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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010년 겨울호) 집중조명 해설/이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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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58회 작성일 11-05-1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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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은 오늘도 시를 기다린다 
―김서은의 신작시를 중심으로
  이경재|문학평론가



1. 구축의 세계
김서은의 시는 철저한 구축의 세계이다. 그것은 꽃이나 나무 등을 상정하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고전적 규율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시학을 보여준다. 구축의 대상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도시, 기호, 산, 대화, 농담, 동네, 혀, 시간, 우울 등이 모두 구축의 대상으로서 새롭게 조형된다. 김서은은 철저하게 감각에 의지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그가 구축해 낸 새로운 감각을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때의 체험이란 추체험이나 재체험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김서은에 의해서 창조된 그야말로 날 것이다. 
시는 정념과 이성의 조화에 의해서 탄생한다. 시는 이성이 정념에 질서를 부여하거나, 정념이 이성에 파토스를 부여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둘 사이의 균형이 깨어졌을 때 시는 탄생할 수 없다. 정념이 독주할 때, 그것은 하나의 외침이 된다. 이성이 독주할 때,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말덩어리가 시이고자 한다면, 정념과 이성의 조화와 균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제 그 현기증 나는 조화와 균형 속으로 여행을 시작해 보자.  

2. 폭력배와도 같은 기호, 언어, 詩
먼저 「기호에 관한 또 다른 오해」를 살펴보자. 이 시가 김서은 시의 최고봉이라거나 특별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이 시에는 그가 생각하는 기호, 언어, 시에 대한 입장이 압축되어 있다.  

그들은 한패거리죠 한 어깨씩 한다고 할까요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눈자위를 번뜩이며 무엇을 찾는지도, 골목 어귀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기도 하고 바람의 끝자락을 붙잡기도 하지요 그들은 마구 뒤엉켜 있는 듯 보이지만 혼자서도 혼자 놀기에 진수를 보이죠 시도 때도 없이 펀치를 날리면서 잠깐씩 무표정했다가는 단순하게 마침표를 찍기도 해요 세 번째 문장 끝에서 오랫동안 눈물을 글썽이던 까닭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디까지나 우리는 사적인 관계이니까요

패거리들이 내 손발을 묶어놓으려 했어요 온갖 것들로 널브러진 내 안과 밖은 너무 복잡했으니까요 처음이자 맨 나중 인사법을 늘 중얼거리고 있었답니다 한때는 패거리들과 뒤엉켜 허공에서 허공을 연결하는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 몸이라고 생각했어요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나 오물거리는 입술을 어디에 숨겨야 하는 걸까요 번번이 그 패거리들을 지겨워했지만 사로잡히길 원한 적도 있어요 기우뚱 쏟아지는 말의 꼬리들을 어떻게 붙잡겠어요

1연에서 기호들은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조명을 받는다. 이 때의 기호들은 일종의 폭력배에 비유된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세상을 질주한다. 그것의 원초적 힘은 대단하여 “시도 때도 없이 펀치를 날”린다. 이것은 김서은이 생각하는 시의 이상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쉽사리 재현과 표상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혼자 놀기에 진수를 보이”는 기호들이다. 무엇보다 그 기호는 공적인 관계를 거부한다. 모든 독자들의 호흡 속에서 그때그때 새롭게 탄생하기를 열망하는 존재들이다.
2연에서 기호들은 시인과의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존재로 부각된다. 시인에게 있어서도 기호는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기호들은 “내 손발을 묶어놓으려” 하며, 이로 인해 화자는 “말의 꼬리들을 어떻게 붙잡겠어요”라며 절망의 몸짓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김서은 시인에게 기호는 시인과 독자 모두에게 쉽게 포획될 수 없는 무정형의 흐름인 것이다. 이 때의 기호는 언어와 시로 확대될 수 있다. 김서은은 언어의 그 물신화된 힘을 깊이 자각하고 있으며, 그의 시들 역시 결코 단일한 의미로 포획되지 않는다. 김서은 시인의 시를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그녀가 애써서 구축한 이미지들의 정교함과 그것이 가끔 던져주는 정념에 가만히 몸을 싣는 것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한 수 배운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무딘 언어로 시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 따위는 김서은의 시와 만나는 최하의 방법이다. 독자들이여! 그저 읽어라. 느껴라. 그리고 단호하게 떠나라.

3. 산 그림자를 거느린 도시의 검은 태양 
김서은의 시는 자연과 농촌에 기반한 전통적인 서정시와는 그 모태가 다르다. 그녀의 시는 대체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때의 도시는 「광합성 도시」라는 시처럼 암울한 통제사회를 연상케 한다. 

