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0호 (2010년 겨울호) 신작단편/복만이의 화물차/고광률
페이지 정보

본문
복만이의 화물차
고광률
공항을 더디 벗어난 버스가 도로에서 바삐 달렸다. 세계적 투자회사 맥쿼리가 돈을 대 만들었다는 도로였다. 그래서 통행료가 비싸다는 도로를 바삐 달릴 때, 성복만이 전화를 걸어왔다. 복만의 목소리에 짜증과 투정이 배어 있었다.
보름가량 통화가 안 된 이유를 물었다.
“네팔에 갔다가 왔다.
나는 양편에 바다를 끼고 달리며 답했다.
“가방 끈 긴 놈은 팔자가 좋구나.”
질투인지 빈정대는 것인지, 아니면 부러움의 색다른 표현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는 팔자 좋은 것하고는 무관한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해명하듯 밝혔다.
가방 끈이 아무리 길고 질겨도 시간강사는 방학 중에 백수였다. 일 년 오십이 주 가운데 삼십 주만 강의가 있고, 이십이 주는 쉬어야 했다. 그러나 강사도 삼백육십오일 밥은 먹어야 하기에 이십이 주 동안 먹고 살 방편이 필요했다. 이십 년째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
1학기 십오 주 강의를 마친 나는 여름방학 십일 주 동안을 먹고 살려면 온갖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다 해야만 했다. 계절학기 강의나 입시학원에서의 논술 강의나 문화센터 특강 등 긴 가방 끈을 써먹는 정신노동도 있었으나, 문사철이 구조조정을 당한 시대에 문학 전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정이 다급해지면 노가다와 대리운전도 했다. 노가다는 천안 공주 청주를 돌며 뛰었다. 그래도 알아보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십 년 보따리장사를 한 죄였다.
지난겨울에는 논문 몇 편을 끼적거리면서 대리운전을 했다. 유사시를 대비해 연구실적을 관리하다가 일거리를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대학 진학하는 딸아이의 모자라는 입학금과 등록금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등록금 중 일부를 강사료로 받아서는 딸의 등록금을 낼 수 없기에 가욋일을 해야만 했다. 대리운전을 했다. 아이들의 과외비를 위해 전에도 가끔 해왔던 일이었다.
나는 대리운전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나 싫다고 해서 아내나 아이들로부터 무능한 가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더 싫었다. 그래서 종종 울면서도 대리운전을 했다. 점잖은 손님을 만나면 고마워서 울었고, 거친 손님을 만나면 서러워서 울었다. 내 공부가 내 삶에 원죄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리운전을 위해 콜을 받고 낯선 손님을 찾아갈 때마다 두려웠다. 행여 아는 사람을 만날까 싶어 모자와 알이 없는 안경 그리고 마스크까지 썼다. 하지만 만날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만나게 되어 있었다. BMW 뉴 328i 컨버터블을 모는 운전자를 만났다. 컨버터블을 대리운전 시키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내가 가르쳤던 학생을 손님으로 모시고 학교 앞 술집에서 유성의 한 호텔까지 운전했다.
“아저씨. 운전 완전 헐이다.”
갑자기 아, 하고 비명을 지른 여자아이가 성질을 부렸다.
룸미러로 보니, 여자아이의 치마 속에서 남자아이의 손이 급히 나오고 있었다.
급정거 할 때 손가락 끝에 찔린 모양이었다.
앞서 가던 차가 바뀐 신호에 뒤늦은 반응을 하며 급정거 한 때문이었다.
“요즘은 소나 개나 대리운전을 하잖니.”
남자아이가 나를 소나 개로 취급하여 여자아이를 위로했다.
목적지까지 빠른 길을 생각하다 앞차의 부주의까지 겹쳐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이놈들이 다시 내 강의를 들으면 반드시 F를 주겠다고 다짐하며 울분을 삭였다.
이 일을 겪은 뒤로 대리운전을 때려치운 나는 매필賣筆을 결심했다. 적어도 양아치 같은 술꾼을 상대할 일은 없지 싶었다.
매필만은 안 하고 싶었지만, 내가 안 하고 싶대서 안 하면 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고스트 라이터라는 직업도 있고, 또 먹고 가르치며 살려면 뭐든 해야만 했다. 돈 많은 남자보다 지적인 남자가 좋다며, 소크라테스 흉내를 내 나와 결혼 한 아내는, 그 대가로 나이 마흔일곱에 학습지 방문 선생을 하며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아내는 꿈을 포기한 십 년 전부터 돈 없이 지적인 남자에 대해 이를 갈았다.
매필도 쉽지 않았다. 보통 강의가 네 개 대학 다섯 과목에 마흔두 시간 안팎이었다. 네 개 대학 중 한 개 대학은 서울이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어물거리다가 역에서 택시를 타면 강의비가 곧 교통비였다. 그래도 서울 소재 대학의 강의는 경력과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필요했다. 어쨌든 마흔두 시간가량 강의를 하고 자서전을 대필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삼류작가라는 이유로 제시한 대필료 가운데 삼분의 일을 깎았다. 천만 원에 원고지 천 매짜리 자서전을 써야할 판이었다. 교통비 등 필요경비를 빼면 헐값이었다. 돈의 양과 글의 질이 정비례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삼류부자를 만난 탓이었다.
