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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2010년 겨울호)김구용 시인 특집/시론/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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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참여
―구용의 초기 시세계
진 순 애 |문학평론가
1. 자유와 절망
본 글에서 다룰 구용의 시들은 시집 <시詩>(조광출판사, 1976)에 수록된 시 중에서 1953년 이전에 발표되었거나 미발표된 작품을 중심으로 한다. 시집에는 작품 말미에 창작년도가 게재되어 있는데, 창작년도와 발표년도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일하게 볼 것이다. 이 시기는 시인으로서 구용의 출발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하면서 한국현대사를 좌우한 일제강점기의 끝자락과 한국전쟁이 있던 시기라서 구용의 개인사적 의의와 함께 한국시문학사적 의의 또한 내포한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구용 시는 주로 탈속의 순수를 지향하는 사색의 주체로, 한국전쟁시기의 시는 전쟁이 야기한 절망적 현실에서 분열한 자아 내지는 자아 부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구용의 초기 시세계는 ‘해방과 분단’이라는 한국현대사의 이율배반적인 면모처럼 이율배반적이다.
그런데 <한국현대문인대사전>을 비롯하여 <김구용전집>:(솔, 2000)에는 구용의 등단작을 「산중야山中夜」와 「백탑송白塔頌」을 위주로 하면서, 이 두 작품이 1949년 ≪신천지≫에 발표되었다고 하나 1949년의 몇 월에 발표되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산중야」(≪신천지≫, 1949. 10)만 1949년에 발표되었고, 「백탑송」은 1949년대의 ≪신천지≫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시집 <시詩>와 <시집詩集 I>(삼애사, 1969)에는 「백탑송」이 1949년 작이 아니라 1950년 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조혼弔魂」이 ≪신천지≫(1950. 1)에 발표되어 있는데, 「산중야」와 「조혼」은 김구용이라는 시인명이 아니라 김수경金水慶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구용이라는 시인명이 등장한 시점은 ≪신천지≫(1950. 3)에 「사우록思友錄」-“이형기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발견된다. 물론 시인의 본명은 김수경이 아니고 김영탁이다. 그러니까 김구용의 등단 시점이 1949년이라면 「산중야」 한 편이 ≪신천지≫에 발표된 셈이고, 1950년도를 포함하면 「조혼」까지 해당되는 셈이다.
특히 시집 <시詩>에는 「회고懷古」(1936년)를 시작으로 해서 「영상影像」(1971년)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시집 <시집詩集 I>에는 1943년 작이라고 게재된 작품에 「빛」, 「설야」, 「바람이 부는 밤」, 「고려자기부高麗磁器賦」, 「등불」이 있고, 1946년 작에는 「사색思索의 날개」가 있다. 「산중야」는 1949년 작이고, 「희망希望」은 1951년 작으로 되어 있다. 1951년 작에는 또 「이유理由」, 「그대」, 「밤」이 있고, 「조혼」은 1950년 작이며, 이 외의 1950년 작에는 「해」와 「백탑송」 두 편이 있다. 1952년 작은 「비상飛翔」, 「나는 유리창을 나라고 생각한다」, 「성염盛炎」, 「기도祈禱」, 「차이差異」, 「제비」, 「뇌염腦炎」, 「시각視覺의 결정結晶」이 있다. 1953년 작은 「탈출脫出」, 「이별」, 「반수신半獸身」, 「이월二月의 소식」, 「성숙成熟」, 「빛을 뿜는 심장心臟」, 「산재散在」, 「바다」, 「정경情景」, 「오늘」이고, 시집의 나머지는 1956년도 작품까지 포함하고 있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 순서가 연도별로 순차적이지는 않으며, 총 51편의 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따라서 구용의 등단작을 기점으로 하여 구용 시의 출발로 삼는 일은 단편적인 일이자 구용의 초기 시세계를 축소하는 일일 것이다. 본 글에서는 구용의 초기 시세계를 1943년 이전 작품을 포함해서 한국전쟁이 끝난 시점인 1953년도까지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순수의 참여’로써 진단한다. 구용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은 절대적인 진리와 순수의 정신인데,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서는 순수의 정신이 탈속의 세계로 구현되나, 한국전쟁 시기에는 참여의 태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순수를 꿈꾸는 사색의 주체가 전쟁시기에는 분열한 자아, 곧 탈주체화함으로써 구용 시는 순수의 분열로 참여한다. 절망적인 현실이 순수를 분열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식과 분열의 경계에서 순수를 꿈꾸는 사색의 자화상도 견지한다.
