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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신작단편/안개주의보/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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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주의보
김정남
담배 연기에 호흡마저 곤란할 지경이다. 그러나 음악 소리는 높아지고 여자들도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어댄다. 옆에 앉은 아가씨의 가슴을 조몰락거리던 J도, 실장의 끊임없는 얘기에 지쳐가던 나도, 노래하는 Y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Y의 손이 춤추는 여자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다. 내 파트너조차 따분했는지, 무대로 나가 춤을 추고 있다. Y는 아가씨를 양쪽으로 끼고, 목소리를 과장되게 꺾어가며 「고향역」을 부른다.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나는 조금의 설렘도 없이 앞에 놓인 맥주잔만 하릴없이 잡았다 놓았다 할 뿐이다. 「톰과 제리」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생긴 실장은 뭔가를 계속 재깔거리고 있다. 나는 꿔다 박은 보릿자루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처량해 보일 것 같아, 무심하게 그 말을 듣고 있다.
“아세요? 얼마 전에 살인사건 말예요.”
실장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귀엣말을 내뱉는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가를 찌푸리며 자못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 뉴스에도 나왔잖아요. 여고생…….”
며칠 전,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거기는 아침저녁으로 짙은 해무가 고여드는 곳이다. 산허리를 툭 베어내고 도로를 만들었는데, 언제나 해풍은 도로 옆 가파른 절벽 아래로 안개를 부려놓는다.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은 이곳이 도로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안개의 점성을 이기지는 못한다. 사건은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TV에서는 어떤 사내가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여고생에게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했고, 여학생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자, 우발적으로 칼로 복부를 찔렀다고 했다. 여학생은 그대로 쓰러졌고, 그 길을 지나쳐가던 택시가 그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고 사건 개요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사실 이 보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칼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다행히 범인은 병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찰에 쉽게 잡혔다. 그는 이미 성폭력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는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밤늦게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어떤 아줌마가 넋이 나간 채 비명을 지르며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 여학생의 집이 바로 옆동 아파트였던 것이다. 나는 아내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욕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두르고 욕실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쳐 죽일 놈!”
아내가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 말이 오히려 나를 향하는 것 같아 섬뜩함을 느꼈다.
“저런 새끼들은 다 거세시켜 버려야 돼!”
아내가 발악하듯 말했다.
나는 왠지 가운데 매달린 시커먼 물건이 부끄러웠다.
“옷 좀 입어. 아이, 짐승 같은 놈들!”
순간, 정신이 아찔하다.
“뭐야, 좀 심하잖아. 왜 그래? 내가 강간범이야?”
아내는 소파에서 일어나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딸 소희는 지금 여기 없다.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가 있다. 갑자기 팔이 가렵다. 소희야, 너도 지금 피가 나도록 팔을 긁고 있니.
J가 이제 노래 그만하고 얘기 좀 합시다, 라고 말하며 자리를 정돈한다.
“아, 체력이 달려서. 너희들은 안 힘드냐? 한창 때니까. 부럽다, 부러워. 이따가 밤일도 잘할 것 같은데?”
말이 많은 Y가 일시에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여자들이 그럼요, 라며 옥타브를 높여 웃는다. 어느새 옆자리로 돌아온 아가씨는 팔짱을 끼며 내 팔을 자신의 가슴에 지그시 누른다.
실장이 다시 아까 얘기를 꺼낸다.
“근데, 죽은 고3짜리 여자애 말예요. 보도방 아가씨였다는 거 알아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대요. 그 애는 2차를 나가지 않는데, 그날따라 남자가 자꾸 나가자고 치근거렸대요. 여자애가 계속 싫다고 하니까, 봉고차로 그 애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거기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거라네요.”
“그래? 며칠 전에 죽은 여자아이?”
뭔 애긴지 종을 잡지 못하던 J가 어떤 얘긴지 알겠다는 듯이 맞장구를 친다.
“아이, 참. 세상 무서워서 못 살겠어요.”
실장이 상투적인 결론을 내린다.
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감정을 터뜨린다.
“무슨 소리야? 씨발. 미술학원에 갔다 오던 길이었대. 미대 입시생. 알겠어?”
내가 고함을 치듯 말한다. 그러자 Y가 중재에 나선다.
“왜 그래? 분위기 깨지게.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야?”
J도 다 같이 한 잔 하자며 상황을 정리한다. 괜히 실장과 나만 머쓱해진다.
