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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계간평/ 흐름 진단 시/ 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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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1건 조회 2,460회 작성일 11-03-25 14:50

본문

|흐름 진단/시|
외래어 물신의 스펙트럼, 그 회고와 반성
장이지|시인

 

∙유형진,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액자의 세계」(≪현대문학≫, 2010년 5월호)
∙이제니, 「양의 창자로 요리한 수프로 만든 시」(≪리토피아≫, 2010년 여름호)
∙황병승, 「벌거벗은 포도송이」 부분(≪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
∙박희수, 「라이트Light―가벼운 빛」 부분(≪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

1. 머리말
등단할 무렵(2000년) 내게는 시를 쓸 때 소재 면이나 시어 면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 것이 있었다. 당면 현실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선배들의 시를 보면 좀 안일하다 싶을 정도로 똑같은 것만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비판적인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손쉽게 외래어를 좀 써보기도 했는데, 그 외래어란 것은 선배들의 시에서 보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써놓고 스스로 흡족해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없는 노릇이었는데, 그래도 그러한 치기가 내가 지난 시절에 썼던 시의 한 개성을 굳혔던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전혀 없지는 않다.
최근 시의 외래어 물신 현상도 대개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의 소산이라고 보고 싶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 정도라면 머지않아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도 시를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될 때도 있다. 외래어 편향이 황병승을 비롯한 몇몇 시인에게서 성공을 한 뒤로 일종의 패션이 된 감이 있다. 이제 슬슬 선배들의 외래어 편향을 보면서 모국어를 새롭게 찾아내려고 절치부심하는 신인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물론 외래어 편향이라는 것은 어떤 사대주의의 소산은 아니고, 그것도 일종의 당면 현실의 변화라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외래어에 대한 모국어의 우위를 전제하는 담론 자체가 회의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외래어 물신 현상이 시단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퍼져 있다고 하는 것은 역시 섬세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에도 여러 다른 흐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그 범주를 나누어보고 그 호오好惡도 가려보는 일이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래어 물신 현상은 상당히 지속적으로, 게다가 전면적으로 우리 시의 체질을 바꾸고 있고, 그 나름의 지형을 형성해 가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간평의 한계 내에서이기 때문에 역시 단순화를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번 계절에 발표된 시들에 나타난 외래어 물신의 스펙트럼에 대해 최근 10년의 외래어 물신 현상의 흐름 속에서 몇 마디 적어보고자 한다.

2. 언어의 ‘팬시화’ 대對 외래어 물신의 음악
언어의 물신화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대표하는 현상 중 하나이다. 최근 시인들이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고 할 때, 그것은 정지용과 같은 입장에서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을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범凡언어파’에는 언어 자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김언, 말놀이를 전략적으로 추구하는 오은 등이 두각을 나타내며 저마다 자기 세계를 성실하게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러한 추구와는 다소 변별되는 지점에서 ‘언어의 팬시화’라고 할까 하는 현상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팬시(fancy)’란 리얼에 대한 의식적 거부, 레디메이드를 변개 없이 비현실적인 세계에 이식함으로써 재조합되는 이계적異界的 질서,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을 강조하는 문화산업적 양상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언어의 팬시화’ 혹은 ‘팬시적 감수성’은 진은영(<우리는 매일매일>), 김민정(<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 그리고 김이강의 어떤 시들에서도 산견되지만, 유형진이야말로 가장 본격적인 의미에서 ‘언어의 팬시화’ 혹은 ‘팬시적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유형진은 첫 시집에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식판 공장의 프레스 기계들과 언니의 검은 란제리를 위한 노래」 등 7, 80년대의 풍경들을 배음으로 한 현실반영적 계열과 「피터래빗 저격사건」, 「애버뉴b」, 「정전 중인 지구에 화성인들이 방문하면」 등 영화․음악 등 문화적 코드들을 배음으로 한 현실조작적 계열, 이상 두 세계를 유려하게 펼쳐 보인 바 있다. 그 중에서 후자의 세계를 발전시킨 것이 첫 시집 이후의 소위 팬시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연작이 이 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선 모든 것들이 갇혀 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이곳은 갇혀 있어야 풀려나는 곳입니다.