그래 오늘
이 골목을 습격하리라
말랑한 구름이 딱딱한 밥 같이 굳어가는 

불 꺼진 상점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날아오르곤 하지 나는 갈갈거리다 갑자기 숙연해지기도 해 달아오른 열기 속으로 취한 목소리들이 흘러다니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꼬리를 문 그림자들이 뜯어먹기도 해 도시는 점점 뾰죡해졌어 흐릿해진 풍경 속으로 고장난 시계가 제 몸을 콜라쥬처럼 뜯어 던질 때마다 공중에서 폭파되는 머리통들, 헬륨풍선 같았지 검게 탄 햇빛 밖에서 미래의 홀로그램이 켜졌어 붉은 벨벳이 펼쳐지곤 했어 미래의 나를 생포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작동 중이었던 거야 간절한 눈빛 하나씩 목매달아 놓고 말이지 나는 나로부터 탈출을 해야 했어 그런데 눈빛 선명한 저 비상벨을, 비상벨을 어디에 감춰야 할까 껌딱지 들러붙은 골목 끝에서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면서 털 빠진 개같이 검은 햇빛 속으로 미끌어져 볼까나

이 시는 제목이 담고 있는 생명의 느낌과 실제 시가 담고 있는 종말의식이 묘한 극적 대비를 이루며, 주제의식을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습격”, “일그러진 얼굴”, “삐걱거리는 계단”, “고장난 시계”, “폭파되는 머리통들”, “털 빠진 개” 등은 이 도시의 어둡고 절망적인 느낌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표현들이다. 이 시에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미래의 나를 생포하기 위한 플그램이 작동 중이었던 거야”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주체는 완벽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강력한 감옥에 갇혀 있다. 탈주를 향한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도시 밖은 없다. 동시에 「광합성 도시」에는 내일도 없다. 철저한 통제 속에서 화자는 그저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통제와 억압 속에서 화자는 결국 “털 빠진 개같이 검은 햇빛 속으로 미끌어져 볼까나”라며, 탈출 대신 절망적인 한탄으로 시의 출구를 닫는다. 이 시 속의 ‘검은 햇빛’은 광합성이 환기시키는 생명력 넘치는 세상을 한순간 잿빛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절망의 파토스는 김서은 시의 주조를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김서은의 시는 도시를 그 모태로 하여 창작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뭐 대수란 말인가? 아스팔트에서 태어나, 아스팔트에서 술과 담배를 배우고, 아스팔트에서 사랑과 이별을 한 세대에게 이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이다. 김서은의 ‘도시’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영성 가득한 과거의 산그림자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사용된 ‘산그림자’라는 단어를 읽는 방법은 ‘산’이 아니라 ‘그림자’에 방점을 찍으며 읽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서 산은 전통적인 서정과 상상력의 세계에서 상상되는 우주의 근원 혹은 생명의 온축 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 산이 거기 있다」는 김서은에게 있어 자연의 존재방식과 그것과 관계 맺는 시인의 고유한 특징을 보여준다. 

산이 우는 걸 본 사람이 있다 그의 눈자위 늘 붉다 빗소리 차오르는 방 어둠을 한 겹씩 입는 손끝이 어눌하다 모르스 부호 같은 사막을 건너왔을까 바튼 숨소리가 모래 폭풍 속으로 흩어진다 옹크렸다 편 손바닥엔 한 뼘 우주가 또아릴 틀고 있다 길이 가물거린다 깊게 패인 웅덩이 속에 거꾸로 누워있는 아버지의 산, 아이의 발목을 아슬아슬 잡고 있다  

이 시에서 산은 “우는” 존재이다. 위의 시에서 산은 의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이 산은 과거와 현재, 초월과 일상의 중간적 존재이다. “모르스 부호 같은 사막을 건너왔을까”나 “손바닥엔 한 뼘 우주가 또아릴 틀고 있다”와 같은 표현에서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산의 원형적 이미지와 의미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렇다면 이 산은 왜 눈자위가 붉도록 울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산을 둘러싼 현재의 조건 때문이다. 현재 산은 “깊게 패인 웅덩이 속에 거꾸로 누워있는 아버지의 산, 아이의 발목을 아슬아슬 잡고 있다”고 묘사된다. 우주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신성한 산은 과거의 산, 즉 아버지의 산일 뿐이다. 이토록 숭고한 과거와 달리 오늘의 산은 아이의 발목을 잡은 애처로운 형상이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김서은의 시가 깊이를 확보하는 것은 이러한 대목에서이다. 단순하게 도시적 풍광과 그 어둠을 응시하고 나열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그것이 담고 있는 과거로부터의 메시지까지 읽어낼 때, 도시적 어둠은 더욱더 섬세한 하나의 결을 형성하게 된다.

4. 우울증에 걸린 너스레와 농담 
이처럼 ‘산’의 잔영만이 남아 있는 황폐한 도시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까? 그 산을 대신할 만한 무언가가 김서은에게는 준비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시인은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고 그만큼 절망적이다. 이와 관련해 김서은이 선택한 전략은 목소리를 높이는 계몽주의자의 근엄한 포즈가 아니라 자신의 온 몸에 상처를 입혀 궁극에는 세상을 깨우치는 매저키즘의 방식이다. 그것은 작품 속 인간들의 관계 맺기 방식에 압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분명 만나고, 말을 하고, 손을 내민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은 ‘너스레’와 ‘농담’이다. 수다스럽게 떠벌려 늘어놓는 말이나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을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기본적인 방식인 것이다.  