“어쨌든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 그래, 그 아이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이, 두 번 죽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도우미는 무슨 도우미. 마냥 착한 학생이었답니다. 한창 꽃필 나이에 죽은 것도 억울한데.”
울컥하고 뭔가 치밀어 오를 것 같다. 내 상황을 알고 있는 Y와 J는 짐짓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2차 분위기를 망친 것이 분명하다. 사실 여기 앉아 있는 여자들도 스물을 갓 넘긴 애송이들이 아닌가. 매춘이니까 강간은 아니지만, 영계들과 자고 싶어 안달이 난 중년 남자들이 모두 공범자들이 아닐까. 갈수록 생각은 고리타분해진다. 실장도 기분이 상했는지, 맥주를 한 잔 따라서 단숨에 마셔버린다.
나 역시, 여기 앉아 젊은 여자들과 술을 먹을 처지가 아니다. 소희를 생각하면 아내의 말처럼 수놈들 물건을 다 짓이겨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소희가 일주일 후면, 개방병동으로 나온다. 조금 상태가 좋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던 그해 4월, 벚꽃이 천지에 환하게 터져 오르던 어느 날이었다. 학원에서 돌아와야 할 아이가 저녁 7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학원에 전화를 해 봐도, 이미 4시경에 수업을 마쳤다고 했다. 친구 집에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내에서 또래 아이들끼리 돌아다닐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아이였기에,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핸드폰도 계속 꺼져 있는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한참을 돌아다녔다. 시간은 어느덧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소리의 힘도 떨어졌다. 집안에서의 작은 잘잘못도 눈감아주지 못하고 크게 야단을 쳤던 일들이 일시에 떠올라, 미안함을 넘어선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10시가 넘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고 비명 같은 목소리가 송곳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소희가, 소희가…….”
아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벼, 병원으로 가고 있어. 빠, 빨리…….”
나는 당연히 집 근처에 있는 의료원이려니 생각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응급센터를 찾아갔지만, 아이는 이미 다른 병동으로 옮겨진 후였다. 소희는 산부인과 병동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했고, 뉴스에서나 보게 되는 것이라 여겼던 일이, 나에게 닥쳐온 것이었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온 의사는, 현재 아이는 안정되어 있고, 이미 증거는 많이 채취가 됐다고 설명했다. 아이의 몸과 속옷에서 놈의 정액과 치모가 발견됐다고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기 복도 끝에 한 여자가 웅크리고 앉자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나에겐 아내에게 다가갈 힘도, 그녀의 등을 쓸어줄 여유도 없었다. 아이는 안정제를 맞고 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들어가 아이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의사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팔에 몇 군데, 라이터불 같은 것에 덴 흔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마취를 깨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은데…….”
의사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아, 이러지 말고, 자, 자, 내가 딤플 한 병 쏜다. 딱 한 병만 더 먹고 가자.”
J가 제법 호기를 부려가며 말한다.
“아이, 그만 마시고 빨리 나가요. 오빠.”
얌전하게 앉아 있던 내 파트너가 J의 제안을 가로막는다. 그러자 Y가 나선다.
“아, 그러면 당신만 나가세요. 하하하.”
Y가 냉소적인 웃음을 던진다. 아무리 우연히 파트너가 된 것이지만, 내 파트너에게 빈정거리는 Y의 말본새가 기분 나쁘다.
“그래, 그럼. 딱 한 병만 더 먹자.”
내가 마지막으로 상황을 정리한다.
“오케이! 그럼, 한 잔씩 맛있게 말아봐라.”
J가 자기 파트너에게 눈치를 주며 말한다. 그녀는 널려 있는 잔을 모으더니, 능숙하게 맥주를 채우고, 위스키를 따른 스트레이트 잔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자, 누가 섞을래?”
J가 과장된 몸짓으로 설레발을 치며 말한다.
그만 술자리를 정리하자고 말했다가 괜스레 핀잔만 받은 내 파트너가 응분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듯이 자발적으로 나선다. 그녀는 갑자기 블라우스 단추를 풀더니 브래지어를 위로 들어올린다. 그리고선, 스트레이트 잔을 유두 끝으로 툭 친다. 그러자 스트레이트 잔들이 일제히 맥주잔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일순 와, 하고 함성이 터져 오른다.
“자, 원샷이다.”
Y가 잔을 치켜 올리며 말한다.