이와 같은 구용 시의 특징적인 언술방식은 독백과 역설에 있다. 시가 근원적으로 시인의 독백이라는 점에 따를 때 독백을 구용 시의 특징이라고 일컫는 것은 오히려 비특징적임을 지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구용 시의 특징이 독백인 것은 시선이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하고 있는 데 있다. 대부분이 청자를 향하여 ‘말하기의 시’이거나 이미지즘에 의한 ‘보여주기의 시’가 아닌 것이다. 특히 그의 독백체는 한문의 관념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언어의 결이 낯선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이는 ‘잘 읽히지 않는 시’라는 구용 시에 대한 중론의 이유에도 해당한다. 외부로 향한 시선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세계로 깊게 침투한 시선은 한문투와 관념적 언어의 결이 지닌 낯섦과 함께 소통차단의 효과를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해방 전후의 시에서 주도적이며, 장르로는 산문시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는 중에도 「회고」(1936년)를 비롯해서 1943년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대부분 행과 연 구별을 뚜렷이 짓고 있으며, 외부의 사물에 포착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어서 이때의 시어는 관념을 벗고 구체화한다. 해방 전후의 시는 이미지즘 시와 내면세계에 대한 독백의 시가 특징적이며 소통차단이 아니라 소통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탈속을 향한 보편적 세계에서 비롯된다.
2. 순수와 사색의 주체
노오란 밀초에다 불을 다려 켜논 뒤에
푸른 향 올리옵고 정화수를 바치오니
빛 안에 넘나노은 色, 香煙 솔솔 굽이쳐
살며시 치맛자락 외씨 같은 버선 덮어
엎디어 두 손 몰 때, 가슴 안에 서리는 빛
빛 안에 곱게 켜진 빛, 빛과 빛이 맺히니.
―「빛」 전문
한국문학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문학하기의 어려움을 빗대어 암흑기라고 하듯이, 구용도 이 시기에 고전을 비롯한 탈속으로 시의 방향을 설정한다. 위 시에서도 시는 3행의 정형률을 비롯하여 음보도 시조의 4음보를 닮아있다. 외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시세계도 탈속의 정신에 닿아있다. 뿐만 아니라 ‘노오란 밀초’와 ‘푸른 향’의 대비된 배색의 배열과 이를 3행에 와서 ‘빛 안에 넘나노은 색, 향연 솔솔 굽이쳐’라고 의태어에 비유한 점, 또한 ‘불을 다려 켜논’이라고 기체를 물체에 비유한 수사적 장치들이 순수를 향한 주체의 사색을 돋우고 있다.
“살며시 치맛자락 외씨 같은 버선 덮어/엎디어 두 손 몰 때, 가슴 안에 서리는 빛”의 순간에는 기도하는 여인과 촛불이 합일하고, 여인도 그 여인을 바라보는 주체도 모두 빛이 되어 절대적인 순수의 세계로 탈속한다. 이처럼 외부의 대상을 이미지즘화한 내밀성이 구용 시의 출발이었다면, 이는 해방 이후 산문시에 나타난 사색의 독백과 다르면서도 같다. 대상을 이미지즘화한 것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시적 대상이 외부에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사색의 독백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투명한 思索의 날개, 이다지 숨 가쁜 밤, 못池은 고요하다. 창을 열면 두 별星 이상의 별이 視覺에서 연결하는 착잡한 角度와 線들의 그 接脈點을 집어낼 수는 없으나, 분명한 현실로서 저마다 빛나는 자유의 통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곳에다 싸늘한 콤파스의 송곳을 박아, 한 圓 속에 쩔은 호흡과 바쁜 구두소리로 限界 없는 도가니 속 瞑想을 祭祀할까.