너스레를
너스레를 떨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1월의 폭설은 쌓이고
세상의 모든 오른손들이 화톳장을
뒤집듯이 어제와 어제 사이를 부인하지 
입으론 진실을 말한다지만
―「너스레 공방전」 

한 다발의 꽃을 안고 간다 햇빛과 어둠이 내 몸을 통과하는 동안 휘감는 바람 갈기를 밀어내면서 잠깐씩 무표정하거나 비관적 포스로 무릎을 꿇으며 꽃을 던진다 툭, 터지는 폭소들 양은냄비 속에 끓는 면발 같다 창밖으로 우리들의 오후가 킁킁거리고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당신의 립싱크가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갑자기 냉담해졌다 한때는
―「농담, 우리들의 식탁에 대하여」

화톳장을 뒤집듯이 어제를 부인하며, 거짓으로 가득 찬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 그것이 김서은이 바라본 지금 세상의 사람들 모습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말은 진심과는 거리가 먼 “립싱크”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며 거짓을 연출할 때, 그리하여 서로에게 서로는 황량한 사막으로 현상된다. 

잠들지 못하는 나의 노래를 들려주려 하네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바람이 많아지고 그대의 사막을 건너려 하네 이름 없는 꽃들이 속눈썹을 적셨겠지 컵을 흘러넘치는 저 물알갱이들은 어디로부터 몰려왔을까 몰려온 골짜기 협곡마다 깃털을 접으며, 한때는 우리가 아름답게 헝클어졌다고 생각했지 아무 곳에도 내려놓지 못하는 나를, 집중적인 소모의 방식으로 달려가는 나를, 검은 새는 날아오르고 꿈에서처럼 오늘의 세계는 한 페이지 저물어가고 있었네 내 이마는 한 겹 얇아지고 슈가 프리 라떼를 홀짝거렸던가 책을 펼치고 마티니를 마셨던가 위그르 사막 어디쯤일까 뜨거운 행간 속으로 모래폭풍이 휘몰아쳤어 해답을 읽을 수 없는 도발적인 그대의 무심한 곡조 같이 머리칼 흩날리고 나 지금 광활한 그대의 사막을 건너려 하네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바람이 많아지고」

시적 화자는 한때 당신과 “아름답게 헝클어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착각일 뿐이고, 아직 그대의 비의의 끝자락조차 잡은 적이 없다. 화자는 다만 조심스럽게 머리칼을 흩날리며, 아직도 황량하게 남아 있는 사막을 건너려 할 뿐이다. 「혀의 이동 경로」에서 서로 엇갈리는 인간관계는 “그가 오른손을 내밀 때 난 왼손을 감춘 채 목인사만 했을 뿐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상의 「거울」에 등장하는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라는 표현의 패러디이다. 소통불가에서 오는 정념이 너무나도 완강하게 주체를 압도했기에 시적인 질서가 외부에서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그는 “오호츠크 해협을 건너왔다”고도 하고 “마른 안개 잡목 숲을 헤치며 왔다고도 했”다. 이토록 어렵게 이루어진 만남이지만, 결코 그들은  두 손을 마주잡지 못한다. 그와 손을 잡기에 ‘나’가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나 암울하고, 나 역시 무엇 하나에도 의지할 수 없다. 이제 김서은은 아래의 인용처럼 우울과 절망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거기, 안개 숲이 있다 아니, 없다 그 숲속에 바람이 솟구친다 나는 거기 없다 아니, 있다 이리저리 붙잡힌 발목들만 나뒹군다

거기, 안개 숲이 있다 안개 숲속에 머리카락이 솟구친다 하얀 비가 쏟아진다 회오리가 덮친다 하얀 안개비가 걸어온다 뱀 같은 길, 주름투성이 얼굴들이 고개를 빼죽거린다 하얀 뿌리를 더듬으며 날개를 퍼덕인다

숲을 가둔다 
안개를 가둔다
비를 가둔다

머리카락을 풀어놓았다
검은 자루가 미끌어졌다
축축한 몸뚱이가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 저자 마리 아넷 브라운의 호르몬의 변화로 몸이 슬픔에 빠진 현상
―「body blues*」

김서은은 재현보다는 구축을, 서정보다는 감각을, 희망보다는 절망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노래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하기에 그녀의 시와 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그녀가 쏟아놓은 말의 꼬리를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헛소리다. 그런 면에서 김서은은 언어의 폭력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녀의 폭력은 분명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윤리적인 그리하여 너무나도 오래되고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을 향해 파괴의 바이러스가 되고 있다. 힌두교의 세 주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Śiva는 역설적으로도 파괴와 생식을 동시에 관장한다. 어찌 시바만이 그러하겠는가? 모든 파괴와 모든 탄생은 본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김서은이 앞으로 보여줄 구축, 감각, 절망의 창조를 애타게 그려본다.

이경재∙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현대소설의 구조와 미학'(공저). '어문학 연구의 넓이와 깊이'(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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