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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2010년 겨울호)/신작시/이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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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민
그리움은 지문을 남긴다 외 1편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숨어들어온
비릿한 갯내음이 몸을 푸는 자정
렌즈에 끌려온 개펄을 펼치자 방안은 삽시간
사방무늬 새들의 발자국과 물결무늬가 아우성이다
바다 귀퉁이에 등을 대고
아우성을 먹어치우는, 고양이 눈알이 박힌 거울에서
한 다발의 파도가 일렁인다
소금기에 절여진 파도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밤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 밝은 거울 속 파도가
말문을 닫고 있던 한 시절을 끌어올린다
외포리 개펄보다 더 질척한 내속의 뻘밭에
백년의 울울한 숲처럼 빽빽이 찍힌 너의 지문
바위에 새겨진 금언처럼 선명하고
탑을 쌓듯이 공손한,
개펄에 찍힌 지문과 울음이
새들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래 무리지어 날던 새들도
헤어짐이 무서웠을까
한 곳으로 모이는 발자국들
방안은 금세, 살아서 퍼덕이는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벗는다는 것
잠시 다니러 온 노모의 몸을 씻기려 옷을 벗기는데
한사코 벗지 않으려는 완강함에 비지땀이 흐른다
접질린 팔 하나로 어떻게 혼자 씻으려 하는지
늙은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것이 이토록 힘이 드는데
남자들은, 집에 있는 여자 밖에 있는 여자
팔팔한 여자 나이든 여자 벗길 수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잘도 벗기고 어루만져, 그 덕분에
지구는 지금까지 만원사례로 잘 보전되어 왔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벗었고
그녀와 내가 벗었고
잘 벗었을 때 평화가 찾아들더라
여자와 남자가 잘 벗었으므로
지구는 내일도 무사할 것이다
그러나 벗는 것이 두려운
팔순의 꽃 진 자리에
지구의 그늘 한 자락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그늘 속으로 낡은 집 한 채 걸어 들어간다
이채민∙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기다림은 별보다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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