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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010년 가을호) 산문/‘모더니티’의 수도‘―파리Paris의 문화와 문학․ /권승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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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권순긍의 유럽 도시문화 산책
‘모더니티’의 수도‘―파리Paris의 문화와 문학․
파리는 솔직히 글을 쓰기가 어려운 곳이다. 너무 쓸 게 많고, 얘기할 것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로마가 도시 전체가 고대의 박물관이라면, 파리는 도시 도처가 문학과 예술의 기념비적 장소로 그 기억을 환기시키고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거리 곳곳이 기호이고 상징으로 우리에게 무수한 얘기를 건네는 곳이다.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1821∼1867)는 <파리의 우울>에서 파리를 ‘이곳에는 모든 기상천외한 일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늙은 창녀에 취한 호색한처럼/이 거대한 갈보, 수도에 취하고 싶소./그녀의 지옥 같은 매력이 나를 끊임없이 젊게 해준다오./……오, 더러운 수도여!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라고 절규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파리는 그런 기상천외한 일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신기루와 같이 환상적인 곳이다.
그러기에 유럽의 모든 도시 중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이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거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볼 게 많고, 들을 게 많고, 먹을 게 많고,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서울면적의 1/6밖에 안 되고 인구도 기껏해야 200만이 조금 넘어 서울의 한 구區밖에 안 되는 파리의 여행안내서는 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한 권으로 출판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도시를 배경으로 최초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박신양과 김정은 주연의 「파리의 연인」이지 않은가? 그만큼 파리는 우리에게도 매력적인 곳이다.
파리를 여행하려면 적어도 1주일 이상은 둘러보아야 한다. 유명한 미술관만 제대로 보더라도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등 2∼3일은 족히 걸린다. 사실 파리에 오면 모든 것을 다 보겠다는 것은 욕심이고 어느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거나 그냥 거리를 산책하며 파리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우리는 세 번이나 파리에 가서 열흘 가량을 보냈지만 아직도 파리를 감히(!) 다 보지 못했다. 오만하고 도도한 미녀처럼 쉽게 속내를 다 보여주지 않는 도시가 파리다. 숱한 문학과 예술과 영화는 파리를 찬양하고 기꺼이 그녀를 무대로 삼았다. 그러니 이 도시는 지리상에 구획된 어떤 장소가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거대한 호수와도 같은 곳이지 않은가? 그래서 파리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로 불린다.
‘근대성의 수도’, 파리
파리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굳이 의미를 찾자면 ‘근대’의 상징적인 도시라는 것이다. 로마는 분명 고대와 중세의 중심이었고,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파리는 분명 근대 문화의 중심이자 그것을 확대 재생산한 곳이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파리, 19세기의 수도>라는 책을 썼으며, 좌파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 역시 <파리, 근대성의 수도>라는 책을 써서 파리를 근대성, 즉 ‘모더니티Modernity'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어떻게 해서 파리가 ‘근대성의 수도’로 부각됐을까?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로마시대에는 시테 섬에 ‘뤼테시아 파리시오룸Lutetia Parisiorum’이라는 파리의 어원이 되는 마을을 이루었고, 3세기에 프랑크인들이 들어온 이후에는 도시로 성장하여 10세기부터는 왕이 거주했던 도시인 파리는 나폴레옹 3세(재위;1852∼1870) 통치기간인 19세기 중엽 오스만 남작에 의해 오래된 중세도시에서 근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래서 보행자를 위한 길이 마차가 다니는 대로로 변모됨에 따라 비위생적인 주거와 환경이 사라지게 되었고, 직선으로 쭉쭉 뻗은 대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광장이 생겨났다. 건물들도 7층에 경사진 회색 지붕이 있는 ‘오스만 양식’으로 깔끔하게 단장됐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확장, 정비되었다. 이렇게 해서 낡은 파리가 사라지고 19세기 ‘근대성의 수도’로서 파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근대의 상징적 사건 중의 하나인 ‘만국박람회’가 1951년 런던에서 개최된 이래 1900년까지 파리에서 무려 5회나 개최되었고,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에는 그 기념으로 에펠탑이 만들어지게 됨으로써 파리는 근대의 상징적인 도시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자 지식인,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등 근대의 모든 지성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들끓기 시작했다. 정말 근대 지성사에서 파리는 용광로와도 같은 곳이다. 