의정동우회 사무실에서 만난 삼류부자는 첫 면담자리에서 출신학교와 직업을 물었다. 나는 지방 사립대학을 나온 지방 사립대학의 시간강사라고 곧이곧대로 고했다. 출신학교와 직업은 미리 알고 있었는데, 굳이 물어 본 것은 가격을 깎기 위한 수작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삼류부자는 출신학교와 직업이 글쓰기의 질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삼류부자임을 알고 삼류작가를 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성복만에게 주절주절 들려줬다.
“그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니까 해외여행까지 시켜준 것 아니겠어.”
“맞다. 생각 많은 분이다.”
돈을 깎고 좋은 글을 원한 삼류부자가 수정 보완과 최종 탈고를 위해 네팔여행을 권했다. 생각이 있는 분이라, 집필자를 격리시켜야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과 그의 막내아들이 운영한다는 ‘비전여행사’의 매출을 증진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권한 것이었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빌려 인생 모토가 모든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사실이지 싶었다.
삼류부자는 치대 나온 큰아들에게 병원을 물려줬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둘째아들에게는 사립대학의 전임 자리를 사줬는데, 자유분방함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한 막내아들에게는 여행사를 차려줬다고 했다. 각자의 달란트에 맞는 각자의 몫을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자유분방이지 방랑벽 때문에 돌아다니며 놀기만 좋아했던 막내아들이 여행사를 붙들고 제대로 운영할 리 없었다. 그래서 큰 걱정이라고 써 달라 했다.
삼류부자는 바람 피워 덤으로 난 배다른 막내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회사 운영 자금을 다달이 따로 대주고, 마이너스통장까지 만들어줬다. 아마도 이 각별한 애정이 막내아들을 망친 것 같았다. 막내아들에 대한 애정이 팔팔 끓어 넘침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을 낳은 여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데리고 일하던 간호사인 것 같았다. 삼류부자는 막내아들의 올바른 정체성 확립과 장래를 위해 돈을 주고 친권을 사왔다고 했다. 삼류부자는 막내아들과의 인터뷰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어쨌든 삼류부자는 대지주였다는 부모로부터 받은 부를 불려 자식들에게 고루 나눠주었다. 치과의로서 벌 수 있는 돈이 한계에 이르자, 사채와 건설업에 투자했다.
“왜?”
무슨 일로 줄창 찾았느냐고 물었다.
복만은 전화 건 용건은 말 안 하고, 들으나마나 한 내 말만 듣고 있었다.
복만은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복만으로부터의 소식은 곧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대학시절부터 그랬다. 데모 중에도 여자를 사귀었다. 지사기질과 함께 한량기질도 갖고 있었다. 최루가스와 돌팔매질 속에서 여자를 사귀는 여유와 재주가 있었다. 빼어난 언변과 세심한 배려에 녹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물론 허우대도 멀쩡했다. 이름만 빼면 뭐든 준수했다.
복만은 여자를 사귈 때, 나를 찾지 않았다. 사귀는 여자 몸에 이상이 생겼거나, 여자와 헤어질 때 나를 찾았다. 내가 위로와 도움을 주는 것도 없었는데, 나를 찾았다. 되레 욕만 바가지로 퍼부어댔는데도 나를 찾았다. 교도소를 갔다 오고 졸업을 하고도 같은 식이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혼자 놀고 속상하는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았다. 교도소에 갔을 때는 나만 찾았다. 나는 그의 동아리 후배인 여동생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면회를 갔다.
나를 보름 동안이나 찾았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놀 수만 없잖아. 그래서…….”
“그래서, 뭐?”
나는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북쪽이 한 번 붙어보자면 굳이 마다할 이유 없다는 식의 대통령 담화를 듣던 승객들이 일제히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얼른 고개를 까딱해 미안하다는 뜻을 표했다.
나도 모르게 조건반사적으로 지른 소리였다. 공사판에 다니며 막노동하는 것을 논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시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는 우회적 표현일 수 있었다. 복만은 ‘일=사업’이었다. 참 특이한 인식구조였다. 그는 결혼 이후부터 자기 정체성이나 자존감 그리고 자아성취의 궁극적 가치를 사업성공에 두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에 뒀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 성공이 정의의 구현이자, 진짜 자본주의의 희망이라고 했다. 내가 듣기로는 요설이었다. 그는 혁명이나 복권당첨 또는 돈 많은 과부와 깊은 만남 등이 부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인데, 모두 요원하고 오직 실현가능성 큰 것이 사업이라고 했다. 내가 볼 때 사업이 그에게 먹고사는 방편은 될 수 있어도 부를 가져다 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시차 때문에 몹시 졸리니까 저녁에 만나 다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날이 더웠다. 천구백육십 미터 고지인 간두룩 밀란호텔에서는 더위를 몰랐는데, 자면서도 땀을 흘렸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메일을 열었다. 스팸메일을 포함해 백열여덟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밀린 회비를 독촉하는 학회의 메일과 강의계획서를 입력하라는 메일을 먼저 열어 읽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나갔던 한 대학에서는 ‘강사 분들께 보내는 강의 기강 확립을 위한 지침’이라는 이상한 제하의 메일을 보내왔다. 메일을 열어 지침을 숙지했다. 대학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학과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수강학생들의 학습 태도 및 능력을 폄하하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지 말 것과 학점 거품을 빼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학생을 업신여기는 강사와 인기를 위해 학생의 눈치만 보는 강사에게 보내는 경고 같았다.