우리들은 모두 각자 잔을 잡고 한꺼번에 들이킨다. 몇몇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잔을 거꾸로 들어 머리 위에 올린다. 술자리의 이런 형식적 문법이 진부하기도 하련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따라한다.
이제 분위기는 확 바뀌었고, 이를 눈치 챈 실장이 다시 들어와, 여자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라며 분위기를 띄운다. 내 파트너가 일어나 화면 앞으로 나간다.
자기야 사랑인 걸 정말 몰랐니~ 자기야 행복인 걸 이제 알겠니~ 제법 간드러진 목소리다. 여자 아이들도 웨이브를 섞어 성적인 몸짓을 만들어낸다. Y가 튀어나가 아무나 잡히는 대로 여자들의 치마를 걷어 올린다. 여자들은 순간 가식적인 비명을 질러대지만, 더 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듯이, 엉덩이를 내빼고 빙빙 원을 그린다. Y의 파트너는 연두색, J의 파트너는 핑크색, 내 파트너는 검은색 팬티다.
“야, 팬티도 벗어버려.”
J가 흥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이에 여자 아이들도 벗는 시늉을 할 뿐, 벗지는 않는다. 트로트가 끝나고, 이제 발라드가 이어진다. 누군가 내 애창곡을 나 대신 눌렀나 보다.
그댄 너무 나빠요~ 그대는 착해서 나빠요~
서로가 짝을 지어 앞으로 나온다. 부르스를 춘다기보다는 여자들의 몸을 탐하는 시간일 뿐이다. J의 손이 여자의 가슴 속에 꽂히자, Y의 손도 치마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내 파트너는 나를 뒤에서 껴안고 서 있다.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느낌이 오롯이 전해진다. 아, 팔이 가렵다, 팔을 긁어야 하는데, 노래는 계속 된다. 팔이 가렵다, 팔이.
“왜 또 그래? 지금 그런 생각이 들어? 여하튼 수컷들이란.”
잠자리에서 아내의 몸을 껴안는 시늉만 해도 아내는 발끈했다. 딸아이를 이렇게 만든 것이 세상의 모든 남자라는 듯이.
“괴롭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아빠까지도 공범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나는 대거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병원에 있는 소희를 생각해봐.”
아이가 병원에 들어간 지 3개월이 넘어서도, 아직도 성욕 자체를 금기시하는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딸아이를 생각하면 나 역시 무슨 욕망이 생기겠는가.
“알아, 안다고. 남자라는 이유로 너무 몰아세우지 마.”
그러나 수시로 찾아드는 본능적인 욕망은 어쩔 수가 없다. 술집에서 2차를 가든, 안마방을 가든, 대딸방을 가든, 우선 나도 모르게 솟구친 불은 꺼야만 했다. 소희에게 성폭행을 행사한 그놈처럼, 나도 어리디어린 영계를 한 명 사서 밤새 그녀를 괴롭히고 싶다. 두 번, 세 번, 네 번, 아니 열 번이라도 밤새도록 하고 싶다. 세상은 문화라는 허위의 관념을 세워놓고, 욕망을 우회하는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 아닐까. 그럼 나는 내 딸을 범한 그 놈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강간의 욕망은 있다. 나도 만원 지하철에서 어느 중년 부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내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를 신고하지 않았다. 왜, 나에겐 강간당하고 싶은 욕망도 있으니까. 영계를 사서 잠을 자는 나와, 여학생을 강제로 자기집으로 끌고 들어가 폭행한 그놈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하나는 자의적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매매춘, 다른 하나는 타의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성행위. 오히려 찍어야할 방점은 자의냐, 타의냐가 아니라, 욕망 그 자체가 아닐까. 내 딸이 성폭행을 당해 병원에 갇혀 있다시피 한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아빠일까, 남자일까, 동물일까.
노래도 끝나고, 마지막 한 병의 양주도 바닥이 난다. J가 2차를 전제로 실장에게 계산서를 요구한다. 사실 오늘 술자리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만든 자리이긴 하지만 모든 비용을 그들에게 물릴 수는 없다. n분의 1로 하는 것은 이 바닥의 정석이다. 여자들이 밖으로 나간다.
“오빠들, 우리는 밖에서 옷 갈아입고 기다릴게요.”
Y의 파트너가 대표로 말한다.
잠시 후, 실장이 계산서를 들고 들어온다. 실장은 각각 항목별로 금액을 말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총 167만 원인데, 딱 150으로 자를 게요. 세 분이시니까 각각 50씩 긁겠습니다.”
