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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010년 가을호) 신작시/이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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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2회 작성일 11-03-1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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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욱
구슬 외 1편


도무지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멀쩡하게 살아남았을 때 구슬은 굴러온다 죽었다 깨어나도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멀쩡하게 살아남아 구슬은 굴러오는 것이다 문득 작은 구슬 몇 개가 발끝으로 굴러왔으나 모두 투명한 구슬이었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은 보이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순간은 그 소리만이 아프고 선명하다 어딘가 금이 간 얼굴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을 때마다 구슬은 그렇게 굴러온다 나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뒤이어 수백만 개의 크고 작은 구슬들이 굴러오기 시작한다 이번 생은 어쩌면 그러한 구슬들의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눈을 뜨면 이유 없이 하나 둘씩 무너지는 세계다 눈을 감으면 일제히 달려오는 구슬들이 있다

 

 

 

 


지구에서


낮달은 공터의 플라이 볼
허공 한 구석 하얗게 떠오른 타구에는 정점이 없다

변두리의 오후는 텅 빈 구장처럼 고요하다
그 와중에도 굶주린 입들은 뛰어다니지만
와아아 이내 구름 속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아우성
지나가고 나면 한결 더 고요해지는 그곳은
언제나 가장 깊숙한 지점

거기 그늘에 묻힌 고개를 들면
눈앞은 서늘하게 열려있고
그것은 언제나 슬픈 정면이다
누구나 외야수가 되는 그런 순간에 대하여
혹은 그럴 때마다 마이 볼 마이 볼
습관처럼 속으로 번지는 목소리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토록 평범한 야구!

단언컨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공터와 허공 사이에
커다란 공 하나가 떠있을 뿐
눈을 감았다 떠도 비껴가지 않는 그것은
언제나 슬픈 정면

때로 무언가 유심히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글러브를 가지고 있어
말하자면 지금 공터에 피어난 꽃들도
오래 전에는 누군가의 글러브였으니
하염없이 기다리면 알 수 있을까
역전이 없다는 것
되돌아갈 벤치가 없다는 것
외야수의 오후는 그래서 침착하고
두근거리는 관중들도 더 이상 자리하지 않는가
적어도 우리 생에 낮달이 떠 있는 동안은
그러한가?

상념은 눈부시지 않은 경기
다만 우리는 오래오래 단물 빠진 꿈을 씹으며 늙어간다
또는 각자의 제자리에서
불현듯 찬란한 계절의 진행을 잊기도 한다
이토록 평범한 야구
평범한 야구
머지않아 모두가 일제히
외야수가 되는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실로 평범한 팀이 되겠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은 홀로 서서 낮달을 마주할 때!
  저기 날아오는 마이 볼이
  마이 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믿을 수 없는 다이빙이나 점프가
  우리의 야구를 반드시
  어떠한 미래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슬픈 정면이다
스쳐가는 예감으로도 알 수 있다
그때마다 고요해지는 규칙과 질서들
더욱 평범해지는 야구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고독이 자리한
가장 깊숙한 지점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전히 정점이 없는 플라이 볼과
앞으로도 정점이 없을 플라이 볼
그 주변으로 서늘하게 열려있는 오후의 허공
그리고 어떤 승패 같은 것들


이선욱∙2009년 ≪문학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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