밀린 메일을 열어 모두 확인을 마친 결과, 2학기는 두 과목이 줄어든 서른여섯 시간 강의라는 것을 알았다.
기존 강의를 폐지한 학과의 학과장에게 일언반구 없이 폐지한 사유를 묻고 싶었으나 그만뒀다. 자칫 따지는 것이냐, 또는 항의하는 것이냐, 라며 되치기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이치가 아닌 힘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이십 년째였다. 시간강사 따위가 전임에게 심기 불편한 뭔가를 묻거나 토를 다는 것은 곧 따지거나 항의하는 것으로 취급받았다. 강의를 주면 고맙고, 안 주면 그동안 줬던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물러나는 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자 예의였다.
그 놈 싸가지 없더구먼. 시간강사 주제에 학사행정을 문제 삼더라고. 이런 구설수에 오르면 곧 퇴출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나면 고분고분 인사 잘 하고, 눈치껏 밥 잘 사고, 때 되면 꼬박꼬박 선물 잘 챙기고 해야 기본을 갖춘 ‘준비된 강사’가 된다.
나이가 열 살이 아래인 후배여도 전임이라면 먼저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전임인 연배여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연배들과는 야자를 트고 지내도 학과 관련 전임은 선배처럼 모셔야 했다. 이렇게 사는 나를 부러워하는 복만이가 나는 부러웠다.
대찬 비가 내렸다. 아내가 쌓아 둔 공과금 고지서를 챙겨들고 집을 나왔다.
나는 차가 없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딸이 차가 없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 이유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자연, 환경, 에너지 절약, 지구온난화, 건강 등을 마구 끌어다 버무려 자가용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의 노자와 미국의 엘 고어 전 부통령을 끌어다 댔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딸을 위해 국민을 위해 일하는 대통령이 차 대신 자전거를 타라며 전국에 자전거 도로를 열심히 닦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딸아이는 아, 그래서 뱃길도 만드는 거구나, 라고 했다. 하나를 일러주면 둘을 아는 아이였지만, 그건 경우가 다르다고 아주 길게 설명해주었다. 그냥 등록된 자동차 천칠백육십사만 칠천칠백구십구 대 중 한 대를 끌고 다닐 능력이 없어 미안하다면 될 걸 가지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돈이 없어 발치한 자리에 임플란트를 못 하면서도 자연 상태의 몸이 좋은 것이라 안 하는 것이라고 둘러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내 긴 설명을 엿들은 아내가 지적인 남자도 가끔 쓸 데가 있다고 퉁을 놨다. 나를 아이 앞에서 타박하지 않고 퉁으로 끝내준 아내가 고마웠다.
비가 바람을 타고 계통 없이 내렸다. 앞에서 뿌렸다 뒤를 때렸고, 옆으로도 들이쳤다. 빗줄기가 굵고 강해 내린다기보다 곤두박질친다는 표현이 옳을 듯싶었다. 살이 부러진 우산이 찢어졌다. 인간이 자연을 닮지 않으니, 별수 없이 자연이 인간을 닮는 것 같았다.
은행에 들러 공과금을 내고 통장을 찍었다. 삼류부자가 송금한 잔금을 확인했다. 한 시간 남짓이 남아 있었다. 서점에 들러 신간들을 들추며 시간을 죽였다.
약속장소인 ‘선양집’이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이십여 년 전 번화가를 구도심이라고 불렀다. 이 구도심을 고치고 꾸며 젊은이들의 거리로 만들었다고 했다. 죄 음식점, 아니면 술집, 아니면 노래방이나 오락실 등을 갖춘 유흥가였다. 젊은이들은 밤마다 찾아와 이 거리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췄다. 그러다가 새벽이 오면 지쳐 돌아갔다.