파리의 뒷골목 카페와 허름한 방, 혹은 작업실에서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을 논쟁이 이루어졌으며, 근대문학사를 좌우할 작품들이 씌어졌으며, 근대미술사를 장식할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왜 파리에 근대의 지성이 모이게 됐을까? 당시로서는 파리가 주는 최신 유행의 지적 교감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살롱과 카페, 곳곳에 공연장과 전시실을 풍부하게 갖춤으로써 파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지적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해하는 새로운 시대인 ‘근대’가 어떤 형상으로 다가온 것인가를 파리는 분명히 보여주었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세계의 지성들을 매혹시켜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빅토르 위고와 보들레르, 마리 퀴리와 쇼팽, 하이네와 투르게네프, 모네와 고흐 등이 파리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당시의 파리를 가장 잘 그려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그런 파리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미 파리에 있다. 떠돌이는 파리를 표현하고, 파리는 세계를 표현한다. 왜냐하면 파리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오랫동안 파리를 연구했던 사회학자 정수복은 <파리를 생각한다>(문학과 지성사, 2009)라는 책에서 파리가 주는 ‘달콤한 멜랑콜리’가 지식인들을 파리로 모이게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화려함 속에 감춰진 ‘파리의 우울’은 병적 우울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주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창조적 우울이라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예술가와 작가와 지식인이 파리로 몰려드는 이유는 그런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주는 창조적 영감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창조적 영감을 통해 고통과 두려움, 창조와 좌절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야말로 파리의 찬가이자 실체가 아니겠는가.
우리도 파리의 센 강이나 뒷골목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스레 파리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허전함을 안겨주었다. 비가 많이 오고 추운 날씨도 거기에 한몫했다. 그래서 갈증 난 사람처럼 미술관으로, 역사적인 거리로, 카페로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세 번을 갔지만 아직도 파리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다. 에디 피아프의 샹송처럼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아련한 기억으로 파리는 각인되어 있다. 그것이 지식인들을 파리로 불러들였던 그 ‘달콤한 멜랑콜리’가 아니었던가?
‘프랑스 혁명’의 자취를 찾아서
세 번째 파리를 찾았을 때 우리는 엉뚱한 계획을 세웠다. 세계사를 뒤흔든 프랑스 대혁명의 자취를 한 번 찾아보자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래서 여행안내서에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바스티유 광장에 그냥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파리는 워낙 박물관이 많고 프랑스 사람들은 보존을 잘하니 뭔가 혁명의 자취가 남아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지하철을 탔다. 바스티유역은 지하철 1호선과 5호선, 8호선이 겹치는 곳에 있어서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았다.(사실 파리는 서울의 두세 구 정도의 넓이에 지하철만도 무려 14개 노선이 있으니 지하철 지도만 잘 들고 다니면 어디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드디어 바스티유역에 내리니 역의 벽화가 심상치 않았다. 혁명과 관련된 내용들로 벽면이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래 드디어 프랑스 대혁명의 현장에 온 거야.’ 역을 서둘러 빠져나와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던 자리인 광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던 그 현장에는 돌조각 하나 없이 말끔한 광장으로 단장돼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중앙에 52m 높이의 혁명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을 뿐이었다. 알고 보니 이 탑은 사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기념하기보다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7월 혁명은 보수반동적인 왕정에 맞서 시민들이 봉기한 시민혁명인 것이다. 저 유명한 드라크로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이 부제가 ‘1830년 7월 28일’이듯이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 탑 아래에는 당시 희생된 시민들뿐만 아니라 1848년 노동자, 농민들이 봉기한 2월 혁명의 희생자들도 같이 안치되어 있다. 프랑스혁명의 기억은 광장의 이름으로 남아있고 혁명기념탑은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니 이곳은 연속된 프랑스 혁명사의 상징적 장소임에는 틀림없지만 프랑스혁명에 대한 기억을 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아쉬웠다.
다만 그 광장의 옆에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는 1989년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바스티유 오페라 하우스가 있어 아쉬움을 달랜다. 바로 한국 음악가 정명훈이 그곳의 지휘자로 있었던 곳이다. 2700석 규모의 세계 최대의 오페라 하우스로 온통 유리로 장식한 초현대식 외관이 눈길을 끈다.