옛 甁에 친구가 꽂아 주고 가버린 꽃봉오리 끝에 불이 켜진 밤, 空然한 초조일까 아스스 粉을 흩날리며 날아온 나비와 더불어 의논하는 것은, 이르지 못한 季節을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思索의 날개」 전문
「빛」이 온전한 탈속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면, 위 시는 탈속의 대상을 통해 자유를 향한 주체의 사색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단지 세속적 존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자유가 아니라 해방공간의 혼란상과 무관하지 않은 자유이다. 그것은 특히 ‘저마다 빛나는 별의 자유의 통솔’을 ‘분명한 현실’이라고 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단지 밤하늘에서 밝고 자유롭게 빛나는 별의 자유를 노래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현실로서 저마다 빛나는 자유의 통솔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언술에 있다. ‘자유의 통솔’을 ‘통솔의 자유’로 보면, 해방은 되어서 자유는 있으나 통솔해야 할 국가의 체제가 잡히지 않은 현실에 대한 은유적 비판이다. 곧 좌우로 대립한 정치 현실에 대한 비유적 비판이다. 특히 ‘싸늘한 콤파스의 송곳’, ‘바쁜 구두소리로 한계 없는 도가니 속 명상의 제사’, ‘나비와 더불어 의논하는 것’ 등이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과 자괴감을 은유한다.
이때부터 구용 시는 한문투가 혼합되고 산문화되면서 추상적 언어와 사물이 결합하고, 일상적 세계와 이미지즘의 세계는 벗어난다. 이와 같은 시어는 구용 시를 낯설게 하며 소통을 차단하는 효과를 발현한다. 그러면서도 사물에 대한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을 반영하는데, “창을 열면 두 별星 이상의 별이 視覺에서 연결하는 착잡한 角度와 線들의 그 接脈點을 집어낼 수는 없으나” 등에서처럼 섬세한 묘사에 사색의 세계가 결합하여 다변적 산문시를 추상화시킨다. 시어의 추상화와 관념적 언어는 주체의 사색의 세계를 지시한다.
열매들 고운 살이 흐물어질 때 달빛 푸른 산 가슴에 스며, 골짜기마다 조개처럼 흩어진 희끄무레한 뼈다귀도 굶주린 짐승들의 검붉은 주둥이도 꿈이 殘照로운데, 소슬한 빗발 흐느끼면 썩은 씨 움트는 기약 어둡기도 하더니, 십오야 밝은 빛 올올이 받아 사모칠 듯 향기로운 샘 곁에, 외로운 국화야 다시 꽃 폈건만, 숲 사이 아롱지는 바람도 없고, 짙은 밤 온 산은 잠이 깊고녀.
―「山中夜」 전문
‘산중야’도 한문투라서 이와 같은 시어는 한문이 생활어인 시인의 일상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산중야’가 한문투라고 해서 「산중야」의 언술방식이 모두 그러하지는 않다. 우선 “달빛 푸른 산”이 그러하고, “숲 사이 아롱지는 바람도 없고, 짙은 밤 온 산은 잠이 깊고녀”가 그러하다. 물론 “굶주린 짐승들의 검붉은 주둥이도 꿈이 殘照로운데”의 ‘잔조로운 꿈’이라는 어휘는 생경하며, ‘십오야 밝은 빛’의 ‘십오야’가 ‘산중야’와 다르지 않은 한문투로 시의 낯섦에 기여한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사물의 언어와 어울린 ‘십오야, 잔조로운, 산중야’ 등의 한문투는 생경한 낯섦보다는 오히려 산속의 풍경과 결합하여 시어의 새로움에 기여한다.
