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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김구용 시인 특집/특집 시론/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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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938회 작성일 11-04-0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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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초현실주의의 운명
―김구용의 시와 그 위상
이 수 명|시인



소나타라는 양식 자체가 이 곡에서 끝났으며, 자신의 운명을 다 채웠고 목적지에 다다랐으며, 그 너머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므로 폐지되고 해체되었으며 작별을 고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1. 1950년대의 시문학 연구의 동향과 김구용
우리 문학사에서 1950년대의 모더니즘이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30년대의 모더니즘에 대한 계승적, 대칭적 지점의 마련이라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전후의 폐허와 실존적 위기 속에서 다양하게 분기해 나간 시의 경향들 가운데 모더니즘의 잔해를 찾아 뒤적이는 일이 뒤늦게 문학사의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50년대 모더니즘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한 측면이 있다.
첫째, 30년대의 모더니즘을 계승한 주자로 대개가 후반기 동인을 지목한다는 점이다. 물론 후반기 동인이 50년대에 그은 시사적 획은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며, 앞으로도 동인들 각각의 연구가 더 개별적이고 미시적으로 진전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50년대 모더니즘 연구는 후반기 동인에 대한 연구로 다소 단순하게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50년대의 모더니즘은 곧 후반기라는 등식이 편리하게 활용되어 온 실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소 난처한 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후반기 동인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활동을 묶어 주는 이론이나 이념을 강령 내지 선언문으로 남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들이 한 권의 사화집도 내지 않았으며, 환도 이후에 해산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다. 해산 시기는 대체로 53년 12월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한 문학 그룹의 운명이 한 권의 사화집이나 동인지도 없이 끝을 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이념이 명확한 표현을 얻지 못했거나 설령 그런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응집력이 없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후반기 동인이 51년에 조직되어 53년에 해산되었다면 이들이 활동한 기간은 단지 2년에 지나지 않으며, 또 가시적인 성과물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에 대한 평가는 과장되거나 치우친 것일 수 있다. 물론 후반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시론 동인들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사화집을 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49년의 일이며 양 동인 간의 구성원들도 상당히 다르다. 무엇보다 후반기 동인은 전후의 모더니즘을 의식해서 후반기라는 자각적 명칭을 사용했기에, 전전의 신시론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어야 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50년대의 모더니즘을 논하면서 전전의 사화집에 의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한 권의 사화집도 내지 않은 후반기 시인들을 집단으로 묶어 50년대의 모더니즘의 향방을 살피는 것은 다분히 편리한 발상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연구의 결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50년대의 모더니즘의 협애성과 한계이다. 많은 논자들이 50년대의 모더니즘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이에 따라 30년대와 구별되는 50년대의 모더니즘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와 성취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거나 유보적이다. 이는 50년대 모더니즘과 후반기 동인의 등식의 결과로 후반기 동인의 시적 한계가 곧바로 50년대의 모더니즘의 한계로 포고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반기 동인을 50년대의 모더니즘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는 한, 앞으로도 50년대 모더니즘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로 위와 같은 맥락에서 빚어진 일이지만 후반기 동인 외의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부진하거나 편향된 점이다. 만약 후반기 동인의 시적 성과가 많은 논자들이 생각하듯이 미흡한 것이라면, 후반기 외의 시인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누락되거나 소홀히 지나친 중요한 시인들에 대한 발굴이 시급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후반기 동인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50년대의 여러 모더니스트들은 으레 부차적이거나 별도의 자리에 위치해 왔다. 후반기 동인 외의 모더니스트들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우, 김춘수와 김수영의 자리가 각별한 점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김춘수와 김수영은 50년대뿐 아니라 그 이후의 활동이 더 주목받고 있는 점을 헤아려 볼 때 예외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후반기를 제외하고 정작 50년대적인, 50년대의 모더니스트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에 등장하는 송욱, 전영경, 전봉건, 김종삼, 김종문, 신동집, 민재식 등의 이름들이 거론되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시세계를 살펴보는 소극적 논의는 다소 이루어지고 있어도(송욱, 전봉건, 김종삼의 경우) 시사적 위치에서의 본격적인 맥을 짚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김구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김구용은 50년대의 시문학사 연구서들에서 이름만 겨우 올라 있거나 그 이름마저 누락된 경우가 허다하다. 김구용의 가장 의미 있고 문제적인 시들이 쏟아져 나왔던 50년대에 그의 시세계가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그의 시세계를 살핀 글들은 형식이나 주제 면의 접근, 기법 면에서의 고찰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고 그것도 대부분 단평이나 촌평에 가깝다. 김구용 시의 크기와 넓이가 50년대의 문학사와 크게, 작게 길항하는 모습을 본격적으로 추적한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쉬운 대로 문학사에서 김구용의 위치를 고려해 본 글로는 이승훈과 김윤식의 글이 있다. 이승훈은 김구용이 후반기 동인 중에서 조향과 비슷한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의 시는 전통적 수사법의 해체를 통한 현대인의 병들어 가는 의식을 노래하고 있는데, 예컨대 「뇌염」은 형식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한 현대인의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훈의 글은 김구용의 시를 조향의 초현실주의와 연결시킴으로써 그 맥락을 특징 지은 것으로 주목된다.
김윤식의 글은 김구용의 독자성을 김동리, 전봉건, 이상, 정지용과의 관련 속에서 생각해보려 한 것이다. 김구용이 김동리나 전봉건과 갖는 개인적, 문학적 친연성을 짚어 보고, 이상과 정지용의 개입을, 무엇보다도 이상과의 시적 대응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 씨(김구용) 특유의 편향성이랄까 민감성이 작품에 적용된 사례로 「오감도」 이래의 난해시의 대표격인 「뇌염」계를 들 수 있다. 이때 주목될 것은 이러한 편향성이 문학사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두 가지 근거에 닿아 있어 보이는데, 이상의 「오감도」(1934)가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계, 곧 T.S. 엘리엇의 「황무지」계 및 초현실주의계이다. 씨의 「생명의 능각」(1952), 「시각의 결정」(1952) 등은 이상의 「선에 대한 각서」「삼차각 설계도」에 엄밀히 대응된다. 그 연장선상에 「뇌염」(1952)이 놓여 있지만 「뇌염」은 한 발자국 깊이에로 나아갔다. 난해시로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거기 있었다. 문제는 이 한 발자국의 깊이에 있었다. 단연 초현실주의적이며 프로이드적인 혼란과 전위의 착종이 거기 있었다. 이것이 ‘깊이’의 다른 명칭이다. 