실장의 결론은 이것이다.
“아, 싸다 싸. 살장님 멋져부러!”
J가 그녀를 치켜세운다.
“싸는 것은 언니들 거시기에 하세요.”
실장도 기분이 좋은지 자극적인 농담을 던진다. 우리는 일제히 웃으며 밖으로 나온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이런 식으로 여자를 사다가는 곧 집에 빨간 딱지가 붙게 될지도 모른다. 손을 자르면 발로 한다는 도박도, 결국 욕망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 다. 망해가는 줄 알면서도 인간은 그 불길로 뛰어든다. 그 뒤에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고생을 죽인 범인은 우리 아파트 단지 옆, 주택가에 사는 놈이라고 했다. 2년 전, 이미 아동 성폭행 혐의로 복역을 하고 나온 전과자다. 전자발찌를 채우는 것이 최근 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과거 동일 전과자에 대해서는 소급해서 적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 법리였다. 대신 하루 한 번씩 경찰이 다녀가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를 감시하는 방법으로는 너무도 허술한 것이었다.
여고생은 사건 현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택시 기사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지고 간단한 봉합 수술이 이루어진 후, 의식이 돌아온 아이는 사건 경위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자가 갑자기 칼을 들이대며 가까운 곳에 세워둔 봉고차로 자기를 끌고 가려 했고, 이에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자, 겁에 질린 남자가 칼로 복부를 찔렀다. 방송에서 보도된 것처럼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치근거리며 접근해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제적으로 납치하려 했던 것이다. 말을 마친 여학생은 다음날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이는 급하게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러나 그녀는 검사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내부 장기에 큰 손상이 있어 뱃속에서 출혈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성폭행이 다시 의료 사고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모두 아내가 알려준 것이다. 충분히 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환자 가족들이 병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딸의 죽음에 대해 책임질 것을 요구했지만, 병원 측은 이 정도의 의료사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조금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들이 모두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입구에 서 있다. 술집 여자들은 자신들 이외의 여자들을 민간인이라고 부른다. 자신들을 지하세계의 접대부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상복을 입은 그녀들은, 접대부가 아니라 완벽한 민간인으로 변해있다. 흡사 단체 미팅 후, 각자 파트너를 정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질펀하게 논 것이 한순간에 모두 소거되는 느낌이다.
실장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모텔방을 구하고 있다. 금요일이라 방을 얻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없는 차표도 만들 수 있다 하지 않는가. 실장은 나폴리, 올리비아, 몽블랑, 이렇게 모텔 이름을 알려주고, 콜택시를 3대 부른다. 오랜 노하우를 통해 숙달된 솜씨다.
“몽블랑이 제일 좋으니까 거긴 네가 가라.”
Y가 나를 지목해서 고급 모텔을 밀어준다.
손님, 밖에 택시 와 있습니다. 웨이터가 말한다. 나와 내 파트너는 다른 이들의 어색한 환송을 받으며 현관문을 밀고 나선다. 택시기사가 룸밀러를 통해 내 파트너의 얼굴을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힐끔거린다. 누가 봐도 2차를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나 보다. 할아버지라고 해도 될 만큼 늙은 택시기사의 욕망도 영계를 향한다.
아이는 아빠인 내가 다가가도 발작에 가깝게 몸을 떨곤 했다. 모든 남자를 두렵게 여기는 거였다. 그것은 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아티반ativan이라는 약을 먹여 안정을 시켜야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거나, 아무 데나 기대서 잠을 자거나, 잘 먹지도 않았다. 의사의 얘기로는 항불안제의 부작용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걸 지켜보는 아내는 소금에 절인 사람처럼 짜고 검게 말라갔다.
그 즈음,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현장 검증 같은 의례적인 일들이 지나갔고, 마네킹을 동원해 이루어진 현장 검증에서 나는 미친놈처럼 울부짖었고, 저 새끼 죽여, 죽여 버려, 끝없이 소리를 지르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 중 몇 명이 눈가를 훔쳤거나 말았거나, 경찰이 범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를 떠밀었거나 말았거나, 내가 쓰러져 병원에 갔거나 말았거나, 내 딸은 정신병동에 갇혀 있고, 아내는 점점 작게 쪼그라들고, 나는 점점 얼간이가 되어갈 뿐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느 것을 먼저 혹은 나중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회사에는 이미 한 달 간 연가를 냈고, 이는 쉽게 받아들여졌다. 얼이 나간 사람을 매일 출근시켜서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고통은 익숙해지고, 아무리 충격적인 일도 일상 속에 묻히기 마련이다. 소희는 보름만에 폐쇄병동에서 개방병동으로 나왔다. 약물도 점점 그 양이 줄어들었다. 그전처럼 아빠나 남자 의사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외상의 모든 후유증이 이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아이가 아직도 가끔씩 발작을 한다고 했다. 피아노 소리를 좋아해서 젊은 인턴 의사가 가끔 피아노를 쳐주면, 옆에 앉아 듣곤 했다고.