시는 보름달빛 밝은 가을의 산중에서 만물은 잠이 깊건만 시인만 홀로 깨어 국화향기를 맡고 있는 순수를 노래한다. “소슬한 빗발 흐느끼면 썩은 씨 움트는 기약 어둡기도 하더니”, “십오야 밝은 빛 올올이 받아 사모칠 듯 향기로운 샘 곁에, 외로운 국화야 다시 꽃 폈다”는 것은 가을밤의 산중에서 주체가 사색하는 흐름에 따른 시간의 변모이다. ‘어둡기도 하던 기약이 어느 새 다가와 있다’고 무상한 시간을 사색하게 하는 가을밤이며 무상한 시간 끝에서 주체 또한 홀로임을 확인하게 하는 산 중의 가을밤이다. 산속이라는 탈속의 세계에서, 그것도 ‘짙은 밤 온 산은 잠이 깊은’ 순수의 세계에서 ‘소슬한 빗발’을 ‘흐느끼는 빗발’로, ‘십오야 밝은 빛’을 ‘사모칠 듯 향기로운 샘’으로 느끼는 것은 가을밤이 야기한 정취 때문인 것이다.
3. 참여와 분열한 자아
나는 죽었다. 또 하나의 나는 나를 弔喪하고 있었다. 눈물은 흘러, 호롱불이 일곱 빛 무지개를 세웠다. 그 다리 위로 珊瑚뿔 흰 사슴이 와서, 쓰러진 내 가슴에 날개를 펴며 구 구 구 울었다. 나는 저만한 距離에서, 또 하나의 이러한 나를 보고 있었다. ―「希望」 전문
위 시는 희망 없는 상황을 희망이라고 역설화하여, 출구 없는 전시에서 분열한 자아를 은유하고 있다. ‘나는 죽었고, 그 죽은 나를 또 하나의 내가 弔喪하고 있었다’나 ‘저만한 거리에서 또 하나의 나를 보고 있었다’ 등에서 드러나는데, 자아는 살아있는 나와 죽어있는 나, 과거의 분열한 나와 과거를 조망하며 회상하는 현재의 나로 다중적으로 분열한다. 현재의 자아는 죽음 같은 현실에서도 희망을 꿈꿨던 과거를 회상하는 자아이다. 희망은 현재의 자아가 꿈꾸는 미래의 희망으로도 과거의 자아가 꿈꿨던 현재에의 희망으로도 읽힌다. 그러면서도 죽음 같이 희망 없는 상황의 희망은 역설적 희망이며, 희망 없는 현실에서 순수는 순수로 남을 수 없으므로, 분열한 자아로써 참여한다.
무수한 主義에 의하여 한 實體가 여러 가지 色彩로 나타났다. 제각기 有利한 直感의 重疊과 交替된 焦點들로부터 일제히 해결은 火炎으로 화하였다. 이러한 세력들은, 圭角은 分裂로 구렁으로 모든 것을 싸느랗게 崩壞시켰다.
거리마다 鐵彈이 어지러히 날아, 음향에 휩쓸린 방 속 나의 넋은 파랗게 질려 압축되었다. 한 벌 襤褸의 世界地圖에 옴츠린 내 그림자마저 무서웠다.
生·死의 兩極에서 발가벗은 本能은 思考와 歷史性이 없었고, 祖上이 未知 앞에 꿇어 엎드렸던 바로 그 姿勢였다.
그러나 지식과 과학이 인간을 부정함에, 만질 수 없는 容貌, 보이지 않는 救護를 힘없는 입술로 불렀다.
역시 神은 한 가지도 아쉰 것이 없으니까,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限의 행복·尊嚴·美·全能으로 슬픈 바탕에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목숨의 太陽을 버리고 절대는 있을 수 없었다. 아니라면 오늘날의 난리는 神의 뜻으로 이루어진 傑作일 것이다.
