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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아트 아티스트/ 고봉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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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즙을 내어 그들의 상처에
―강은교 시인의 시세계
고봉준|문학평론가
1.
“모든 존재는 홀로 사라질 수 없다. 함께 연락함으로써 비로소 존재는 이루어지고, 드디어 깊이 사라진다.” 강은교의 두 번째 시집 '빈자일기'에 등장하는 시인의 말이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사람은 혼자 펄럭이고”(「자전․1」)처럼 도시의 일몰을 배경으로 우주 안에 홀로 존재해야 하는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노래하고, “마지막 수레도 보내고 나면/빈 뜰에는 빈 집이 혼자/바람을 기다리고/죽음을 기다리고”(「11월」)라며 가을의 고독 속에서 죽음의 흔적을 읽어내던 시인이 어느 사이엔가 ‘우리’라는 2인칭 복수형을 발화하면서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인 자신이 시집 '풀잎'에서 ‘허무집’과 ‘허무집 이후’라고 구분한 이 변화로 인해서 우리는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자 ‘생명’의 시인이라는 모순적인 존재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녀의 초기시를 읽을 때 우리는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녀의 후기시를 읽을 때 우리는 그녀를 ‘생명’의 시인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허무’와 ‘생명’이라는 쉽게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 그 사이에서 그녀는 꽤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병마와 씨름해야 했고, 사회적으로는 저 80년대라는 불과 혁명의 시대를 건너야 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시적 여정은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한 인간이 원초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고독과 허무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뜨거운 역사와 정치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라는 혹은 ‘나’와 ‘너’의 연결이라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각성을 거쳤고, 마침내 90년대 이후에는 우주라는 거대한 생명의 공간 속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긍정의 의식으로 확장되어 왔다. ‘나’의 개체성에서 ‘우리’라는 집단성과 ‘생명’이라는 원초적인 자리로, ‘허무’에서 ‘민중’의 시대를 거쳐 ‘생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로 확장과 변화를 거듭한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 우주가 하나 되는 그런 생명의 줄, 거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시간 속의 절망이 아니라 긍정이었으며, 니체 식으로 말하면 보다 ‘큰 긍정’, 생명의 둥근 원을 이룬 줄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대담, 「늙지 않는 새벽의 시」, ≪관점21≫ 2001, 9호)
2.
강은교의 시는 허무와 고독을 노래하던 초기시의 세계에서 권력에 의한 생명의 탄압, 문명에 의한 생명의 파괴라는 ‘상처’를 견인하려는 후기시의 세계로 변모해 왔다. 이러한 변모는 시적 대상의 변화는 물론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나 목소리의 변화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되는 바, 그것은 시인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본질과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느냐는 인식의 변화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가령 “여기서 해는 서산西山으로 지는데”(「붉은 해」)에서 드러나는 하강의 이미지나 “아아 사천四千 사내의/떼죽음”(「늪」), “다가가 더러 귀신鬼神을 만나면/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가는 곳」)에서 목격되는 죽음의 이미지는 그의 초기 시들이 허무와 고독에 포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죽음과 고독의 흔적은 두 번째 시집 '빈자일기'에서 “오늘도 수만 잠/헛되고 헛되었으니”(「허총가·1」)처럼 거대한 허무의 세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 '소리집'에 이르면 그녀의 초기시를 지배하던 하강의 이미지들은 사라지고, 대신 생명을 억압하는 일체의 권력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 상승의 의미지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눈 떠야 하리
시든 꽃대궁에 누운 별빛을 지나서
몸살하듯 내리는 한밤 무서리를 지나서
서슬 푸른 바람 끝
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
거기 맨몸으로
일어서야 하리
(중략)
눈 떠야 하리
무서리 너부죽한 길이면 길마다
그을음투성이 바람벽이면 바람벽마다
지친 태양 이젠
힘주어 안아야 하리
오랜만에 오랜만에
총총한 빗소리도 데불고
오랜만에 오랜만에
무지개도 어여삐 데불고
―「소리·9」 부분
이 시는 ‘눈뜸’과 ‘눈감음’, ‘일어남’과 ‘누워 있음’이라는 의미론적 대립이 선명한 계열을 형성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 11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1연, 2연, 7연, 9연, 11연은 ‘눈뜸’과 ‘일어남’에 속하고, 3연, 4연, 5연, 6연, 8연, 10연은 ‘눈감음’과 ‘누워 있음’에 해당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눈 떠야 하리”(1연, 7연, 11연)라는 진술을 중심으로 구분하면 이 시 전체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눈뜸’과 ‘일어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이 ‘눈감음’과 ‘누워 있음’의 상태로 진술하고 있는 부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누워 있음’. 시인은 3연에서 “강물이 넘어지고 있었네/부서진 모랫벌/곁에서/바위들이 피흘리고 있었네”라고 진술하고 있고, 4연에서는“강물이 자꾸 넘어지고 있었네”라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넘어짐’이란 생명체에 가해진 외부적인 억압, 즉 타의에 의해 강압적으로 넘어지는 상태를 말하거니와, 이것은 80년을 전후한 정치적․역사적 현실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눈감음’. ‘누워 있음’이 권력의 폭압에 의해 쓰러지는 몰락의 과정이라면, ‘눈감음’이란 이러한 ‘누워 있음’의 상태를 긍정하는 순응의 태도나, 소시민적인 삶의 안락함에 머물러 있으려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권력을 긍정하는 패배주의적 일상을 의미한다. 가령 시인은 6연에서 ‘우리’가 “어젯밤 바람벽을 뛰넘은 도둑에 대해서 치통과 자유에 대해서 인터페론과 양도소득세와 자본주의와 영아원과 또는 한숨을 또는 오늘의 시장 경기를 또는 흐린 날씨를 또는 어두워만 가는 숲그늘을” 이야기하는 데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드볼작의 심포니”가 흐르는 방안으로 상징되는 소시민적 삶의 태도는 “창문의 열쇠를 확인”하는 작업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그것은 개인의 안락한 삶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순응주의적 태도는 10연에서 “죽음과 죽음 사이로 아아 밤과 밤 사이로 아아 땅과 땅 사이로 별일없이 별일없이” 걸어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것을 통해서 시인은 소시민적인 삶의 태도가 대중에 대한 폭압적 지배를 일삼는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공모관계에 있음을 고발한다.