‘선양집’을 찾느라 헤맨 것은, 이십 년 전처럼 젊은이들이 찾는 술집이 아니라는 점과 ‘선양집’으로 꺾어지는 골목 입구에 있던 상점들이 바뀐 때문이었다. 좌측에 ‘우리상회’라는 구멍가게와 골동품상점이 있었고, 우측에 만홧가게를 겸한 문구점이 있었다. 근방에 양팔 길이 폭으로 비슷비슷한 좁은 골목이 여럿 있었는데, 모두 여중 뒷담 쪽으로 뻗은 큰길을 물고 있었다. 그래서 머릿속 약도에는 ‘우리상회’를 끼고 돌면 ‘선양집’이 나온다고 입력되어 있었다. 그 ‘우리상회’와 골동품상점이 SSM인 ‘롯데마트’로 바뀌어 있었고, 커피테이크아웃점은 ‘스타벅스’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내 머릿속 약도를 ‘롯데마트’와 ‘스타벅스’로 즉각 바꿔 입력해야 할 판이었다. 「아이 엠 샘」의 ‘샘’을 생각하며 ‘스타벅스’를 돌았다. 나는 퀴퀴한 골목을 걸으며 굳이 찾기 힘들어진 ‘선양집’을 약속장소로 잡은 복만을 탓했다.
먼저 온 복만이 흠뻑 젖은 몰골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대학 때 만나 사귄지 삼십 년이 됐다지만, 복만의 음주 매너는 여전히 못마땅했다. 기와집인 ‘선양집’은 콘크리트 빌딩과 슬라브 지붕들 틈에 끼어 콕 처박혀 있었다.
7080 노래 속에서 기와를 때려 울리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댓 평 쯤 되는 마당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빗소리가 안주였다. 나도 복만을 따라서 자작으로 연거푸 석 잔을 내리마시고 두부두루치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옛맛 그대로였다. 맛과 달리 손님들은 적었다. 언제 어느 때나 오면 앉을 자리가 없었는데, 옛말이 되고 말았다.
넉 잔째 자작을 하려 할 때 복만이 병을 빼앗아 따랐다. 술을 받던 나는 복만의 손가락이 붕대에 감겨진 것을 보았다. 오른손이었는데, 장지와 약지 손가락이 한 마디씩 없었다.
“뭐야?”
깜짝 놀란 나는 받던 잔을 상 위에 놓고 물었다.
“뭐긴……. 술 따라 주고 있잖아.”
먼저 자작을 한 이유와 내가 자작을 하도록 놔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잘린 손가락 때문이었다. 그라인더로 쇠 파이프를 자르다가 손가락도 같이 잘랐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통화하며 소리 지른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화가 났다.
“야이, 씨발! 좆같은…….”
속절없이 화가 욕이 되어 나왔다. 나는 목이 매여 “새끼야!” 라는, 뒷말은 잇지 못했다. 버스에서처럼 드문드문 앉은 손님들이 나를 쳐다보거나 째렸다.
“너, 내가 전화 안 받는다고 그랬냐? ……그랬냐고?”
나는 말 같지 않은 말을 씹어 뱉으며 술상을 잡고 꺼이꺼이 울었다. 복만이가 채우다 만 소주잔에 눈물이 떨어졌다.
둘다섯이 ‘긴 머리 소녀’를 부르고 있었다. 복만이가 결혼식 때 축가로 불러달라고 해서 부른 노래다. 긴 머리 소녀가 신부라고 했다.
“이 친구가 술이 취해서 그래요.”
복만이가 나를 불편해 하는 주위 손님들에게 사과하며 양해를 구했다.
“나가자.”
술상을 짚고 엉거주춤 일어선 내가 복만을 잡아끌었다.
치료 중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야이, 씨발! 좆같이……. 앉아.”
복만이가 잡힌 팔을 뿌리치며 나를 주저앉혔다.
“술 마실 만하니까 마시는 거야. 네가 꼰대냐? 꼭 만날 때마다 가르치려고 지랄이야.”
“네가 왜 그라인더를…….”
손가락 신경이 온전치 않은 손으로 그라인더는 왜 사용했냐고 묻고 싶었다.
“말하지 마. 먹고 살려면 해야 할 일이야. 술만 마셔.”
성한 검지를 입술에 대며 말했다. 복만은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상을 때려 엎고 나가겠다며 위협했다.
나는 눈물이 섞인, 따르다 만 잔을 들었다.
마당의 빗소리와 옆자리 손님들의 잡담과 담배연기 사이로 주인아주머니가 선곡한 채은옥의 ‘빗물’이 흘렀다.
시집온 지 팔일 된 베트남 신부를 흉기로 찔러 죽인 살인자의 형량이 어이없다고 했다. 어떻게 무기징역을 때리고, 정신분열증에 따른 심신미약을 핑계로 십이 년 형으로 감경할 수 있냐며 흥분했다. 정신 멀쩡한 놈이 천인공노할 살인을 저지를 수 없으므로 정신분열을 이유로 삼은 것은 무기징역과 십이 년 사이에 어긋난 민족주의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고 떠들었다.
우리말이 서툴러 못 알아들은 중국 동포를 두들겨 팬 끝에 반병신을 만들고, 삼십대 탈북자가 같은 일을 하고 반값 노임을 받는 차별 때문에 세 평짜리 방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주고받았다. 침 튀기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 옆에 조용히 듣고만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회식자리에 불려나온 동남아시아 노동자들 같았다.