피투성이의 현실을 外面하고 眞理의 길은 없었다.
―「脫出」 일부
50년대 모더니즘 시의 특징이 장시에 있듯 구용의 50년대 시도 「탈출」을 비롯하여 산문에 의한 장시가 많다. 또 다른 50년대 모더니즘 시의 특징이 신의 죽음이듯 전쟁은 시인들에게 신의 죽음을 체험하게 한 폭력의 현장이었으며 전쟁에 대한 분노는 신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표출되었다. 신을 향한 분노와 신의 존재성에 대한 회의를 원망과 탄식어린 태도로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하기였다. 그러나 「탈출」에서는 직접적 드러내기가 아니라, “신은 한 가지도 아쉰 것이 없으니까”, 혹은 “오늘날의 난리는 신의 뜻으로 이루어진 걸작일 것”이라는 등의 역설 속에 분열한 자아의 자학과 자조를 표출한다. 신은 폭력으로 존재하므로 주체 또한 분열한 자아일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 참여이다.
전쟁이 야기한 폭력과 절망적 상황에 대한 시어는 추상적 언어와 구체적 대상이 은유로 결합한 것이 특징적이다. 가령 ‘무수한 주의’에서 셀 수 없는 ‘주의’를 셀 수 있는 ‘무수한 주의’라고 하여 추상어를 구상어와 결합한다. 또한 “한 실체가 여러 가지 색채로 나타났다”에서도 ‘실체’의 구체화를 위해 ‘색채’로 대신하고 있다. 물론 “유리한 직감의 중첩과 교체된 초점들”이라는 한문투의 언술방식은 낯설게 하기와 소통단절에 기여한다. “해결은 화염으로 화하였다”의 역설어법도 낯설게 하기와 동시에 소통단절을 강화한다.
이렇듯 “파랗게 질려 압축된 나의 넋”과 “한 벌 남루의 세계지도에 옴츠린 내 그림자마저 무서웠다.”에서처럼 자학과 자조와 역설은 분열한 자아에 의한 현실 참여이다. 그것은 “생·사의 양극에서 발가벗은 본능은 사고와 역사성이 없었고, 조상이 미지 앞에 꿇어/엎드렸던 바로 그 자세였다.”로 은유된 전쟁 때문이다. “피투성이의 현실을 외면하고 진리의 길은 없었다.”는 시인이 시를 통해 찾고자 한 길이 ‘진리의 길’인데, 진리의 길이자 시의 길은 피투성이의 현실에서는 갈 수 없는, 곧 탈출조차 도모할 수 없는 길이라는 점에 대한 역설로써 탈출구 없는 피투성이의 현실을 은유하며 순수를 해체한다.
너는 사람 탈을 쓴 굶주린 짐승
옛 壁畵에 서성거리는 나의 그림자
이 밤 가냘픈 등불인 양 빗발에 떨며
오롯이 돌아가는 時針에 몰리노니
아아 病든 꽃술 무거이 벌어져
섬벅 아롱질 듯 氷柱같은 이빠디여
오오 비린내를 풍기는 모진 咆哮들
물결 위로 솟는 해를 더듬으며
수많은 屍體에서 일어서는
오늘도 나는 사람 탈을 쓴 굶주린 짐승
잎으로 알몸의 피를 씻으며
낡은 壁畵에 꿈을 담는 사나이
―「半獸身」 전문
‘반수신’, 곧 ‘사람 탈을 쓴 굶주린 짐승’은 해체된 주체이자 분열한 자아를 은유한다. 또한 자아는 ‘옛 벽화에 서성거리는 그림자’로도 분열한다. 자학의식은 주체로서의 ‘사색의 날개’를 펼 수 없고 탈출구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며 이때 자아는 분열하고 의식은 역설적으로 해체된다. ‘수많은 시체’와 함께하는 전쟁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자로서의 자괴감을 ‘반수신’으로 은유하며 분열한 자아로 참여하는 것이다.