뭔가 있을 줄 알고 왔다가 그 흔한 기념관 하나 없어 실망한 끝에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도대체 바스티유 감옥의 흔적이 다 어디로 사라졌냐고 물었더니 다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제목처럼 ‘이게 다예요?C'est Tout’라고 묻고 싶었다. 처음엔 분노한 민중들이 감옥을 부수고 그 흔적들을 없앴으리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혁명의 광장이었던 콩코르드 광장에서 센 강을 건너 부르봉 궁전으로 가는 콩코드르 다리를 바로 감옥의 돌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람들을 가두었던 돌들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밟혀 강을 건너는 도구가 됐으니 참으로 흥미로운 발상이 아닌가. 구체제와 탄압의 상징물을 탄압의 대상으로 전도시킴으로써 또한 혁명의 정신을 기억해 내는 환기장치로도 사용한 것이다.
파리와 모더니티의 상징, 에펠탑Tour Eiffel
아름다운 파리를 상징할 수 있는 ‘랜드 마크’가 무엇일까? 거의 대부분이 에펠탑이라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 파리를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은 노트르담 같은 유서 깊은 성당도 아니고, 베르사유 같은 화려한 궁전도 아니고, 개선문 같은 승리의 기념물도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아름다운 파리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철골 구조물이 그 모든 것을 제치고 파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당당히 최고의 영예를 획득한 것이다.
파리의 건물들은 대부분 그리 높지 않은 높이의 베이지색이나 미색의 석조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스카이라인’을 손상시키지 않고 고풍스러우면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파리의 건물들이 이렇게 조성된 것은 화재를 염려하여 석조로만 건축을 허용한 1607년의 칙령 때문이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파리를 ‘돌로 만든 거대한 심포니’라고 불렀다. 정말 파리는 아름답고 우아한 석조건물들이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학적 쾌감을 느낀다.
이런 ‘석조의 심포니’ 속에 이질적인 철골로 이루어진 기념물을 세운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혁명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기념물을 현상 공모했고 거기에 당선된 작품이 교량기술자였던 귀스타브 에펠의 철골탑이다. 철골로 이루어진 에펠탑은 하찮은 민중들이 모여 엄청난 힘을 발휘하듯이 하나하나의 철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역사를 만든다는 ‘혁명의 정신’, ‘공화국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화국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계획이 발표되자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석조의 도시에 흉물스러운 철골 구조물을 세워 도시의 미관을 파괴한다는 이유에서다. 무려 300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그 서명에 동참했고 「진주 목걸이」의 작가 모파상은 ‘에펠탑이 안 보이는 에펠탑 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초대해야지만 응하겠다.’는 비판적인 농담도 서슴치 않았다. 시인 베를렌은 에펠탑을 ‘망루의 해골’이라 불렀으며, 위스망스는 ‘격자의 흉측한 철탑’, 혹은 ‘끔찍스런 새장’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에펠탑은 건립되었다. 무려 20개의 거대한 트러스를 볼트로 조립해 단 몇 달 만에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높이인 320m의 에펠탑을 건립해 건축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것은 이제 ‘돌의 시대’가 지나고 ‘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수공의 시대’에서 ‘기계의 시대’로 이행됐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그것이 바로 ‘근대’인 것이다. 에펠은 그렇게 해서 ‘근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자, 봐라! 이것이 근대다. 돌을 다듬어서 기념물을 만들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에펠탑은 관람객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에펠탑이 ‘근대의 수도’ 파리에 상징적인 건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애초 에펠탑은 20년 동안 기념물로 그 자리를 지키다가 1909년에 철거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방송용 안테나를 설치하기 위해 방송탑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철거되지 않았다. 파리에서 그 정도의 높이를 가진 건물이나 지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장 높다는 몽마르트 언덕도 128m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에펠탑이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고 할까? 앞으로 어떤 시대가 도래할 지를 미리 예견하고 거기에 대처해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최고의 상징물로 태어난 것이다. 에펠탑은 흉물스런 철거대상에서 당당히 이 아름다운 도시의 상징으로 최고의 지위를 획득한 파리의 ‘미운 오리새끼’다. 그래서 에펠탑은 하찮은 민중들이 모여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는 지를 그 구조나 내력을 통해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파리의 상징체계, 그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현장
파리를 누가 달콤하고 매혹적인 도시라고 했는가? 누가 낭만과 자유의 도시라고 했는가? 따지고 보면 파리야 말로 혁명과 폭동과 학살로 이어지는 근대 정치사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다. 생각해 보라. 프랑스혁명에서 노동자혁명을 거쳐 공화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피를 흘리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던가? 김수영의 시처럼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파리를 보면 알게 된다.
