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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010년 가을호) 신작시/이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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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헌
Spiral Galaxy*의 법칙 외 1편
돌고 도는 것은 없네 돌아서 제자리에 오는 것도 없네 있다면 그것은 곡선으로 전진하는 것 내가 당신 주위를 돌며 지나새나 당신의 그림자를 밟는 일이나 뒷집 거세된 수캐가 킁킁대며 앞집 담벼락을 도는 동안에도 기억 속에 떨어뜨린 손목시계는 쉬지 않고 돌고 추억 속으로 사라진 레코드판도 어디선가 돌고 있을 테지만 지금의 시계소리는 그날의 시계소리가 아니고 지금의 노랫가락은 그날의 노랫가락이 아니네
들어 보았나 당신 저 아득한 은하로부터 광속으로 날아온 달팽이 한 마리 제 태어난 세상을 제 집의 형상으로 삼고 우기의 길목마다 오물오물 비밀을 발설하는 달팽이 아무도 그려본 적 없는 태초의 내력을 온몸에 새긴 채 밤마다 은밀하게 천기를 누설한 죄로 지상에서 가장 느리게 몸을 밀어야하는 달팽이 수컷도 아니고 암컷도 아닌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중립의 경계만이 목숨을 지탱하는 시간
산자락을 돌면 아직도 녹슨 안테나를 세우고 당도할 수 없는 그리움을 수신하는 달팽이가 있네 제 한 몸 제 살아가는 집처럼 둥그렇게 말고 한없이 느리게 느리게 밥그릇을 비우는 달팽이가 있네 밤이면 푸른 달빛 아래 다시는 전향하지 않을 유언을 남기고 구만 광년 먼 하늘로 돌아갈 날 기다리는 달팽이가 있네 그러나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돌고 도는 것은 없네 돌아서 제자리에 남겨지는 것도 없네 있다면 그것은 소멸하며 회오리치는 그리움의 잔해일 뿐
*Spiral Galaxy: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소용돌이 팔이 뻗어 나와 있는 나선 은하.
벼랑 위의 낮달
제비가 집을 짓는다
변산반도 민박집 처마 아래
제비가 집을 짓는다
‘서해민박’이라 쓰인 견고딕체 간판 위에
제비가 집을 짓는다
‘서’자도 아니고 ‘해’자도 아닌
‘민’자 건너 머무를 ‘박泊’자 위에
제비가 곰비임비 방점을 찍는다
초여름의 땡볕이 등줄기에 쏟아지는 오후
갯바람도 개 혓바닥처럼 헉헉대는 산기슭
제비는 제 침을 퉤퉤 뱉어 뭉친 흙으로
잠시 머물 토담집을 짓는다
난생처음 지어보는 집
한철 쓰면 비워줘야 할 벼랑 위의 집
한 번 떠난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간밤 파도와 깡소주 퍼대다 일어난 민박집
제비가 온종일 낮달을 찍어 나른다
허공에서 완성되어가는 저 반달 같은 집 한 채
아니, 반쪽짜리 내 방 한 칸
이용헌∙광주光州 출생.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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