김윤식의 지적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이상과의 대응성으로, 이상 시의 편향성, 초현실주의를 김구용 시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 시에서의 한 발자국 깊이로 김구용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김구용의 오랜 시력에서 그가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이상적 편향을 갖는 초현실주의적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작업은 이상에서 더 나아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지적은 이상과 김구용의 거리와 관련을 매우 날카롭게 짚어 낸 문학사의 맥이라는 점에서 주의를 끌긴 하지만 분석과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진단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초현실주의에서 더 나아간 ‘깊이의 다른 명칭’이란 무엇일까. 김구용의 초현실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50년대를 경과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50년대의 모더니즘에 충격을 준 것이었는지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김구용의 초현실주의
김구용의 작업은 1949년 10월에 산문시 「산중야」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해서 2000년에 전집이 출간되기까지 50년에 달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기나긴 시력은 주제나 기법 면에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동반하는 역동적인 것이었는데, 50년대에 씌어진 자유시와 산문시, 그리고 60년대에 들어서부터 계속해서 작업한 연작 장시의 세계로 크게 양분된다. 산문시에서 연작 장시로의 전환은 김구용 시의 큰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산문시에서 보여주는 형태 파괴적, 해체적, 초현실주의의 경향과 연작 장시의 형태 복원적, 질서의 세계의 대립이기 때문이며, 또한 내용면에서도 전자의 실험적, 초현실적 세계와 후자의 찬미적, 서정적 세계의 대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연작 장시인 '송백팔'에 남아 있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은 50년대 산문시에서의 과격한 파괴적 경향의 잔재이며 이는 이후 급격하게 수그러든다. 따라서 산문시와 연작 장시의 이원화가 그의 전체 시세계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로 생각을 압축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구용은 60년대 들어 연작 장시를 시도했기 때문에 그의 50년대적 의미는 전적으로 초현실주의적 산문시가 갖는 의미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거의 전무후무한 과격한 실험성을 보여주는 그의 산문시는 50년대의 모더니즘을 어떻게 운명 짓는가가 논의의 중심에 들어오는 것이다. 또한 이후 연작 장시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를 그의 산문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갖는 의미를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논의들을 위해서 먼저 김구용의 50년대 실험적, 초현실주의적 산문시를 살펴보려 한다.
하지만 김구용 본인은 정작 초현실주의에 대해 좋게 말한 적이 없음을 우선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구용이 자신의 창작 방법에 대해 언급한 「눈은 자아의 창이다-시를 위한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구절이 있다. “잠재의식과 몽환으로 인상적 효과를 노린 초현실주의자들의 현란한 손재주가 얼마나 위대한 낭비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초현실주의의 시도를 현란한 손재주로 치부함으로써 그 실현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의식의 저변에서 아직 정형화되지 않고 있는 현상들을 도출해 내기 위하여 의식을 제압한다는 초현실주의의 목표는 완전한 타당성 위에 세워질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이러한 불가능한 목표 때문에 그들의 시도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초현실주의의 역사는 어떻게 생각하면 이 불가능과의 대결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김구용의 완강해 보이는 비판은 한편으로 피상적 수준의 초현실주의를 겨냥한 가벼운 차원의 것으로 보이며, 그는 실제로는 같은 글에서 초현실주의적 발상과 태도로 생각되는 보다 중요한 언급들을 하고 있다. 