파리는 그 발상지인 시테 섬을 중심으로 달팽이 모양으로 마을이 형성된 타원형의 도시다. 센 강이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며 그 흐름의 방향을 기준으로 우안에는 모두 14개의 구가 있고, 좌안에는 6개의 구가 있는데, 우안은 정치, 경제의 중심이며, 좌안은 문화, 예술, 교육의 중심이다. 우안은 기업가나 정치가들이 주로 거주하고, 좌안은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우리로 치면 강남과 강북이 뒤바뀐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파리는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파리의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센 강을 따라 등뼈처럼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장소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파리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거대한 상징체계다. 그 상징체계는 개선문에서 시작하여 화려한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대통령궁인 엘리제를 끼고 콩코르드 광장에서 일단 멈춘 다음 동쪽으로 튈르리 정원과 나폴레옹 광장의 카루셀 개선문을 지나 루브르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계속 나가면 바스티유 광장까지 이어진다. 이를 간단히 도식하면 개선문-샹젤리제-엘리제 궁-콩코르드 광장-튈르리 정원-나폴레옹 광장-루브르-바스티유 광장이 된다. 한 도시로는 갖기 힘든 정말 어마어마한 기호의 집합이고 상징체계다. 이 장소 혹은 건물들은 프랑스 역사의 주요한 국면에서 각기 사연을 간직하고 때론 중첩되기도 하면서 상징과 기호들을 화석처럼 간직하고 있다. 이 직선의 길을 가면서 그 상징체계만 해독해도 프랑스의 역사와 파리의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우선 개선문을 보자. 유럽을 통합해 거대한 제국을 이루려던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1806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지만 왕정복고와 7월 혁명을 거쳐 1836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당당하게 개선하리라던 나폴레옹은 죽어서야 그 문을 지나 파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2차 대전 때는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가 그 문을 통과했고 종전 후에 프랑스의 영광을 외치며 드골이 그 문을 지나 행진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개선문은 프랑스의 전쟁을 아로새긴 상징이다. 화려한 영광도 있지만 그만큼 좌절의 역사도 각인된 곳이다. 그래서 개선문이 속한 광장도 드골 광장이고 그곳에서 뻗어나가는 12개의 거리는 샤를 드골, 클레베, 포슈, 아르장틴, 마르소 등 빅토르 위고와 샹젤리제를 제외하고 모두 전쟁과 관계된 장군들의 이름이다. 개선문은 말하자면 피로 얼룩진 근대 프랑스 전쟁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개선문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인 샹젤리제를 지나면 대통령궁으로 쓰고 있는 엘리제궁이 나타난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과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이 살던 곳으로 1873년부터 대통령궁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권력을 상징하는 곳이며 이는 전쟁과 절대 분리될 수 없음을 지리적으로 보여준다.
그 다음 이어지는 곳은 파리의 심장이라고 할 콩코르드 광장이다. 서쪽으로는 개선문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튈르리 정원을 지나 루브르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고대 그리스 신전 모양의 프랑스 군인의 신전인 마들렌 교회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나폴레옹이 묻힌 앵발리드로 이어진다. 이 콩코르드 광장은 유럽의 온갖 문화적 기호와 상징들을 가져왔다.