시계 액자 안에 꽃병 액자가 있습니다. 꽃병 액자 안에 커피포트 액자가 있습니다. 커피포트 액자 안에 나침반 액자와 팽이 액자가 있습니다. 팽이 액자 안에 일곱 살과 아홉 살의 액자가 있습니다.

일곱 살의 액자는 자고 있었고 (흑장미색의 벨벳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소리지요) 아홉 살의 액자 안에는 회색과 흰색을 섞은 뭉게구름과 하늘색 하늘과 동전모양 해님과 해님모양 동전을 넣는 뽑기 기계와 껌볼 같은 형형색색의 거짓말들이 있습니다.

해님모양 동전을 뽑기기계에 넣었더니 투명 반달을 붙여놓은 듯한 볼이 한 개 튀어나옵니다. 볼을 열어보았더니 탱탱 튕기는 파란 고무공이 나옵니다. 파란 고무공은 포물선을 여섯 번 그리더니 다시 액자 속으로 퐁당 들어갑니다.

파란 고무공이 튕겨 들어간 액자 속엔 하늘색 하늘이 있지만, 더 이상 뭉게구름도 해님도 없습니다. 다만 수염 없는 고양이가 있고, 눈썹 없는 부인이 있습니다. 액자 속 모든 사물들에 입이 있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유형진,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액자의 세계」(≪현대문학≫, 2010년 5월호)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액자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액자의 세계’로 바꿔치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의 리얼리티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만 레이(Man Ray) 등의 아방가르드 사진 예술이 가장 현실반영적인 장치를 통해 현실의 허구성을 고발했던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액자’란 모든 예술이 현실을 포착하는 하나의 ‘프레임’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 ‘프레임’이 어떤 인식 가능한 영역, 그 임계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만 놓고서는 ‘시계, 꽃병, 커피포트, 나침반, 팽이, 일곱 살과 아홉 살’로 이어지는 계열체의 필연적 연결 고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이 계열체에서 시계, 나침반, 팽이 등은 회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일곱 살’의 ‘잠’이나 ‘아홉 살’의 ‘백일몽’으로의 진입을 촉진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일곱 살짜리 아이와 아홉 살짜리가 어질러 놓은 장난감들의 우연한 결합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 이 ‘프레임’은 사유를 제한하는 인식론적 틀이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분방하게 튀어나오는 초평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프레임’의 역할은 오히려 어떤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스크린적(영화적) 장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시를 읽고 팀 버튼이 리메이크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을 떠올렸다. 그 영화에는 형형색색의 초콜릿 과자들이 연상적으로 등장하는데, 어쩌면 그러한 연상력이야말로 아이들 특유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형진의 시도 아이들의 분방한 연상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일맥상통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언어의 팬시화를 대표하는 그룹 중 진은영이 1970년생, 김민정이 1976년생, 김이강이 1982년생, 유형진이 1974년생인데,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을 컬러 TV를 보면서 보낸 세대이며, <주말의 명화> (MBC)나 <토요명화>(KBS) 등을 통해 미국의 대중문화를 지속적으로 흡수한 세대이다. 유형진은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액자의 세계」에서 ‘껌볼’이란 시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아마도 ‘껌볼’과 같은 것을 ‘껌볼’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부른 것은 유형진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누가 처음 그 말을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껌볼’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쓰는 세대가 시단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어로서 사용되는 것은 초유의 일이고 시 속에서 그 ‘껌볼’이라는 미국적 대중문화의 일단이 하나의 질료로서, 물신으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의미심장한 것이겠다.
이 시는 어떤 결락의 암시로 끝난다. 사물들이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이다. 그러나 제4연까지의 사물들은 생기 있게 움직였다. ‘파란 고무공’이 ‘탱탱’ 튀어가는 장면은 팬시적인 익살기마저 있었다. 따라서 마지막 연의 정적은 3연과 4연에 그려진 ‘아홉 살’짜리 아이의 세계와는 유리된 차원의 이야기가 되는 셈인데,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시인 자신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수염 없는 고양이’나 ‘눈썹 없는 부인’(방점―인용자)은 결락을 암시하는데, 그 결락이란 마지막 연의 ‘침묵’에 대응된다. 입이 있으되 말이 없는 상태인데, 그것은 결국 아이들의 분방한 상상력과 대비되는 어른 측―이 경우 시인 자신이 되겠지만―의 정신적 고갈 상태를 암시한다.
지금까지 언어의 팬시화를 큰 현상으로서 보고 유형진의 시를 설명해 보았는데, 물론 언어의 팬시화가 일률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진행률을 점검하고자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시인 중 한 사람이 이제니이다. 말하자면 언어의 팬시화와는 구분되는 언어 물신의 한 유형을 그녀에게서 찾을 수 있는 듯하다. 이제니는 1972년생으로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등단작인 「페루」에서 ‘페루’는 원래의 지명으로서의 기의를 비운 텅 빈 기표였는데, 당자가 어찌 보면 의미보다는 소리에 치중하면서 외래어들을 분방하게 사용하는 편향이 아닌가 하는 첫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뒤 「카리포니아」라는 시도 읽었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외래어 편향이기는 하지만 황병승 류類의 하위문화에 경사한 외래어 편향과는 구분되는 문학주의적 향취가 있어서 흥미를 느꼈다. 근작에 대한 느낌도 큰 차이는 없다.