① 부동浮動하는 자기 위치의 설정, 즉 극난極難한 시 정신의 탐구에서 방법론은 자연발생적으로 동시에 요청된다.

② 현대시는 예측을 할 수가 없다. 모든 사태는 있을 수 있는 사실로서 지침은 회전하며 출몰하고 있을 뿐 일정한 방향을 보여주지 않는다.

③ 예술은 완전한 자유정신 위에 성립할 수 있을 뿐이다.

①의 ‘부동浮動하는 위치’나, ‘극난極難한 시 정신’이란 시를 형성하는 안정된 구조나 기왕의 표현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고 시의 정형의 원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스스로 ‘극난한’ 세계 속으로 들어서는 것이며, 김구용의 시와 시어를 난해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다. 그의 독특한 표현인 ‘부동浮動’이나 ‘극난極難’이 초래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태의 언어이다. ②에서 부연되는 그러한 언어의 “지침은 회전하며 출몰하고 있을 뿐 일정한 방향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침이 기능하지 않는 시의 위태로움을 일찍이 브르통은 다음과 같이 초현실주의 시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

결국 쉬르레알리슴이란 보다 일반적이며 심각한 이를테면, 일종의 의식의 위기를 유발함을 무엇보다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또한 역사적으로 봐서 그러한 결과가 얻어졌는지 아닌지 그것에 의해서만 쉬르레알리슴 성공의 여부를 결정하고자 하는 것을 끝내는 인정하게 될 것이다.(강조는 역자) 

초현실주의가 위기를 유발하는 언어라면 김구용의 ‘극난한’ 시세계는 비로소 적절한 표현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침을 잃고 부동하는 김구용의 시어는 언어의 위기에서 의식의 위기를 초래하는 50년대의 고립된 모험 지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구용이 ③의 ‘완전한 자유 정신’을 생각할 때, 그것은 완전한 자유정신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완전한 자유정신에의 호소로 읽힌다. 마찬가지로 브르통의 ‘심리적 자동성’도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를 배제한 완전한 자유의 쟁취라기보다는 이성에 의해 질서화 하지 않으려는 지난한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심리적 자동성을 가리키는 듯한 김구용 식의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④ 나의 발상은 끊임없이 완전히 나의 것으로서, 그러나 무수히 기복하며 불규칙하며 난잡하며 혼란하며 명멸한다.