“그런데 편안히 연주를 듣던 아이가 발작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말씀드렸듯이 아티반을 주사하면 되는데, 이 약물은 오래 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럼 피아노를 쳐주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왠지 아이가 마루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이의 조건 반응을 보는 겁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요. 아이가 주사를 맞을 때, 알코올 냄새에도 심한 회피반응을 보이거든요. 그 경우에도 발작을……. 아마도 아이를 납치할 때 범인이 썼던 클로로포름 냄새와 비슷해서 그런 것 같은데. 제가 피아노를 쳐줄 때 그런 것은 아마 제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향수를 좋아하거든요.”
의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빙긋이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향수병으로 인턴 놈의 머리를 까버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 팔을 자꾸 긁습니다. 피가 나도록. 그러면서 말하죠. 선생님, 제 팔 좀 어떻게 해주세요. 가려워 미치겠어요.”
이제 그는 아예 연극을 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묵묵히 그의 연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범인이 라이터로 화상을 입힌 그 자리가 가려운가 봅니다.”
소희가 화상 자리를 손톱으로 파내고, 정신없이 팔뚝을 긁으며 괴로워했다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부터, 아이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 긴 팔 옷을 입었다. 상처는 가려졌지만 그 속에 아프게 검붉은 속살을 내비치고 있지 않은가. 소희의 마음속에 남은 흉터도 오랫동안, 오랫동안 아이를 괴롭힐 것이다. 내 딸아, 이 아빠를 용서해라.
모텔방에 들어서자, 여자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옷을 벗고, 대형타올로 몸을 감싼 후, 오빠, 나 먼저 씻을게, 라고 말하며 욕실로 들어간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지금 저 욕실에 있는 여자도 소희보다 많아야 대여섯 살 많은 아이다. 어디서나 예쁘다는 소릴 듣고, 또 집에서는 아직도 어리광을 부릴만한 나이다. 나는 갑자기 내 딸을 범한 범인이 된 것 같다.
간접등만 밝혀져 있는 방은 어둡다. 갑자기 욕실문이 열리며 여자가 걸어 나온다. 뒤따라 뿌연 김도 뿜어져 나온다. 여자는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오빠, 뭐해? 빨리 씻어. 안 씻을 거면 옷만 벗고 들어오든지.”
여자가 실쭉하고 웃는다.
나는 옷만 대충 벗고 여자의 품속을 파고든다. 소희를 생각하던 마음은, 이미 발기한 붉은 욕망에 무너져 내린다. 여자 아이의 가슴을 만진다. 이미 젖꼭지는 딱딱하게 서 있다. 나는 가슴 한쪽을 베어 물듯 입속에 넣는다. 여자는 희미한 신음 소리를 흘린다. 나는 미친 듯이 가슴을 빤다. 순간, 입에 뭔가 비릿한 물이 고여든다. 빨수록 더 많이. 아, 이건 뭔가. 여자의 가슴에선 젖이 나오고 있다.
“야, 이게 뭐야? 너 임신했어?”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웃는다.
“왜 말이 없어? 기분 나쁘게!”
내가 다시 정색을 하며 말한다.
“몰라서 그래요? 얼마 전에 아이를 지웠어요.”
“그러면 이렇게 나오나 보지?”
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몸에 좋으니까 많이 드세요. 흐흐”
여자가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린다.
소파 수술을 한 여자까지 상대를 하다니, 나라는 놈은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지금 그녀의 자궁은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생명의 무덤이다. 갑자기 처량하고 서글픈 마음이 고여 든다. 애무를 멈춘 나를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여자의 음부에 손을 가져가 본다. 아직 젖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 같다. 그 입술에 물기를 돌게 한들 무엇하겠는가. 내가 거기를 열고 곪아터진 정액을 쏟아놓은들 무엇하겠는가. 나는 갑자기 성욕이 사그라진다. 여자아이를 빨리 내보내고 싶다.