이십오 년 전 ‘입영전야’를 불렀던 최백호가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다. 그때 입영하여 제대한 세대가 남성호르몬이 적어져 낭만 찾을 나이가 됐지 싶었다. 입영과 낭만 사이에 이룬 것이 없었다.
적어진 남성호르몬 탓인지, 다시 눈물이 맺혔다.
“자식……. 너 미쳤냐?”
복만이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야이, 씨발! 말 하지 마. 술만 마셔.”
이번에는 내가 소리를 질러 복만의 입을 막았다.
‘입영전야’는 바로 이 ‘선양집’에서 복만이가 나를 위해 불렀다. 복만이가 나만 군대를 보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나만 성한 몸으로 군대를 가게 되어서 미안했다.
복만은 스물하나의 나이에 손을 떨었다. 고문후유증이었다. 교련과 병영집체훈련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 때, 앞에서 주먹 쥐고 구호를 선창한 것에 대한 대가였다. 대통령이 어긴 국법을 국민도 어길까봐 잔뜩 겁먹은 전두환의 졸개들이 구호 선창에 대한 책임을 야만적으로 물었다. 본때를 보이기 위함이라고 했다.
안기부가 복만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경력과 사회주의 활동 경력 가운데 사회주의운동 경력만을 골라냈다. 그러고는 열 손가락 끝에 전선을 감고 죽은 할아버지 사상과의 관계를 대라고 족쳤다. 고문기술자가 삼십오 년 전인 1947년에 미군정하에서 고문을 받다 죽은 할아버지와 1961년에 태어난 손자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려고 전기를 끌어다 복만의 몸을 지지고 볶고 구웠다. 그러나 복만의 몸에는 할아버지의 사상이 살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온 고문기술자가 무진 애를 쓰다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게거품을 물었다. 그래서 복만의 손을 망가뜨렸다.
복만의 할아버지는 사회주의 독립 운동을 한 투사였다. 인동 장터 만세 운동을 했고, 상하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46년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이 합당할 때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노동당에 반발하여 여운형의 사회노동당에 동참했다. 그러다가 사회노동당을 탈퇴하여 남조선노동당에 동참하였다. 1947년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되어 고문으로 죽었다. 할아버지는 독립투사가 아닌 빨갱이로 죽었다. 복만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회주의 죄업’을 씻기 위해 6․25 전쟁에서 전공을 세우려 성급히 뛰어다니다가 미군의 용산 오폭으로 상이군인이 되고 말았다. 복만의 아버지는 북한군과의 전투가 아닌 미군의 오폭으로 상이군인이 된 것을 분하고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불구자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할아버지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웠고, 아버지는 찾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모두 미국과의 악연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복만은 이들이 찾은 나라를 똑바로 지키려고 구호를 선창했다. 그런데 이적행위를 한 용공분자가 된 것이다.
그날 ‘동지’들이 모인 환송식 자리에서 복만은 매 잔마다 따른 술의 삼분의 이만 마셨다. 나머지는 상 위에 흘렸다. 고문후유증 때문이었다. 그의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본, 나와 사귀자며 따르던 여학생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충격이었다. 나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뒤 그 여학생과 이별했다. 돈 많은 집안에서 자란 바르고 참한 처자를 버렸다고 복만이가 많이 아쉬워했다.
골목을 타고 들어온 비바람이 방으로 들이쳤다. 돼지고기수육을 입에 문 남자가 동남아 노동자들에게 두부두루치기를 권했다. 그러면서 돼지고기도 못 먹게 하는 나라가 이상하다며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전과와 고문후유증 때문에 취직이 안 된 복만은 아버지를 도와 자영업을 했다. 다리를 저는 아버지가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자영업은 초라했다. 엿장수와 고물장수를 하며 헌책과 잡동사니 골동품을 모았다. 그러고는 시장 끄트머리에 겨우 빌붙어 무허가 건물을 지어 가게를 열었다.
복만이가 아버지의 헌책방을 꾸린 지 십 년쯤 지나자, 손님이 줄었다. 사양업종이 된 것이다. 돈을 아끼려고 또는 희귀 서적을 구하려고 서점을 헤매는 사람들이 줄었다. 대다수가 새 책을 샀고, 새 책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도서관으로 가거나 아예 책을 읽지 않았다. 지금은 문사철이 홀대받는 시대라 희귀서나 케케묵은 고서적을 찾으러 다니던 학자나 전문가들도 희귀해졌다.
복만은 아버지의 헌책방을 팔아 PC방을 차렸다. 인근에 학교가 있어 만화방을 곁들였다. 그러나 PC방은 몇 년 반짝하다가 스러졌다. 집집이 PC가 있는데 굳이 어두컴컴하고 담배냄새 찌든 PC방에 처박혀 놀 이유가 없었다. PC방은 탈선 비행 청소년과 백수건달들의 온상이 되었다. 이들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유해업소 단속을 이유로 경찰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들마저도 뜸해졌다.