김구용이 말하는 기복, 불규칙, 난잡, 혼란, 명멸은 규정될 수 없는, 판단 이전의 이미지나 상태에 대한 진술이다. 이것은 “해부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이라는 초현실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테제를 공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무관계한 이미지들의 공존이다. 즉 의문이나 갈등을 끌어 들이지 않고, 명백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혼돈을 유지할 수 있는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브르통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결국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높은 곳과 낮은 곳, 이러한 것들이 서로 모순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되는 이를테면, 정신의 어떠한 점point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확정하고자 하는 욕망 이외의 동기를 쉬르레알리슴의 활동에서 찾으려 해도, 그것은 헛된 일이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이 이렇게 상반된 것들이나 무관계한 것들이 이성적인 구획에 의해 공멸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지점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김구용의 무수한 기복과 불규칙과 혼란의 언어는 이 지점에서 생존하는 언어일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혼돈의 지점이야말로 김구용의 언어들이 모순되지 않을 수 있는 생래적 터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김구용이 산문에서 밝힌 창작론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내밀하게는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태도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0년대에 쓰인 그의 많은 시작품들은 이의 실제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김구용의 작품 중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40페이지에 달하는 중편 산문시들인 「꿈의 이상」과 「소인」은 초현실주의의 주요 테마인 환각과 무의식, 꿈을 핵심적 장치로 삼고 있는 작품들이다. 
「꿈의 이상」은 대학 시간강사인 그가 현실적으로는 여의사, 여교사, 여대생과 교제를 하지만 무의식 속에는 언젠가 굶주림에 시달릴 때 오렌지를 집어 주었던 흰 옷 입은 여인이 자리하고 있는 이중 구조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 그가 흰 옷 입은 여인의 출몰을 접하는 계기는 작품에서 총 6회인데, 모두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① 꿈. 폭격으로 부서져 버린 건물들 사이로 오렌지 여인이 나타난다. 그가 누구냐 물었더니, “그동안 잊으시다니! 굶은 당신에게 오렌지를 드린 건 나예요” 하고 여인은 뒷걸음치며 어느 성으로 들어가 버린다. 
② 꿈. 군용 트럭의 헤드라이트 속에 연횟빛 양복의 청년과 오렌지 여인이 걸어오고 있다. 청년은 어깨에 무언가를 둘러메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이다. 청년에게 둘러메어진 그의 손은 오렌지 하나를 쥐고 있다. 이 장면을 그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 
③ 백일몽. 그가 번역하던 소설 속 인물들 중 늙은 박사는 모든 사생활이 노출되는 미래의 기계를 만든 발명가이다. 연횟빛 양복의 청년은 박사의 딸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둔갑한다. 딸은 오렌지 여인의 환영이다.
④ 백일몽. 같은 소설, “연횟빛 양복의 팔이 뱀처럼 박사의 하얀 딸을 휘감고 능금을 먹는 장면”
⑤ 꿈. 여인이 오렌지를 들고 나타난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띠더니 관음으로 변한다. “난 늘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지만 그녀는 “난 원래부터 이유가 없어요”라며 생소한 말을 한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나타난 연횟빛 양복의 청년과 함께 손을 잡고 나가는데 그녀는 관음이 아니라 흰 옷차림의 여인이다.
⑥ 연상. 그가 여의사와 과자점에서 케이크를 들고 있다. 여의사의 어깨 너머로 유리벽 밖에 한 거지 아이가 힘없이 돌아서 있다. “난 본래부터 이유가 없어요” 하며 흰 옷차림의 여자는 어디론지 사라진다. 

그에게 나타나는 여인의 환상은 꿈이 3회, 백일몽이 2회, 연상이 1회로서 꿈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현실을 떠받들고 있는 비정형화된 무의식은 꿈이나 백일몽의 형태로 그의 심리적 상태를 구술해 준다. 나아가 복잡한 심리가 형성되는 어떤 자명한 지점을 노출해 준다. 오렌지와 여인의 그의 무의식에로의 침투는 인용한 장면에 나타난 바와 같이 기이하게 착종된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②, ③, ⑥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예에서 쓰이고 있는 것은, 데페즈망이나 콜라주, 편집광적 비판 분석법 같은 초현실주의 기법들이다. 초현실적 분위기 속에서 시, 공간과 인과의 탈골이 서슴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무의식의 풍경들이다. 「소인」에서는 이러한 기법들이 총동원되어 마치 「꿈의 이상」의 여러 장면들이 하나의 화면으로 압축된 파일 같은 형태로서 나타난다.