원래 이 광장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장식하기 위해서 1755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엔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렸다. 1770년에는 왕세자(후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광장은 피로 물들게 된다. 기마상은 파괴되었으며 이름도 ‘혁명광장’으로 바뀌었다.1793년에는 단두대가 놓여지고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며 공포정치를 시작했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 무려 1,343명의 목숨이 이곳에서 사라지게 된다. 1795년 공포정치가 끝나자 광장의 이름은 피 냄새를 없애기 위해 ‘조화’ 혹은 ‘일치’라는 의미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광장의 가운데는 1836년 이집트에서 가져와(정확하게는 약탈해) 설치한 룩소르 신전에 있었던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다. 예전 로마의 시저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기념으로 오벨리스크를 뽑아다 로마의 여러 곳에 설치한 것처럼 이집트를 식민지화하고 그 전리품으로 그 나라의 상징물을 가져온 것이다. 그 밑에는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기록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왕정을 타도한 프랑스 민중들의 위대한 힘(!)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음이다.
왕정을 타도한 것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되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것까지 그들의 자랑으로 광장의 중앙에 우뚝하게 상징물로 세웠으니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실상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고도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나라라고 내세우니 그것은 자국민에게나 해당되는가보다. 이 오벨리스크는 사실 파리의 낭만과 자유의 뒤에 감춰진 야만과 탐욕의 치부인 것이다. ‘제발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 돌려주고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라!’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오벨리스크 양 옆으로 로마의 산 피에트로 광장을 본뜬 두 개의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모서리에는 프랑스 8개 도시(리옹, 마르세유, 보르도, 루앙, 낭트, 릴, 스트라스부르, 브레스트)를 상징하는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로마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베르니니가 만든 그 많은 로마 광장의 샘을 본떠 여기에도 로마를 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를 뽑아온 것처럼 로마의 영광을 파리에서 다시 보여 주려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광장의 샘물로 하여금 혁명과 처형으로 이어지는 피의 흔적을 씻어내고자 했음이리라.
이 광장은 북쪽으로 군인들의 신전인 마들렌 교회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나폴레옹이 묻힌 앵발리드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는 카루젤 개선문과 루브르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으로 이어진다. 콩코르드 광장을 중심에 놓고 보면 십자 모양으로 전쟁과 정복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열십자를 그리면 이 상징들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그 정복과 침략과 수탈을 미화하기 위해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서 상징들을 빌려온 것이다. 광장 중앙의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를 시작으로 루브르의 람세스 2세상을 비롯한 엄청난 이집트 미술품들이 하나의 축을 구성하고 있다. 그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는 1989년에는 루브르에 유리 피라미드를 설치하여 이집트 문화를 정복했음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도 이 유리 피라미드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여기서 끝낼 정도로 루브르의 새로운 상징으로 부각됐다.
마들렌 교회는 완연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모양이다. 프랑스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승리의 제단이다. 그리스나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개선문을 통해 들어와 승리의 제단에 그 영광을 바치고 화려한 승전 퍼레이드와 축제를 펼치도록 프로그램이 짜져 있다. 그 승리의 영광은 과거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그것을 닮고자 했다. 그래서 마들렌 교회를 파르테논 신전 모양으로 만들고 카루젤 개선문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모방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후에 카루젤 개선문이 작아 크게 만들었던 것이 지금의 개선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카루젤 개선문 위에 베네치아를 정복하고 가져온 콘스탄티노플의 네 마리 청동말을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상징도 뺏어온 셈이다. 로마처럼 싸워 이기고 그리스처럼 군신에게 경배하는 구조이다.
하지만 그 상징체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중심인물인 나폴레옹은 죽어 자신이 만든 개선문을 지나 남쪽 앵발리드에 묻힘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열십자 모양의 상징체계를 완성시켰다. 어쩌면 그 스스로 군신이 되어 프랑스의 영광을 지키려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프랑스 사람들이 나폴레옹을 앵발리드에 묻고 경배함으로써 그렇게 상징체계를 만들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는 드러내 놓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군신들을 찬양하지만 프랑스는 거대한 상징을 만들어 그 의도를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한편 동쪽의 바스티유 광장으로부터 올라온 혁명의 폭풍이 침략의 야수성과 콩코르드 광장에서 충돌한다. 그 혁명의 폭풍은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프랑스 왕들이 기거했던 루브르궁을 지나 카트린 드 메디치가 조성한 튈르리정원을 부수고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러 그 광장에 피를 뿌리고서야 멈추었던 것이다. 광장 옆의 튈르리 정원은 지금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변모됐지만 예전 왕궁의 정원이었다. 우리의 창덕궁과 같은 곳이다. 혁명 당시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루이 16세 일가가 베르사유궁에서 나와 이곳에 유폐됐던 곳이다. 그리고 그 옆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처형됨으로써 왕정시대를 마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 나폴레옹은 다시 제국의 황제가 됨으로써 이 상징체계들은 서로 중첩되고 충돌하면서 파리의 지층을 형성하였다. 다만 그 밑으로 아폴리네르가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거기에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고 했던 센 강만이 유유히 흐를 뿐이다. 사랑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피의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리라.