눈보라 속에서 럼주 한 잔
아름다운 동물 얼굴을 만나러 가자
운이 좋다면 진초록 오로라는 덤으로

눈이 흐릿한 집시 할멈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이 부르면 올라가리라 하늘이 부르면 올라가리라

라크―리큐어
이쉬켐베 초르바스―양의 창자로 만든 수프
오렌지
화이트치즈
로즈잼
코윤 바쉬유―양머리 통구이
체르케스 타부―호두소스를 뿌린 닭고기 냉채
아르나웃 셰리―새끼양의 간에 알바니아 고추를 넣고 기름에 튀긴 것
이맘 바윤드―토마토, 양파, 가지를 넣어 한데 끓인 요리
카딘 부두―기계로 저민 어린 양고기를 삶은 경단
미디에 돌마스―쌀과 소나무 열매를 넣은 조개
제티냐울 푸라리―양파와 쌀을 끓인 것
시가라 브레이―치즈를 넣은 패스트리
케슈쿨―아몬드와 쌀가루로 만든 커스터드
카이마르크 에르마 콤포스트―사과시럽을 익힌 것
야채 샐러드
아이란―요구르트를 물로 묽게 만들어 거품을 일게 한 음료

늙어버린 두 손 위에 늙어버린 진심을 얹어
아무도 모르게 잠이 들리라 아무도 모르게 잠이 들리라

오로라는 꿈속에서만 타는 듯한 녹색
동물의 동공은 기억 속에서만 아름다운 느낌

입김 위에서 휘몰아치는 알래스카 윈터
낡은 선술집 창 너머로 스며드는 붉고 검은색
―이제니, 「양의 창자로 요리한 수프로 만든 시」(≪리토피아≫, 2010년 여름호)