취조실을 나온 뒤로 명백한 침묵이었다. 강간범이 개처럼 웅크리고 잠든 감방에서 한밤중의 꿈은 무차별로 나타났다. 동양무역 주식회사란 문자가 차례차례로 집합한 그들 위에 걸려 있었다. 녹빛 외투 여자는 부활하였다. 그녀는 웃음의 가면을 쓴 범인과 손을 서로 맞잡고 춤을 추었다. 나는 “그들은 둘이 아니라”고 속삭이었다. 운전수는 반수신半獸神처럼 고장 난 전차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바다가 한편으로 보이는 그늘에 여자의 고무신들이 하숙집 소년에 의해서 어떤 것은 꽃잎으로, 신라 곡옥曲玉으로, 나비로, 반달로, 거미로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수목 뒤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흩어진 것들은 ‘착각’이 아니었다. 한 여인의 나체가 문득 불 속에서 실내로 들어왔다.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나의 인형’은 한 번도 말한 일이 없는 소리를 비로소 하였다. “내가 바로 너다”하고 대답하자 눈물이 웬일인지 흘러내렸다. 녹빛 외투 여자와 운전수와 ‘나의 인형’과 살인범이 종렬로 직립하여, 보기에는 한 몸 같으나 각각 얼굴을 좌우로 내놓고 ‘동同’, ‘이異’를 일시에 구성하였다. 취조관의 지휘를 받고 경관과 의사와 중절모와 간호부와 택시 운전수와 다방 레지들이 겹겹으로 둘러앉아 나에 대한 ‘찬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오’, ‘스톱’의 삼색 신호등이 비치자 그들은 나를 축복하는 천사로 화하였다.
―「소인」 부분

인용한 부분은 「소인消印」에서 살인을 하지 않았음에도 살인자로 몰리게 된 ‘나’가 감방에서 꾸는 꿈의 내용이다. 동창의 환송회에 갔다가 엉망으로 취해 마지막 전차를 타게 되고, 우연히 전차표를 대신 내주게 되는 녹빛 외투 여자가 살해되어, 매춘부인 ‘나의 인형’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온 ‘나’가 이튿날 살인의 누명을 쓰고 갇히기까지의 모든 정황과 등장인물들이 일종의 오브제들로 한꺼번에 무차별적으로 등장하는 꿈의 장면이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사건 그 자체를 추론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화되어 있는데, 인물과 장면과 이미지가 현실의 구획을 무화시키고 무의식 속에서부터 자동적으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의미를 찾지 못하는 기표들의 흘러넘침으로 확장되고, 압축, 치환, 대치와 같은 무의식의 여러 작용들에 의해 “‘동同’, ‘이異’를 일시에 구성”하면서 자동 기술적으로 흘러나온다. 작품 속에서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모든 이미지들은 환각적 오브제들로 절차나 형식 없이 등가를 이룬다. 이것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이미지 처리 방식이다. 

발레리는 1919년 그의 첫 번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 서설'에 붙인 주에서, 정신의 특성은 “어떤quelconque” 물체들과 형태들을 서로 접근시키는 데 있는 것이고 보면 모든 것은 서로 대치될 수 있다(“모든 것은 등가다”)고 잘라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볼 때 무의식은 그러한 대치 능력을 자연발생적으로 행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무의식은 추상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의식은 오브제들을 서로서로에 관여하게 만들어서 그것들을 신비스럽게 동화시킨다. 바로 이렇게 하여 꿈에 있어서 모순 원칙의 틀은 부서져 버린다. 모든 것은 그것의 구체적인 힘을 조금도 잃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면서도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대치될 가능성을 갖는다. 오브제들 상호간의 상이는 순전히 겉모습일 뿐이고 따지고 보면 이성과 습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합리적 가능성에 대한 고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손상시키지 않고 자연 발생적으로 대치시킬 수 있는 무의식의 작용에 초현실주의자들이 몰두한 것을 상기하면, 김구용의 장면들을 이에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구용은 매순간들이, 그리고 주체로 보이는 상황의 담지자들이 조건 없이 순수한 기호들로서 대치되는 찰나를 포착하려 하였고, 「소인」은 이 찰나들의 무한한 카니발이다. 피살자도, 살인자도, 누명을 쓴 자도, 매춘부 애인도, 매개가 된 운전사나 형사도 모두 상호 대치되어 순간순간 모순 없이 “‘동同’, ‘이異’를 일시에 구성”하는 오브제들일 뿐이다. 이들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실 원칙의 함몰에서 비롯되는 반증적 심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구용의 텍스트 하나하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돈을 끝까지 탐사하려 하며, 오히려 혼돈을 유발하는 창조물이다. 대립과의 대면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어쩌면 일찌감치 괄호에 넣었을 법한 모순을 찾아내고 발생시킴으로써 “모순 원칙의 틀은 부서져 버리”게 된다. 살해된 여인과 범인이 손을 잡고 춤을 추며 하나가 되어 그 앞에 나타나는 이 본질의 탈피 속에는 김구용이 결코 합리주의로 타개해 나가지 않는, 현실 너머에서 벌어지는 어떤 불균형이 있다. 합리주의 쪽에서 보면 불편하게 보이기만 하는 이 기이한 불균형을 그는 편안해하고 열어 둔다. 그럼으로써, 다시 이 불균형을 창조해 나간다. 