그렇다면 ‘눈뜸’과 ‘일어남’이란 이러한 순응주의적 자세와 패배주의적 도피에서 벗어나 정치적 현실을 정시正視하고, 궁극적으로는 대중이 역사와 정치의 주인임을, 그리하여 죽임을 일삼는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눈뜸’과 ‘일어섬’이 1연에서는 “서슬 푸른 바람 끝/새벽과 새벽이 맞닿은 곳/거기 맨몸으로/일어서야 하리”처럼 “누운 별빛”과 “한밤 무서리”를 지나는 극복에의 의지로, 7연에서는 “한밤중에 부시시 잠 깨는 길”과 “솟구치는 풍랑 위 연꽃”처럼 ‘잠’과 ‘풍랑’이라는 외적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것으로, 11연에서는 “지친 태양 이젠/힘주어 안아야 하리/오랜만에 오랜만에/총총한 빗소리도 데불고”처럼 껴안음과 함께함(‘데불고’)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집합적 운명의 발견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김수영의 ‘기침’이 부정한 현실에 대한 각성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강은교의 ‘눈뜸’은 권력 앞에서 쓰러지고 누워있던 것들이 거대한 생명의 물결을 이루어 일어서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재와 폭압으로 얼룩진 70∼80년대의 정치사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눈뜸’과 ‘눈감음’, ‘일어남’과 ‘누워 있음’, ‘죽임’‘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저항에의 의지는 생명을 짓밟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힘과 생명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항‘의 논리는 이미-항상 권력의 선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역사적 국면에서는 권력에 대한 저항 권력이라는, 부정에 대한 또 하나의 부정이라는 딜레마를 낳게 된다. 우리는 저항 권력이 또 하나의 폭력적인 권력으로 바뀌는 장면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거니와, 부정적 에너지에 의해 지배되는 이러한 저항이 생명의 본원적인 논리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그런 까닭에 강은교의 「소리·9」는 생명담론의 맹아를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90년대 이후 그녀의 시가 보여준 풍요로운 생명의 세계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3.
1990년대에 출간된 강은교의 시집들, '벽 속의 편지'(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는 거대담론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속에서 ‘일상’과 ‘생명’에의 관심으로 서서히 선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90년대 초반에 출간된 시집들에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라는 지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그러한 시편들이 이 시기 그녀의 시에서 지배적인 목소리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시기 강은교의 시는 역사적․정치적 상상력에서 벗어나 한편으로는 ‘일상’의 가치를, 또 한편으로는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는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지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빨래 너는 여자」 전문
인용시 「빨래 너는 여자」는 시인이 ‘일상’에 부여하는 의미가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상’은 반복, 즉 습관에 의해 지배되는 시간이다. 90년대 시에서 ‘일상’은 거대담론의 몰락이 가져온 방향성의 상실과 혁명이라는 집단적 욕망의 불꽃이 사그라든 폐허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대한 발견이라는 맥락을 지닌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빨래를 너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그러한 사인私人의 욕망의 흔적을 배제하고 있다. 오히려 시인은 빨래는 너는 지극히 일상적인 노동 행위를 ‘무용’이라는 예술 행위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술’이 의미하는 바는 조화로움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거는 여자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몸짓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여자의 그런 모습이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조화로움, 그러니까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이라는 배경이다. 평화로운 대낮의 한때를 그린 한 점의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평화롭고 여유로운 여자의 빨래 너는 모습에서 시인은 일상이라는 새로운 가치의 영역을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조차 ‘구름’을 들고 가는 것처럼 평화롭게 감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우리는 멀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그대의 들」 부분
이 시의 핵심은 ‘나’라는 김수영의 진술을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되받아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으냐’라는 김수영의 ‘한탄’을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라는 ‘감탄’으로 변주하는 데 있다. 평생을 자신의 소시민적 근성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데 매달렸던 김수영은 항상 비판의 대상을 자신으로 설정함으로써 ‘적으냐’라고 한탄했다. 그러므로 김수영에게 ‘적으냐’는 곧 크지 못함에 대한 불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반면 강은교는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처럼 ‘하찮은 것’의 중요함에 대해 말한다. 작은 것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 권력의 문제도 결국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격렬한 충동이 아니라 미시적으로 행해지는 일상적 행위의 층위에서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몸부림”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원리 또한 본질적으로 작은 것이라는 발상이 이 시를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모든 미시적인 것들의 중요성과 생명의 작음에 대한 깨달음이 함축되어 있다. ‘생명’이란 실상 거대한 것의 원리가 아니라 작은 것의 원리이며, 작은 것을 부분으로 간주하는 전체의 논리가 아니라 작은 것이 그 자체로 전체라는 비전체의 전체성 논리이다. 생명의 논리로 보면 홀씨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 있는 법이다. 비록 이 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러한 생명의 원리에 대한 자각은 이후 강은교의 시에 깊이 각인될, 아니 “모든 존재는 홀로 사라질 수 없다. 함께 연락함으로써 비로소 존재는 이루어지고, 드디어 깊이 사라진다.”라는 관계론적 인식이 마침내 생명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4.