「양의 창자로 요리한 수프로 만든 시」에는 시 중간에 터키 요리의 이름과 그에 대한 설명이 제법 길게 인용되어 있다. 터키 요리의 이름은 원어가 아니고 우리말의 외래어 표기로 적혀 있거니와, 이 경우 요리 이름은 빼고 그 설명만 있어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지 않느냐는 불만도 나올 수 있을 법하다. 아마도 이제니는 이점에 대해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 같고 필자도 대체로 시인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그 요리의 이름들은 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소리에서 ‘집시 할멈의 노래’를 구성하고, 다시 그 ‘노래’는 죽은 양에 대한 진혼가가 됨으로써, 이 시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섭생의 이치를 노래한 시가 되게 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터키 요리의 이름들이 하나의 물신으로서 배치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유형진의 시들이 어떤 영상적인 물신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 대해, 이제니의 시는 어떤 음악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는 점이 적절히 지적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니의 외래어 물신은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언어가 팬시화(상품화)하여 자본주의적 욕망과 복잡하게 얽히는 대신, 그 기표가 영상이라는 실감을 얻기 전에 음악화해 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서구적인 맥락에서의 서정이 음악에 가까운 상태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제니의 시도는 황병승, 김경주, 박희수 등의 장르 파괴 실험과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3. 장르 파괴 실험과 재귀적 언어
기존 문학양식에 대한 파괴충동은 근년에야 생긴 현상은 아니다. 최근 시단의 장르 파괴 실험도 역시 황지우, 박남철, 유하, 장정일 등의 시사적 모멘트와의 비교․대조 속에서 온당하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주 소박하게 살펴보아도 1980년대 아방가르드에는 정치,사회적 맥락이 있었고, 그분들의 장르 해체 실험에는 문학적 윤리에 대한 요청에 답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었다. 1990년대 아방가르드에는 미학적 매너리즘이나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혁파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고, 비대해져가는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전대의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스스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2000년대의 장르 파괴적 경향은 아방가르드가 팝으로 침윤되어가는 과정을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물론 윤리적인 문학만이 훌륭하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 자신을 둘러싼 당면 현실에 대한 관심이 반드시 정치․사회적인 외피를 고수해야 된다고 강요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양식에 대한 해체에 있어서 그 양식에 대해 반성하는 재귀적 언어를 경유하지 않은 아방가르드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등단 무렵의 황병승은 <여장남자 시코쿠>(2005) 전반의 색채를 염두에 둔다면 상당히 건전했다고 할까 온건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주치의h」는 이상李箱 계보의 어딘가에 놓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검은 바지의 밤」은―이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인상인데―, 정현종 번역의 파블로 네루다를 읽는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원 볼 낫싱」, 「쓰리 아웃 체인지」, 「커밍아웃」 등의 시들도 신인의 패기라 할 만한 정도의 새로움이 있는 시들이었다. 그 시형을 놓고 보더라도 그것이 당시 유행했던 산문체도 아니었고, 황병승 시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이탤릭체나 볼딕체 등의 장치도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히려 형식에 대한 이러한 초연함이 그의 시에 표현된 반항적인 포즈를 더 돋보이게 했는데, 그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자연 서정시 계열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맞섰던 해체시의 형식 파괴 전략과도 판이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성적인 일탈이나 폭력,살인 등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기울어갔고 각종 매체들은 이러한 경사를 다분히 부추긴 감이 있다. 그는 시인 자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여러 하위문화의 군상들을 하나의 캐릭터로 내세웠는데, 그러한 전략이 시 장르 자체에 대한 반성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등단작에서 보여준 ‘나’의 경험적 실감을 희생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기도 했다. 2000년대 황병승 시의 소비 현상은 이러한 반감과 함께, 하위문화에 친숙한 오타쿠들의 추종이라는 상이한 반응을 거느리고 나타났는데, 이것은 2000년대의 다른 히어로 김민정, 김경주 시의 소비 현상에도 대동소이하게 반복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병승 시 소비 현상이 기성세대의 비판과 신세대의 추종이라는 세대론적 간극을 재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50,60년대 한국소설의 ‘아비 부정’ 혹은 ‘아비 부재’에 대한 향수를 지닌 시단의 선배, 비평가들이 황병승 시의 격정과 낭만적 아이러니를 더욱 적극적으로 읽어냈으며, 젊은 독자들은 오히려 내용상의 결보다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하위문화의 캐릭터들만을 선별적으로 소비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실상에 가까운 설명이지 않을까 싶다. 평단, 독자, 시인 자신이 <여장남자 시코쿠>를 둘러싼 소비 현상을 저마다 잘못 이해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트랙과 들판의 별>(2007)에 대한 평단과 시장의 무관심에서 단적으로 찾을 수 있다.  
그 추이야 어찌 됐든 2005년 무렵 황병승의 시도에는 그 나름의 절박함이 있었다고 보고 싶다. 그로 인해 한국 현대시의 외연이 당대 문화의 어떤 결을 흡수하면서 확장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그가 그 자신이 확장한 2000년대 한국시의 외연에 걸맞은 시적 대응을 해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가령 그는 ‘한국적’ 문맥을 소거한 채 시를 쓰고 있는데, 그렇다고 ‘세계적’ 문맥을 끌어오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고, 외래어 물신 없이는 시를 쓸 수 없는 지점에서 여전히 하위문화의 그림자를 재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게 한다. 「벌거벗은 포도송이」를 읽고 든 생각이기도 하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록 밴드의 보컬이자 뛰어난 기타리스트였지만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가엾은 소년에 불과했다
빽빽한 공연 일정에 맞춰 비행기와 보트, 전용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의 그는 언제나 취해 있었고 십대부터 이십대 후반의 그루피들이 유령에 홀린 사람들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았었다 그리고 누군가 때에 전 차창에 미지근한 입김을 불어 써놓은 손글씨,