PC방을 서둘러 정리해 당구장을 차렸다. 이것이 문제였다. 학교 코앞에 차렸지만, 학생들이 예전만큼 당구장을 찾지 않았다. 복만이가 변한 세상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대학생들이 ‘선양집’을 찾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소주와 막걸리에 두부두루치기와 수육을 마시고 먹던 시대가 간 것이다. 놀이문화도 바뀌었다. 파리 날리는 당구장을 어쩌지 못하고 이 년이나 껴안고 있다가 처분했다.
업종 전환 때마다 판단이 더뎌 가진 돈은 줄고 빚만 늘었다. 복만은 당구장을 처분하고 남은 돈으로 겨우 재개발예정지역 입구에 있는 구멍가게를 인수했다. 당구장에서 다섯 평짜리 구멍가게로 옮길 때, 복만의 ‘긴 머리 소녀’가 따라오지 않았다.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는 이유였다. 복만에게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어 견딜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복만의 아내가 왜 복만에게서만 희망을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부가 나눌 수 있는 희망이 부부에게 같이 있을 터인데, 왜 그 희망을 복만에게서만 찾았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복만의 아내를 만나서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이혼하재.”
나는 깜짝 놀라 술을 흘렸다. 복만이가 내 생각을 훔친 것이지, 술 취해 잘못 들은 것인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복만은 이혼이 오래된 얘기라고 했다.
“누가?”
표정만큼 멍청한 질문이었다.
“민성 엄마가. ……오천만 원 달래.”
“뭐?”
나는 먼저 이혼을 하자고 한 여자가 위자료를 요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오천만 원이 있으면 이혼하자고 안 했을는지도 모를 텐데……. 안 그러냐?”
오천만 원이 없어 이혼하자며, 오천만 원을 요구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복만은 오천만 원이 없어서 이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오천만 원이 있다면 당장 꿔주고 싶었다.
복만의 아내는 복만을 자랑스러워했었다. 민주투사로 받들었다. 투사의 아내가 될 수 있도록 수수방관해준 내게도 고맙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사랑도 움직이는데 가치관이 그대로일 수 없었다. 시대가 투사를 필요치 않자, 투사에 대한 관심과 존경도 사라졌다. 명분이 사라진 시대에 돈 못 버는 투사는 무용한 헛것이었다.
복만의 아내는 전직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뒤부터 이혼을 요구했다고 했다. 현명한 여자 같았다. 복만은 아내가 성공한 투사의 말로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는 정의가 타살당하는 시대에 더 이상 정의를 구하며 살 수 없기 때문에 남은 삶을 감당키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다.
나는 사람이 아닌 명분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말에 명분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라며 그토록 당당히 맞섰던 여자가 말과 생각을 바꾼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에 올린 정의의 실체도 궁금했다. 정의를 위해 싸워왔다던 여자가 정의를 위해 더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이혼사유로 삼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요구한 오천만 원이 그녀가 싸워왔다는 정의가 실체가 아닌가 싶었다.
복만의 구멍가게는 길 건너 맞은편에 SSM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생기면서 망했다. 대기업이 골목길까지 파고들어 코흘리개의 동전까지 채뜨려 갔다. 전국에 팔백 개가 넘는다는 SSM 점포 중 한 곳이 구멍가게 맞은편에 생긴 것이다. 길가다 담배 찾는 행인만 가끔 들렀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118조 원의 빚더미에 올라앉고 부동산 경기가 죽으면서 재개발도 요원한 꿈이 되고 말았다.
복만은 구멍가게를 늙은 아버지에게 맡기고 집 짓는 공사판을 찾아다녔다. 기술이 없는 그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허드렛일을 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받는 처우를 같이 받는다고 했다. 그레이더에 손가락이 잘린 것은 아마도 기술을 배우려고 무리하다가 생긴 일 같았다.
공과금 내고 남은 돈으로 계산을 치렀다. 계산을 치를 때, ‘선양집’은 변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변한 것 같아 미안하고, 지금껏 남아 있어 고맙다는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꼬리뼈가 부러져 앉아서 인사할 수밖에 없다는 주인아주머니가 허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우리가 나눈 허망한 말들을 엿들은 눈치였다.
복만과 나는 배추 한 포기가 만 육천 원 한다는, 그래서 중국 배추를 급히 사들였다는 호들갑스러운 뉴스를 들으며 ‘선양집’을 나왔다. 앳된 아나운서가 4대강 공사 때문이 아니라 날씨 탓으로 작황이 나빠진 때문이라는 말을 네댓 번 반복했다. 서울시가 배추를 사서 시민들에게 싸게 판다는 뉴스가 따라붙었다. 술과 뉴스에 취한 발길이 비틀댔다.
서울 시내 한복판의 물난리가 천재 탓이라고 발뺌하듯 정부가 배추값 폭등을 날씨와 부도덕한 중간상 탓으로 돌렸다. 그래도 지대 낮은 곳과 지하에 사는 것을, 비싼 배추를 못 사먹는 것을, 무능한 국민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나라의 권력과 금력을 쥔 자들이 서로 담합하여 자신들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다스렸다. 이런 제도를 탓하는 사람은 좌파요 불만세력이요 무능력자였다. 일 퍼센트를 위한 제도에 맞춰 사는 구십구 퍼센트 백성들의 고된 삶을 친자본주의적 삶이라고 주장했다.