현실의 그림자는 내 외로운 시각 안에서 결정한다. 눈은 헛된 꿈의 각도를 통하여 내다본다. 바람에 흩어지는 매연이 내 칠색七色의 애정을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저기에는 비애도 없이 독사가 똬리를 튼다. 아니, 방심한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얼마나 매혹적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꽃처럼 만발하느뇨. 몸은 비를 노박 맞는다. 더러운 절벽切壁에 침투한 내 골육의 그림자는 관념의 환광幻光으로 나타났을까. 나의 안계眼界는 짜디짠 눈물에서 암흑으로 용해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태양과 수면睡眠도 없다.
―「시각視覺의 결정結晶」 전문

독사가 똬리를 트는 것과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흘러내리는 피와 더불어 비를 맞고 있는 몸에 동화되는 이 장면은 각각의 요소가 구체적 존재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대치와 탈바꿈의 현장이다. 이 공존은 신비하고 해독되지 않는다. 김구용은 모순 없는 이 불균형의 세계를 ‘헛된 꿈의 각도’라 명한다.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자명하다. 의문에 빠지지 않는다. 의문이라는 것은 논리적 세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가 현실을 넘어선 어떤 꿈의 각도를 소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미지의 세계의 이러한 자명성에 스스로 참여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3. 김구용의 시사적 위상, 초현실주의의 극한과 파괴
김구용의 초현실주의는 이전 세대인 이상의 초현실주의와 비교해 볼 때 그 특색이 더 잘 드러난다. 물론 김구용의 자의식의 과잉이나 분열적 주체의 징후는 이상 시의 맥을 잇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상의 시는 다분히 유희적, 폐쇄적, 순환적이어서 입구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와의 접촉면을 생략하고 자아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환각, 무의식의 장면이 「오감도」나 「꽃나무」, 「절벽」인 것이다. 이 자아만의 세계는 순수한 ‘심리적 자동성’으로 보이는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조 속에서 최후의 비약은 최초의 발성을 옹호하고 그 거리를 예감하며 자유롭게 한다. 
김구용은 이상 시의 이러한 완결성의 예후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내향화된 이상 시의 각도가 김구용에게서 압력을 못 이겨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때 우선 나타난 것은 세계와의 충격적 접촉이다. 이 충격의 강도는 압도적인 난해성과 가공할 폭발력으로 나타난다. 곳곳에서 교섭이 끊어진 문장의 호응, 돌발적인 추상의 덩어리들, 탈문법, 통사 구조의 뒤틀림, 장르의 충돌과 해체라는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양상들이 돌출하는 것이다. 이 파괴적 국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인」과 「꿈의 이상」은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는 이상의 몽환적 초현실주의에서 더 나아간 것이다. 이제 세계는 주체의 무의식에 의해 생략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무의식 속으로 소멸시켜 버리는 강력한 것이다. 이상의 시가 주체의, 무의식의 완성/미완성이라면, 김구용의 시는 무의식의, 주체의 해소라 할 수 있다. 김구용의 「소인」과 「꿈의 이상」이 문제적인 것은 주체의 무의식을 구술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무의식이 세계의 것이며, 주체는 이의 깨달음을 통해 주체의 부재의 상황에 이르기 때문이다. 주체는 단지 세계의 놀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인」의 ‘나’가 살인자의 기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며, 「꿈의 이상」의 ‘그’가 오렌지 여인의 환상을 버리고 현실의 세 여자 중의 누군가와의 쾌락을 수용하게 되는 계기이다. 
결국 김구용은 「소인」과 「꿈의 이상」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최대한으로 사용하여 초현실주의를 붕괴시키게 되는 역설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몽환적 주체가 소멸되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초현실주의의 강력한 내파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구술하는 주체가 소멸되는 것은 더 이상 무의식의 놀이를 계속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이상의 초현실주의를 극한으로 밀고 갔을 때 초래된 초현실주의의 운명이다. 그야말로 김윤식의 지적처럼 “오감도에서의 필사적 도주”라 할 수 있다. 이 도주는 이상에게서의 ‘한 발자국의 깊이’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초현실주의의 몽환 너머의 낭떠러지라 할 수 있다. 이 심연의 세계에 김구용의 시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초현실주의의 극한과 파괴라는 김구용 시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김구용의 초현실주의는 어떠한 시대적 문맥을 가지는가가 고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부정의 정신(표현주의, 초현실주의)은 세계 제 1차 대전의 경험과 그 전후적 분위기의 형성과 더불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형식의 방법적 정립을 보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마침내 1920년대 이후 서구 예술의 주도적인 흐름으로까지 자리잡게 된다. 