너덜란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을 거쳐 그의 마지막 공연장이 될 종착역, 유럽 북서부의 입헌군주제 국가 튤립과 풍차의 나라……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어가는 왕들과 신음하는 왕실의 미래, 몰락 속에서 몰락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온 집안이 취해 있었고 서로가 그것을 묵인했다는 것 번영의 시간보다 몰락의 시간이 너덜란드를 더욱 치명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 병들어 죽어가는 연인들이 서로의 차가운 몸을 부둥켜안고 열정적으로 주고받았을 질문과 대답처럼…… 마치 이 모든 게 구름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게 첨탑을 지나는 구름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황병승, 「벌거벗은 포도송이」 부분(≪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

「벌거벗은 포도송이」는 위대한 배우였지만 사랑에 번번이 실패해 불행했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 록 밴드 가수였지만 알코올과 약물 중독이 된 가여운 소년, 증오에 휩싸인 채 여러 도시를 전전해야 했던 어느 오누이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째 절이 앞의 두 절을 종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이 시가 세 개의 이야기로 분절되어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분절 형식이 세계의 파편성과 그에 대한 재핑(zapping) 형식의 통합 시도처럼 읽히는 면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눈보라 속을 날아서」(상)(하)(<트랙과 들판의 별>)와 같은 유형의 시를 연상시킨다. 어찌 보면 ‘과거의’ 할리우드나 ‘과거의’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가짜 다큐멘터리에 대한 취향을 이들 작품들이 이어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설정이 그의 시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듯하다. 그러나 왜 ‘한국적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지, 왜 하필 지금의 미국이나 세계가 아니고 ‘과거의’ 미국 대중문화여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너덜란드’의 몰락과 광기는 그 당위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그것이 외래어 물신으로 인해 새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하위문화’를 계속 호명하는 방식으로―그것이 어떤 저항담론과 연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복고적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학적 전복보다는 현실의 질서를 추인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록의 정신을 시에 있어서 재현하고자 할 때, 우리가 시에 록 가수의 자기 파멸적인 생에 대해 기록하는 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시인이 있다면 아나크로니즘으로 비판받기 십상일 것이다.
황병승의 시는 장르 파괴적인 스타일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외피일 뿐이며 그 실체는 다분히 복고적인 취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금까지 에둘러 이야기한 셈이다. 요컨대 그의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장르 파괴적인 것은 아니고 몰락하는 장르의 폐허를 노래하는 형식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박희수의 근작들에서도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박희수는 1986년생으로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2009)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의 많은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난 계절의 작품들까지를 망라하여 본다면 장시 형식에 주안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시에는 소설처럼 등장인물이 있고 그 나름의 스토리 라인도 있다. 그냥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제법 짜임새가 있다. 그런데 같은 장시라고 하더라도 박희수의 그것은 단순하게 황병승이나 김경주의 그것을 흉내 낸 것이 아니고 그들과는 또 다른 개성이 있다. 「라이트Light―가벼운 빛」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쓰는(rewrite)’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가 망각해버린 기억의 세부를 재구해 보려는 시도로서도 읽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앞으로 그가 견지해야 할 시적 방향인가에 대해 호의에서 한 마디 적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테드

