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0호 (2010년 겨울호) 아트 아티스트/ 강은교
페이지 정보

본문
강은교
겨울 햇볕 외 9편
그림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세상은 그림자들의 이부자리
그대의 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네 무더기의 비듬나물
한 무더기는 노을진 이 저녁을 위하여
한 무더기는 내일 밟을 땅을 위하여
한 무더기는 땅을 안아올릴 손을 위하여
한 무더기는 몹시 아픈 이들을 위하여
내 즙을 내어 그들의 상처에 앉으리.
단가 삼편短歌三篇
붉은 해
여기서 해는 西山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時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冷水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늪
옥황상제가 온다
옥황상제가 온다.
엄마 등에는
四千年 묵은 늪이
황톳물이
묻혔다 다시 묻히는
아아 四千 사내의
떼죽음.
가는 곳
달이 뜬다.
山 넘어 칡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鬼神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동백冬柏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할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봄 무사無事
도시가 풀잎 속으로 걸어간다
잠든 도시의 아이들이
풀잎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빨리
지구로 내려간다.
가장 넓은 길은 뿌리 속
자네 뿌리 속에 있다.
빨래 너는 여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는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소리·9
눈 떠야 하리
시든 꽃대궁에 누운 별빛을 지나서
몸살하듯 내리는 한밤 무서리를 지나서
서슬 푸른 바람 끝
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
거기 맨몸으로
일어서야 하리
녹두꽃은 녹두꽃 마른 허리를 비벼라
담장이는 흰 눈에 풀풀
감긴 머리칼을 풀어라
등에 진 땅이 무거워
엎드려 흐느끼는 돌멩이여
씻어라 진흙구덩이 너의 눈물로
별보다 눈부시게 너의 속살로
강물이 넘어지고 있었네
부서진 모랫벌
곁에서
바위들이 피 흘리고 있었네
하늘가로는
소리 없는 소리들
그림자 없는 그림자들
강물이 자꾸 넘어지고 있었네
우린 빈주머니를 휘저으며 얘기한다 어젯밤 바람벽을 뛰넘은 도둑에 대해서 치통과 자유에 대해서 인터페론과 양도소득세와 자본주의와 영아원과 또는 한숨을 또는 오늘의 시장 경기를 또는 흐린 날씨를 또는 어두워만 가는 숲그늘을 방안에는 듬뿍 드볼작의 심포니 흐르는데 저 피는 얼마짜리죠? 창문의 열쇠를 확인하고 나면 꽃밭에 드러눕는 피 흐르는 눈부신 눈두덩
눈 떠야 하리
한밤중에 부시시 잠 깨는 길처럼
솟구치는 풍랑 위 연꽃처럼
저 혼자 흐르는 건 달빛만이 아닌 것을
달빛에 묻은 어둠만이 아닌 것을
우린 누워 있었어요 가만히
가슴 속엔 결코 냄새나지 않는 흙
고요한밤거룩한밤
기도할 새도 없었다니까요
용서하소서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길 하나가 일어서고 있었어요
치마폭 한아름
널부러진 기침소리들 보채고 있었어요
강 자꾸 넘어져 보이지 않는 땅
안개에 덮여 귓가엔
산발한 구름 치달리는 소리
요리조리 우린 바람 떼를 피하며 걸어간다 아침엔 숭늉에 허기진 배 다스리고 흩날리는 먼지는 싸구려 총채로 잠재워버렸다 언제나 부지런한 시계는 벽장 깊이 감추어 버리고 걸어간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눈물과 눈물 사이로 걸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로 아아 밤과 밤 사이로 아아 땅과 땅 사이로 별일없이 별일없이
눈 떠야 하리
무서리 너부죽한 길이면 길마다
그을음투성이 바람벽이면 바람벽마다
지친 태양 이젠
힘주어 안아야 하리
오랜만에 오랜만에
총총한 빗소리도 데불고
오랜만에 오랜만에
무지개도 어여삐 데불고
초록 거미의 사랑
초록 거미 한 마리, 지나가는, 강가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예쁜, 예쁜, 초록의 배, 허공에 엎드려……
초록 거미 한 마리, 눈물 글썽이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저 잠자리를 보아, 비단 흰 실로 뭉게뭉게 감긴 저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아, 잠자리를 그만 죽여버렸네,
초록 거미 한 마리, 지나가는, 강가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잠자리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초록 거미 한 마리,
예쁜, 예쁜, 초록의 배, 허공에 엎드려……
이제 합치리, 없는 날개로 저 거대한 하늘 가, 또는 강물 속 어디.
허총가虛塚歌·1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靑天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東西南北.
길은 東南西北.
그림자 되어 너.
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
오늘도 수만 잠
헛되고 헛되었으니.
강은교∙1945년 출생.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저서로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초록거미의 사랑', 육필시선 '가장 큰 하늘은 그대 등 뒤에 있다' 외 다수. 시산문집 '젊 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시에 전화하기'. 에세이집 '추억제', '그물 사이로', '잠들면서 잠들지 않으면서', '허무수첩', '사랑법' 외 다수. 역서 K.Gibran의 '예언자', H.D.Thoreau의 '소로우의 노래', 시 동화 외 다수. 현재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추천15
- 이전글40호 (2010년 겨울호) 아트 아티스트/ 고봉준 해설 11.04.05
- 다음글40호 (2010년 겨울호) 미니서사/ 박금산 11.04.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