“야, 그만 가라.”
내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왜, 오빠. 기분 나빠?”
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붙인다.
“아니, 내가 좀……. 안 하면 너도 좋잖아. 안 그래?”
내가 어린 아이를 어르듯 말한다.
“피이……. 모텔방에 들어와 놓고 이렇게 하는 게 더 기분 나쁘다고.”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는다. Y와 J는 지금쯤 격렬하게 여자들의 몸을 탐하고 있을 텐데.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가 갑자기 내 물건을 잡아 자신의 입 속에 들이민다. 아, 이 여자는 자신의 자존심을 채우려 하는구나. 성기는 이제 나무토막처럼 바짝 성이 나 있다. 여자가 머리를 위 아래로 움직인다. 빨리 일을 끝내고 싶다. 그러나 욕망은 쉽게 터져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아예 내 물건을 목구멍 뒤로 넘길 듯이 깊숙이 넣었다 뺀다. 그리고 혀로 귀두를 여러 번 핥는다. 여자는 이런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이 아이는 이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 소희의 검붉은 팔뚝이, 소금에 절인 꽁치처럼 검게 말라가는 아내가, 눈앞에 맴돈다. 눈물이 나온다. 내가 이런 짐승으로 태어난 것이 서럽다. 발정기도 따로 없이 한 평생 욕망에 시달려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괴롭다. 죽을 때까지 대체 얼마만큼의 정액을 쏟아내야, 이 비루한 욕망은 사라질까.
“오빠, 좀 집중해봐.”
여자는 나를 사정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표라는 듯이, 빨고 또 빤다.
밀가루를 뿌린 듯, 뽀얀 그녀의 하얀 등을 쓰다듬는다. 등뼈가 마디마디 만져진다. 우린 어쩌면 아프리카의 어느 초원에서 만난, 등 굽은 영양일지도 몰라. 눈물이 계속 나와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오빠, 울지 마.”
그녀가 동작을 멈춘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에 가슴이 무너진다. 다시 그녀는 내 성기에 입을 댄다. 이제는 혀로 살짝살짝 핥아줄 뿐이다. 사시사철 고름이 흐르는 병든 나무를 그녀가 핥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마워.”
내 입에서 왜 이런 말이 흘러나왔는지 모르겠다.
다시 그녀의 동작이 빨라진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다는 뜻이다. 나도 마음을 집중하려 애쓴다. 귀두산에 사는 고름나무는 또 병든 성충들을 쏟아낸다. 여자가 휴지에 그것을 뱉아낸다. 그녀는 힘들었다는 듯이 한숨을 쉰다. 나는 여자를 살며시 끌어안는다. 그녀는 소롯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모텔을 나가는 여자에게 택시값으로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고, 나도 뒤따라 나온다. 거리에는 짙은 해무가 깔려 있다. 바닷바람은 오늘도 여지없이 자신의 입김을 육지에 부려 놓는다. 나는 짙은 해무를 헤치며 방향도 없이 길을 걷는다. 차도는 안개에 젖어 검푸르게 빛나고 있다. 이따금씩 택시가 지나가며 짧은 경적을 울린다. 아, 이런 날이었을 것이다. 안개가 짙게 깔린 날. 이웃집 여학생은 오늘 같은 날, 한 남자의 칼에 찔려 쓰러진 것이다. 갑자기 팔이 간지럽다. 겉이 아니라 뼈 속 깊은 곳이 가렵다.
안개 입자에서 어렸을 적 퍼먹던 분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혀를 내밀어 본다. 아까 여자 아이의 가슴에서 나오던 젖 맛이 난다. 혀를 내밀고, 팔뚝을 긁으며, 질척이는 안개 속을 걷는다. 혀와 팔뚝 사이로, 길은 어디까지라도 계속될 것처럼 아득하다.
거기는 아침저녁으로 짙은 해무가 고여드는 곳이다. 산허리를 툭 베어내고 도로를 만들었는데, 언제나 해풍은 도로 옆 가파른 절벽 아래로 안개를 부려놓는다.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은 이곳이 도로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안개의 점성을 이기지는 못한다. 사건은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김정남∙1970년생. 200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 200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소설부문) 수혜. 문학평론집 '폐허, 이후', 소설집 '숨결'. 제1회 김용익 소설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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