형이 데려온다는 그 파일럿들은 아버지를 이해 못 해. 그들은 교란이라는 바람의 끓는점을 보지 못해. 우리는 악천후를 날잖아. 극복은 예민한 검이야. 날에 흠집을 내게 할 순 없어. 형, 나를 믿어. 나는 하늘의 급소를 찌를 거야.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몸엔 기계의 폭력이 새겨져 있어. 그러니 숨쉬는 폭력 속에서 나는 기계와 하나가 될 거야. 믿어줘.



부러지는 강철은 강철이 아냐. 덜 맞은 거야. 더 담금질되어야 해. 나는 제련이라는 말을 늘 좋아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도. 발음이 좋아. 마치 혀와 이를 제련시키려는 그런 움직임이야.

나는 판때기에 캔버스 천을 얹어놓은 것만으로는 부족해. 이 설계도는 너무 난해해. 아버지는 수식을 남기지 않았어. 이미지를 남겼을 뿐. 남은 것은 나의 상상력뿐. 상상력이란 제2의 육체이니, 모든 일의 시초, 그들의 노력 뒤에도 불어닥치던 동일한 추력Thrust.

방향타, 승강타, 에일러론. 삼차원의 젓대 또는 지느러미. 젓는다, 젓는다. 재료가 썩어 녹아 흐를 때까지.

테드

거듭남, 이라는 말이 나는 좋아. 거듭난다는 건 거듭남에 대해 거듭 생각하는 일인 것 같아. 다시 태어나고픈…….

내가 예전에 별자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그건 단지 혈(血)의 위치에 불과하다고. 내 안의 우주는 파손되고 있어. 하나의 어두운 중심이 주변부로부터 다가와 내 별들을 모조리 잡아삼키고 있어. 내게 천칭이 있더라면, 아니면 끓어오르는 북극의 장대라도

가야 해. 가야만 해.
―박희수, 「라이트Light―가벼운 빛」 부분(≪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