임시 혹은 일용직으로 사는 사람들은 불가촉천민과 다름없게 되었다. 불가촉천민은 꿈꿀 자격마저 없어졌다. 국민 위해 써야 할 돈을 멀리 4대강에 가져다 버렸다. 정권이 국민의 무지몽매를 질책하면서 국민을 위해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잘못된 제도와 정책을 바꾸려 하지 않고, 올바른 사람들을 그 제도와 정책에 맞추려고 관과 공권력을 동원해 어르고 달래고 윽박질렀다. 일 퍼센트를 위한 제도에 구십구 퍼센트가 지입해서 살아야 하는 세상으로 급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복만이 구공탄 삼겹살구이집을 지나며 인도와 차도 사이에 버린 연탄재를 발로 찼다. 빗물을 머금은 연탄재는 돌덩이였다. 복만은 주저앉아 발가락을 주물렀다.
삼십 년 전에 연탄재를 발로 차 부수는 일이 복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자 술버릇이었다. 복만은 만취하면 새벽녘까지 연탄재를 찾아 골목마다 누비고 다녔다. 그는 청소부아저씨들에게 야단맞으면서도 연탄재를 차 부쉈다.
“연탄재니까 내 발길질을 받아주는 거야, 그치.”
“연탄재가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허튼소리로 받았다.
“내가 연탄재를 많이 찬 벌을 받는 것 같다.”
복만이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며 말했다. 불러낸 용건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복만은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자신에게 지웠다. 불의를 찾아내 세상과 싸웠던 투사가 아니었다. 이런 변화가 내 탓이오 쯤으로 설명될 자기반성은 아니었다. 현실을 등진 자기위안 또는 자기보호본능 같았다.
나는 걷다말고 버스에 오르며 마음이 짠했다. 연탄재 찬 벌을 받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연탄재를 함부로 찰 수 없었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에베레스트 정기로 쓴 글입니다.”
내가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치는 신하인 양 말했다. 안 해도 될 말이었다.
삼류부자는 프린트된 원고가 자신의 전체인 양 엄숙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잔을 받드는 초헌관 같은 자세였다.
하와이에서 여름을 보내고 온 삼류부자는 시차적응 문제로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서둘러 프린트물을 뒤적이며 꼼꼼히 살폈다. 아마도 자신이 재 기술을 지시한, 자신이 못마땅해 했던 부분을 찾아 확인하는 듯싶었다.
“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삐딱하게 보는 거요.”
삼류부자는 초고를 살필 때, 나의 세상 보는 방식을 꼬투리 잡았다. 남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함부로 문제 삼는 몰상식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삼류부자는 돈이 세상 가치의 준거이며, 타인의 가치관과 세계관 따위는 얼마든지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시의원 출신인 그는 돈으로 나의 글 솜씨를 살 때, 가치관도 같이 산 것이라고 말했다. 내 필력과 가치관이 천만 원이라는 얘기처럼 들렸다.
“세상을 임의로 해석하려 하지 마시오. 있는 그대로 보시오. 그게 사실이오. 현실이 곧 사실이라는 말이오. 제 주제를 모르고 세상 물정 어두운 놈들이 좌우를 간섭하며 깝죽대고, 다 지난 일을 가지고 따지려 드는 것이오. 세상을 두루 살피고 고르게 다스리는 사람은 좌우와 앞뒤를 탓하지 않소.”
세상을 모르는 놈이 어쩌지도 못할 불만을 갖고, 주제넘게 현실을 탓한다는 소리였다. 삼류부자는 그러면서 자기 자서전이니까 자기 기준에 맞춰 쓰라고 닦아세웠다.
일어서야 했으나, 일어설 수 없었다. 수정 보완만 남았다. 뜸 드는 밥솥을 엎고 싶지 않았다. 나와 아내와 딸들의 밥이 담긴 솥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해야 될 것에 우선하는 법이오.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몽상가나 선동가요.”
고된 자리였다. 삼류부자가 곧 세상의 선악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이었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서민들에게 또 다른 족쇄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삼류부자는 풀뿌리를 뜯어먹고 사는 토착부호였다.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통일주체국민회의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관련한 촛불시위와 초등학교 무상급식과 세종시 건설에 대한 부분을 부정의 시각이 아닌 긍정의 시각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의 시각으로, 소모적이 아닌 생산적인 시각으로 손보라고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과 민선 4기 시의원 재임 시기의 시대상을 당대의 시각으로 보라고 주문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 후보로 단독 출마한 전두환에게 총 투표자 이천오백이십오 명 가운데 기권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국민을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았기 때문에 전두환 각하를 민선 대통령으로 적으라 했다.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노빠들의 불장난이었고, 무상급식은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난 빨갱이적 발상이며, 세종시 건설 강행 주장은 지역 패권주의에 기댄 인위적 생떼라고 했다. 그대로 받아썼다.