2000년대 이후 강은교의 시적 관심은 ‘생명’과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공동체적 운명에의 자각이 「우리가 물이 되어」처럼 분단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생명․평화에의 관심으로 확장되고, 마침내 시가 개성의 표현이라는 개인적 범주에서 벗어나 현대문명에서 발원한 상처를 치유하는 시대적 소명으로 인식되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90년대 후반부터 강은교 시가 지나온 여정이다. 물론 '초록 거미의 사랑'(2006)을 관통하고 있는 ‘사랑’의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너’의 부재라는 개인사적 맥락과 연결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녀의 시의 깊은 울림은 오히려 그러한 개인적 체험의 언어들이 한층 더 보편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시는 현대적인 징후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모더니즘적 경향과 갈라진다.
초록 거미 한 마리, 지나가는, 강가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예쁜, 예쁜, 초록의 배, 허공에 엎드려……
초록 거미 한 마리, 눈물 글썽이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저 잠자리를 보아, 비단 흰 실로 뭉게뭉게 감긴 저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아, 잠자리를 그만 죽여버렸네,
초록 거미 한 마리, 지나가는, 강가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잠자리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초록 거미 한 마리,
예쁜, 예쁜, 초록의 배, 허공에 엎드려……
이제 합치리, 없는 날개로 저 거대한 하늘 가, 또는 강물 속 어디.
―「초록 거미의 사랑」 전문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하다. 제목이 ‘초록 거미의 사랑’이니 먼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겠다. 이 시의 핵심적인 사건은 초록 거미가 자신이 사랑했던 잠자리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사랑하는 잠자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초록 거미가 “거대한 하늘”이나 “강물 속”에서 “없는 날개”로나마 잠자리와 하나가 되려는 불가능한 꿈을 열망하는 연시戀詩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랑’은 자신의 욕망이 사랑하는 대상의 비극적인 죽음을 불러왔다는 자책감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사랑’이 타자의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가는 문제가 해명되어야 한다. 그것을 비단 개인의 욕망이라는 이기심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경우 잠자리와 완전한 하나가 되려는 초록 거미의 사랑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초록 거미의 사랑과 하나 됨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 생명의 관점에서 생태계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이며,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연속적 과정이다. 초록 거미와 잠자리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사랑의 관계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명의 관계에서 하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자연적 질서의 일부이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연적 질서, 그렇지만 ‘죽음’이 갈라놓은 두 생명체가 죽음이라는 유한한 생명의 운명을 초월하여 자연 속에서 다시 하나가 되려는 의지가 바로 이 시의 세계상인 것이다.
시 「네 무더기의 비듬나물」는 ‘사랑’과 ‘생명’의 마음으로 씌어진 ‘시’가 궁극적으로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비듬나물을 “노을진 이 저녁”, “내일 밟을 땅”, “땅을 안아올릴 손”, “몹시 아픈 이들”에게 전해주려 한다. 이 대상들은 생명의 우주와 그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체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밝혀주는 미래라는 시간상이다. 특히, “한 무더기는 몹시 아픈 이들을 위하여”라는 진술은 자신의 시가 고통과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균열된 마음을 치유하는 데 바쳐지기를 희망하는 시인의 기원을 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즙’)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는데,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추구는 시 치료라는 그녀의 관심과 연결된다. 흥미롭게도 시인은 ‘나’의 상처보다 ‘그들’의 상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타인에의 관심을 이타주의라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인은 ‘그들’의 상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우주 안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우리’라는 교환과 관계의 그물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를 먼저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그 타자라는 그물을 경유할 때라야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관계론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은교의 시세계가 「빈자일기」의 서두에 등장하는 한 문장으로, 아니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그녀의 대표작에서 기원하여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유이다.
고봉준∙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이 있음. 고석규비평문학상 수상. 현재 반년간 ≪작가와비평≫ 편집동인. 계간 ≪딩아돌하≫ 편집위원. 웹진 ≪문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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