「라이트Light―가벼운 빛」은 필 라이트, 테드 라이트, 네드 테이트 등 세 젊은이의 비행에 대한 열정과 집념, 아버지의 유업을 창조적으로 이어받으려고 하는 두 형제의 모색, 그리고 그에 따라 커지는 비행 실패에 대한 두려움, 형제애와 우정 등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세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분할하고 이탤릭체와 볼딕체를 혼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람이 기계의 힘을 빌려 하늘을 난다는 것에는 상상력과 영감이 필요하며, 열정과 집념, 의지와 과학의 힘도 필요하다는 발상은 어쩌면 시 쓰기 자체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시의 시를 향한 재귀적 언어가 온당한 코스를 밟아 시 자체에 대한 반성의 언어가 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쾌하게 동의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이 시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기존의 정보를 가공한 형태라는 점을 들어 독창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방식은 이제 갓 시를 쓰기 시작한 젊은이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비판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시의 난맥은 네드 테이트가 지닌 오컬트적 능력에 있다고 하고 싶은데, 아마도 박희수는 이점에 대해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시에서 네드는 염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 실험이라는 핵심 이야기만으로는 역시 지루해질 염려가 있을뿐더러 창의를 발휘할 만한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의 결말은 우여곡절 끝에 테드가 시험 비행의 조종사가 되어 비행을 시작하지만 기상 악화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바로 그 순간 ‘야폰차(Yaponcha)’라고 하는 초자연적 힘이 테드를 도와서 시험 비행이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성공의 이면에는 사실 네드가 테드를 위해 초자연적 힘에 자신의 다리를 헌납하고 그 대가로 도움을 요청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는 것이 이 시가 폭로하고 있는 진실이다. 잘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네드의 희생은 그의 테드에 대한 사랑(동성애)에 의해 정당성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은 시를 멜로드라마로 실추시키는 감이 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승리 이면에는 네드의 오컬트적인 힘으로 표상되는 대자연과 교호하는 야성과 생명력을 희생시키는 대가가 따랐다고 보는 사관이 이 야사에는 개재해 있다. 그러나 그 비행의 성공을 단순히 우연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한 사관인지 신중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근대란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여담 비슷하게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박희수의 외래어 물신은 외래어 물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듯하다. 가령 인용된 부분에서 시인 자신이 볼딕체로 강조해 놓은 “나는 하늘의 급소를 찌를 거야.”라든지 “내 안의 우주는 파손되어 있어.” “내게 천칭이 있더라면, 아니면 끓어오르는 북극의 장대라도.”와 같은 표현은 어찌 보면 산문과는 다른 시적 은유나 환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아무리 언어의 일상적 용법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산문적 언어에 머물 따름이다. 사실 그와 같은 착시는 우리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화적 간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박희수를 비롯한 젊은 시인들이 이 착시에서 놓여나 당면 현실에 대응하는 자기만의 언어를 빚어낼 때 우리 시사가 한 걸음 더 진전될 수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4. 맺음말
원래 언어의 물신화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자주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 마르크시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근자 우리 시에 나타나는 외래어 물신은 우려할 만한 현상으로 비치기 십상일 듯하다. 물론 이러한 물신화를 비판하기 위해 외래어 물신을 활용하는 시인들의 경우도 상정해 보아야겠지만, 그보다는 개개인의 상징자본의 차이에서 외래어 물신이 작품 속에 뛰어드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외래어 물신을 일률적으로 비판하고 부정만 할 수만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시인들의 경우 크든 작든 거의 외래어 물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물론 대다수의 시인들이 외래어 물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더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하는 천박한 생각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외래어 물신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 온 측에서 시라는 장르의 외연과 내포가 확장된 면이 있다는 데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유형진의 팬시적 감수성이나 이제니의 음악을 지향하는 외래어는 어찌 보면 기존의 문창과에서 가르쳐왔던 시의 유형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며, 독자 측에서 보더라도 기존의 문학 독법과는 상당히 다른 독법이 필요한 시들이라고 생각한다. 현실 반영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유형진이나 이제니는 화석화된 현실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구화 시대의 현실과 긴밀히 대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황병승의 하위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것을 하나의 캐릭터 아이템으로 조작하는 방법론이나  박희수의 의사擬似 역사적인 것에 대한 천착도 장르의 내파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의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려할 만한 것은 이러한 가능성이 우리 시사 전통을 경유하고 반성하는 지점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시 장르의 안 좋은 유습, 그러니까 복고주의나 멜로드라마적인 것들을 은연중에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내파’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텐데, 그것은 좀 곤란한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복고주의적인 것이나 멜로드라마적인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그 외피로서의 새로움만을 소비하는 현상에 대해 더 고민해 보아야 하는 일인 것도 같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시인으로서도 쉽게 소모되거나 소비되지 않는 시를 써야겠다는 반성이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2000년대 전반기의 유형진, 황병승, 2000년대 후반기의 이제니, 박희수를 의식적으로 배치하면서, 외래어 물신 현상이 벌써 어떤 지형을 형성해가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것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외래어 물신 현상이 시단에 벌써 만연해 있다고 한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를 물신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정립하고 신자유주의의 사태沙汰에 처해 있는 우리 스스로의 현주소를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2007), 편저로 <이수복 시 전집>(2009)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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