「희망」과 「탈출」이라는 제목이 희망과 탈출을 꿈꾸는 역설의 언어라면, 「반수신」은 자학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하면서 분열한 자아를 은유한다. 분열한 자아에 대한 은유는 마지막 연인 “오늘도 나는 사람 탈을 쓴 굶주린 짐승/잎으로 알몸의 피를 씻으며/낡은 壁畵에 꿈을 담는 사나이”에서 극명하다. 특히 ‘사람 탈을 쓴 굶주린 짐승’으로 표출한 자학의식이 ‘잎과 알몸의 피’, ‘낡은 벽화와 꿈을 담는 사나이’에 이르러 「희망」과 「탈출」에는 부재한 희망과 탈출의식으로 바뀌면서 또 다른 역설을 동반한다. 역설은 절망에 대한 대응이자 자아의 분열이며 분열적 참여이다.
4. 의식과 분열의 경계에서
다음의 시도 1952년 작이지만 전쟁이 야기한 피투성이 현실에서 닫아버렸던 사색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어서 시적 환기력이 돋보인다. 의식과 분열의 경계에 있는 자아는 유리창을 통해 자유와 순수와 탈속의 절대세계를 꿈꾸면서 유리창과 일체가 된다.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季節마다 가지가지로 변하는 壁畵는 없을 것이다. 전등을 죽여도 창에 해와 달과 별이 끓어올라 심심하지 않다. 날씨를 살피며 기다리던 사람이 오후의 길을 오는 것이 보이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뇨. 암만하여도 나는 그 순수한 투명이 좋은가 보다. 아지랑이를 따라 꽃에서 꽃으로 날으는 나비의 기쁨도, 책상 너머 바깥에서 오래동안 더위를 씻어주던 綠陰이 낙엽지는 고요도, 잘 익은 果實나무 아래서 생각하던 사람이 부르는 목소리도, 다 그대로 전하여 주는 나는 이 유리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두움을 차별하지 않기에 한 쌍의 제비가 단꿈 꾸는 그믐밤도 미워하지 않는다. 이 유리창과 나를 分離할 수는 없다. 눈보라 칠 때 유리는 추위가 방안을 침범 못하도록 막아주건만, 방안의 나는 젊은 소경이 피리를 삐이삐이 불며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듣는 나를 슬퍼한다. 그러나 이 유리창이 맑음을 잃고, 추위에 복잡한 꽃무늬로 凍結하는 것이, 내 아름다운 슬픔의 形象임을 보기도 한다.
―「나는 유리창을 나라고 생각한다」 전문
위 시에서 주요한 모티프는 ‘유리창’이다. ‘유리창은 나’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유리창은 ‘계절마다 가지가지 벽화’로 변하기 때문에 그러하고, ‘해와 달과 별’이 끓어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유리창이 있어서 ‘나’는 ‘기쁨도 고요도 미움도 슬픔도’ 느낄 수 있으므로, ‘나는 유리창’인 것이다. 더욱이 유리창은 낯설게 하기도 차단도 아니라 소통이고 전달이며 ‘순수한 투명’이기 때문에 구용 시세계를 새롭게 환기하는 모티프이다.
차단이 아니라 소통인 유리창은 그러나 소통이면서도 차단이다. ‘추위가 방안을 침범 못하도록 막아주는’ 유리창은 차단인 것이다. 그러나 그 차단은 부분적인 차단이라서 소통을 동반한 차단이다. 그러므로 유리창은 자학과 자조와 역설에 의한 자아 분열과 자아 부정을 소통의 주체로 환기시키며 분열을 저지한다. 때문에 희망도 유리창에 있고, 탈출도 유리창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유리창’이며 유리창과 일체가 되어야만 하고 일체가 된다. 이때에 자아는 사색의 주체로 회복하고 근원의 순수도 회복된다. 의식과 분열의 경계에서 자아는 사색의 주체로 기우는 것이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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