를 의심한다.
진실의 힘의 함수관계는 역사가 풀어야 한다. 그릇된 증언은 주식거래소에서 이루어지고 사랑과 미는 그 동반자에게 안겨주어야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까막까치가 꿈의 청조를 닮아 하늘로 날아 보내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업을 하는 고독한 예술가는 봄날에 파랑새처럼 하늘을 날아보고자 하였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2년 3월에 권진규는 이중섭전을 두 번이나 찾아가 보았다. 이중섭의 「황소」를 조각으로 만들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서양미술의 한국화, 토착화를 강조하며, 대표적 인물로 이쾌대, 이중섭, 박수근을 칭찬하였다.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동류 미술가들에게 동감을 표현하며 당시의 풍조에 대한 울분을 드러낸 것일까. 몇 번의 결혼 실패로 삶의 동반자도 없이, 몸 하나 뉘일 정도의 쪽방에서 자고 낮에는 음침한 작업실에서 팔리지 않는 작품을
권진규 아뜰리에. 설명: 2010년 6월 26일 후덥지근한 날에 찾아간 권진규의 아틀리에 안에는 작은 우물이 있을 정도로 습한 기운이 가득 찼다. 음울한 고독의 그림자가 작업실 안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2층에 당시의 아틀리에 사진이 걸려 있다.
만드는 예술가의 몸과 정신은 말라만 갔다. 

1973년 1월 고려대학교박물관은 개관을 앞두고 권진규의 작품을 사고자 하였다. 권진규는 「마두」, 「자각상」의 두 점을 팔고 다시 박물관의 요청에 따라 「비구니」를 기증했다. 5월 3일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식에 참석한 권진규는 다시 다음날 5월 4일 아침에 박물관에 가서 자신의 작품을 한참 바라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5시 아뜰리에의 이층 쇠사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결국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은 죽어가는 자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가지가 꺾여도折枝 절개를 잃지 않고抱節 그는 끝내 말라죽은枯死 것인가.
묘는 관리사무소에서 동락천 방향으로 8분 정도 거리에 있다. 모퉁이를 두 개 돌아 노고산 위령비 가기 100보 전에 작은 계곡이 나오면 오른쪽에 평해 황씨(201451) 묘가 보이고 그 왼쪽에 난 작은 길로 올라가 계곡이 끝나는
권진규 비석
지점에서 건너편으로 넘어가 201743번을 찾으면 된다. 인적이 드문 숲속 한 가운데에 가족 무덤 4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맨 왼쪽이 형 진원의 묘이고 다음이 모친 조춘, 부친 권정주의 순이며 맨 오른쪽이 권진규의 묘다. 관리사무소의 자료에는 권진규의 묘번이 201720번으로 되어 있으나 그 번호는 보이지 않는다. 맨 왼쪽 권진원의 번호판 201743번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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