물론 그러나 그것은 서구 20세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체적이고도 지속적인 양상으로 주도의 위치를 차지했다고까지 볼 수는 없는 그런 점에서 일시적인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양차 세계대전 사이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기간에는 이러한 급진적 성격의 예술운동이 잠시 퇴조했다가, 파시즘의 확대, 강화에 다른 사회불안의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면서 이 운동 역시 다시 재흥하는 면모를 보여주며, 이렇게 하여 결국 파시즘과 전쟁, 그리고 전후의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적인 확산을 보았던 이 운동은 1950년대 이후 다시금 사회 상황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다시 한 번 하향의 국면을 노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차 대전과 같은 전쟁의 시기나 파시즘의 확대, 사회불안의 분위기 속에서 초현실주의는 성황하고, 이후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쇠퇴하게 된다는 초현실주의의 발현과 성장, 쇠퇴의 역사는 이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에서 20∼30년대에 가장 성장했던 초현실주의가 우리의 경우 30년대의 이상에게서 꽃을 피운 것이라면, 2차 대전이 끝나고 50년대에 하향 국면에 접어들었던 세계 초현실주의의 국지적 편린이 김구용에게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쇠퇴하게 되는 초현실주의는 50년대의 서구에서는 이미 의미를 잃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50년대의 초현실주의는 당대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50년에 전쟁을 겪게 된 우리의 경우 전후의 급격한 사회불안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고 이의 필연적 상황으로 한국적 초현실주의가 김구용에게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초현실주의는 30년대의 이상에게서 이미 완성된 형태를 지니고 발화되었으므로, 김구용이 초현실주의에 추가할 것은 뚜렷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를 완성했던 이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이상에게서 더 나아가야 했던 김구용이 할 일은 이를 극한까지 몰고 가는 일이었다. 그는 그 극한에서 주체의 경계를 해지하고 자아를 소멸시키며 이 과정에서 시와 산문의 토대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그의 산문시는 이 격렬한 폭발의 현장이다. 결국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뒤늦게 점화되었던 50년대의 초현실주의는 이 폭발과 함께 김구용 스스로에 의해 파괴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후 김구용이 1967년에 쓴 일기는 초현실주의와의 운명적 접전에 대한 회고로 보이기까지 한다. “쉬르레알리즘은 비판 대상이지 오늘날의 명제는 아니다. 한때 쉬르레알리스트로서 자부했던 시인들 스스로가 그 이상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생전에 여러 방면으로 전신轉身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언급이 암시하듯이 60년대 이후 김구용은 초현실주의로부터 멀어져 양식의 복원과 선적 사유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가 새롭게 시도한 연작 장시는 시와 종교의 격돌이기에 앞서 양자를 품고 나아가는 지형으로 탐구된다. 그는 시와 종교, 어느 쪽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해소되지 않는 문제들을 궁구함으로써 50년대의 과격함을 사유의 크기로 대체해 나갔다. 그는 후기의 이러한 작업을 “시 정신은 그 자체를 제시할 수 없는 무한에 내포되어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김구용 시가 자아 부재의 확인과 무아로 전개되는 양상은 그의 진아 찾기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것이 이상 시의 주소로 그를 포괄할 수 없는 점일 것이다. 이상 시에서 주체의 분열이 시간이 사라진 현재형으로 영원히 진행된다면, 김구용의 주체의 소멸은 다음 국면으로의 전환을 야기하는 존재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김구용의 작업을 두고 “모더니즘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는) 모더니즘의 초극”이라고 한 김윤식의 지적은 다시 한 번 적절하다. 우리 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을, 그 중에서도 초현실주의를 과격하게 극화시키고 스스로 이를 붕괴시킨 최초의 예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초현실주의는 이후 간헐적으로 우리 시사에 등장하지만 김구용의 격렬한 탐사를 받던 위용에는 이르지 못한다. 초현실주의는 김구용에게서 독특하게 50년대적 고유성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며, 그의 파괴적 실험에 의해 운명을 다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년대 이후 그것은 이제 창조적 전진이 아니라 보통 명사화되어 모방되고 복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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