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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2010년 겨울호)/신작시/오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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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옥
오, 봄날 외 1편
어린 것들 타지로 떠나보낸 뒷적막을 못 견디겠는지 씨 좀 사다 심자, 노모가 조르신다 문구점에서 오백 원짜리 씨앗 두 봉다리 사서 나오며 다소곳한 알갱이들 설마 싹을 낼까 싶어 흔들어본다 거기, 지난날들 봉함되어 있다
온몸으로 받아두고 싶었던 이슬이며 일생을 반으로 나눠 갖자며 돌진해 오던 천둥번개, 뒤를 밟아온 첫서리까지…… 입을 다물었다
작은 씨앗들에 이끌려 갈 날들에 슬쩍 기대본다 물 묻은 채송화씨처럼 곧잘 울 것이며 마른번개와 소낙비에 흠씬 두들겨 맞을 거다 누군가 곱게 쓸어놓은 마당처럼 견디다 내 관심 밖으로 날아가던 날개 고운 비단벌레 한 마리, 무성한 여름을 함께 살아보자, 붙들어도 볼 거다
남은 배 열두 척*
―명량鳴梁에서
단돛으로 깊은 굴헝을 빠져나온 목선 하나
반파된 채 흔들립니다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부는* 날들,
지독하게 살아있는 비린내를 두고오려
땅 끝을 지나 연육連陸의 다리를 건넙니다
어머니 당신 곁에 마른 물고기 한 마리로 누워봅니다
이십 리 밖에서도 들리는 바다의 곡哭소리를 따라와
울음 길어진 저녁 새의 마중을 받습니다
적처럼 어두워진 바다는
어딘가로 자꾸 가고 싶은 지체들을 붙들어
손가락, 발가락 섬으로 꿈틀거리게 하고
그들 대신 방향을 틀다 갈 길을 잃었는지요
바다의 울음보가 명량鳴梁에서 터집니다
문을 걸어 잠거도 쳐들어오는 푸른 울음소리는 누구인가요
솟아오르다 무너지는 소리,
나보다 먼저 울고 나중까지 뒤척이는 바다에
돌아앉아 어머니 켜켜이 소금을 얹으십니다
그 옛날 남은 배 열두 척* 바다를 가리키며
만신창이 날들 살려내자 하십니다
꿰매고 기워놓은 배들의 항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깟 마음 하나,
물살에 가라앉혀 오래 우는 섬이 된다 한들
어머니, 날마다 울며가는 명량만이야 하겠습니까
*진도 벽파진에 세워진 ‘충무공벽파진전첩비’ 내용에서 빌어씀.
오춘옥∙198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뒷모습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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