나는 유령작가로서 삼류부자의 이런 강퍅한 주장에 논리적 근거를 대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서전이 달밤에 개 짖는 소리가 될 판이었다. 내가 그의 주장에 필요충분조건을 붙여주고 보편타당한 논거를 찾아줬다. 곡필아세였다.
결국 생산과 소비의 법칙,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삼류부자와 삼류작가의 이해 사이에서 돈과 글이 유통됐다.
“생각보다 이해가 빠른 친굴세.”
삼십 분 가까이 프린트물을 살핀 삼류부자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벌어 둔 것 없고, 벌이 없는 나이 오십에 이해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차라리 좀 더 일찍 이렇게 살며 벌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원고가 마음에 든 삼류부자가 롯트 와일러와 함께 대문간까지 따라 나왔다. 그러고는 헤어질 때, 봉투를 건넸다.
백만 원 권 수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 삼류부자의 전원주택을 올려다봤다. 돈이 나오는 곳을 다시 보고 싶었다. 담벼락과 대문에 고루 설치된 CCTV가 ‘중익재衆益齋’를 에워싸고 있었다. 내가 봉투 속 수표를 헤아렸던 모습이 대문 위에 설치된 CCTV에 찍혔을 것 같았다. 속을 들킨 것 같아 편치 않아 민망했다.
‘중익재’에서 버스기착지까지는 이십여 분쯤 걸어야 했다. 버스기착지에서 ‘중익재’까지의 진입로가 이십 분 거리였다. 이십여 분을 걷는 중간에 비가 뿌렸다.
시동을 걸고 대기 중인 버스에 허겁지겁 뛰어올랐을 때, 휴대전화가 울었다.
“나야.”
복만이었다. 어제 못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중고 화물차를 한 대 살까 해.”
생계수단을 노가다에서 운전으로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육천만 원을 들여 8톤짜리 화물트럭을 사서 끌겠다고 했다. 돈은 구멍가게를 팔고 빚을 조금 얻으면 된다고 했다. 권리금과 찻값을 주고 지입차주가 되면 고정 일거리를 보장 받게 되어 민성이 학비와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다고 했다.
나는 지입 화물차를 끌겠다는 말이 무저갱에 들어가겠다는 말로 들렸다.
“안 돼.”
“왜?”
“대형 운전면허도 없잖아.”
“운전면허는 문제가 안 돼.”
권리금과 찻값을 내면 함께 해결해준다고 했다.
“1톤 트럭을 몰 때도 툭하면 사고 쳤잖아.”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다. 8톤 화물차 운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며 말렸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을 떠는 그가 어떻게 운전을 업으로 삼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물류 회사 근방에서 차주를 만나 계약 끝냈어. 내일 트럭을 받는다.”
복만은 내 말을 받지 않고, 자기 말을 했다. 한 탕 뛰면 삼십사만 원쯤 받는데, 부가세와 유류비와 통행료를 제하고 한 달에 삼백이십만 원 가량 떨어지는 일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또 매일 같은 부품을 싣고 같은 거리를 운행하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적다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
시동을 건 채 한참동안 가릉가릉 가래 끓는 소리를 하던 버스가 출발했다.
“지난주에…….”
복만이 말을 하다가 말았다.
“지난주에, 뭐?”
“숙려기간이 끝나서 이혼했다. ……미안하다.”
자칫 숙려기간 때문에 이혼 못 하고 있었다는 말로 알아들을 뻔 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리 말을 안 해서 미안하다는 것인지, 나와 상의 없이 이혼한 것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내가 네팔 가 없는 사이에 이혼한 것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왜 내게 미안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되레 고마웠다. 스스로도 감당키 힘들었던 삶 속에서 마음이 떠난 내 누이동생을 일찍 버리지 않고 살아준 그가 고마웠다. 내 누이동생이 버릴 때까지 버텨 준 그가 고마웠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낯선 길을 걸었다. 성글고 촘촘한 빗줄기가 바람을 타고 떼밀려 왔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오천만 원은 못 줬다. 산재 보상으로 받은 이천만 원만……. 미안하다.”
“그래, 잘 났다. 이 새끼야! 야이, 개새끼야! 너 잘 났다, 개애새끼야아!”
나는 비오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송화기를 입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경적을 울리며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차창을 열었다.
“야, 이새끼야! 앞을 보고 똑바로 걸어!”
욕설을 퍼부은 승용차가 빗속으로 멀어졌다.
고광률∙충북 청주 출생. 1987년 ≪호서문학≫에 최상규 박범신 추천으로 등단. 소설집 '어떤 복수'(2002), '조광조, 너 그럴 줄 알았지'(2010). 장편소설 '오래된 별'(2006). 대전대 신문방송사 상임국장.
추천8
- 이전글40호 (2010년 겨울호) 신작단편/안개주의보/김정남 11.04.05
- 다음글40호 (2010년 겨울호) 김구용 시인 특집/특집 시론/이수명 11.04.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