파리의 발상지이자 성소, 시테Cite 섬
파리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어딜까? 당연히 파리의 발상지이자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테 섬이다. 루브르를 나와 강변을 끼고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나온다. 루브르를 나오면 센강을 가로지르는 예쁜 다리를 만나는데 1801년 상류층의 산책용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예술다리Pont des Arts’다. 이 다리 위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시테 섬과 퐁 네프 다리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시테 섬의 입구에 걸쳐진 다리가 1607년에 완공되어 파리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퐁 네프 다리다. 돌로 된 단순한 다리인데 네오 카락스 감독의 「퐁 네프의 연인들」로 널리 알려져 유명한 다리가 되었다. 영화에서 오갈 데 없는 두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위로했던 곳이다. 그렇다. 어떤 장소나 건물은 그저 지리적인 장소나 건물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문화적 세례가 주어짐으로써 이미지를 얻고 상징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퐁 네프 다리도 단순히 강을 건너는 다리에 불과했지만 영화를 통해 불행한 두 연인들의 장소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연인들의 성소가 된 것이다.
시테 섬의 중심은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 Dame de Paris이다. 대성당을 지칭하는 말이 프랑스에서는 ‘노트르담’이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우리들의 어머니’ 곧 ‘성모聖母’를 뜻하니 직역하면 ‘성모 성당’ 정도 되겠다. 파리에만 노트르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리옹이나 사르트르나 여기저기 있으니 뒤에 파리를 덧붙였다. 바로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작품도 「노트르담 드 파리」이지 않은가.
사춘기 시절 안소니 퀸이 주연으로 나오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보고 노트르담의 그 음산하고 장중한 분위기에 압도당했었다. 그 중세의 고딕적 분위기는 종지기 콰지모도와 유랑연예인 에스메랄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숙명 같은 사랑과 잘 어울려 오랜 동안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처음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이탈리아 성당, 특히 로마의 산 피에트로나 피렌체의 두오모성당을 본 뒤에 파리에 와서 노트르담을 보니 시커먼 건물이 영 아니었다. ‘이게 그 유명한 노트르담이란 말인가?’ 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사암이나 석회암으로 지어 때가 타서 그런 것이었지만 내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럽에 살면서 다시 가서 보니 그 해가 세계문화유산 보존의 해라 마침 깨끗하게 외벽을 단장하여 성모처럼 눈부셨다.
이 대성당은 1163년 파리 주교 쉴리에 의해 착공되어 1320년경에 완공되었다 한다. 그 사이 무수하게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이 성당에서 이루어졌고 또 진행되었다. 성당이 800년의 역사가 된 것이다.특히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1804년 이 성당에서 이루어져 루브르에 있는 다비드의 대작 기록화가 그 당시의 모습을 전해준다. 이 성당의 압권은 고딕식 건물의 특징인 스테인드글라스다. 특히 장미창이라 불리는 3개의 창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대로 천국의 모습이다.
노트르담 성당 앞쪽 시테 섬 입구에 위치한 생트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더욱 아름답다. 이 성당은 예수가 처형될 때 썼던 가시면류관(정말일까? 진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구했다 한다.)을 보관하기 위해서 건립된 성당으로 위층이 온통 스테인드글라스 천지다.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성경의 내용을 1,134장의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렸는데 그 색채나 섬세함에서 노트르담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런데 우리가 시테 섬에서 파리의 지도를 보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찾고 있을 때 웬 허름한 신부가 우리의 모습을 쭉 지켜보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신부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아서 잡상인으로 알았다. 주는 것을 보니 조그만 알루미늄 판에 새긴 성모상이어서 더욱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 없다고 다시 주었더니 손을 내저으며 그냥 주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게 뭐냐고 물으니 성모상인데 당신들을 여행에서 지켜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당신들을 보니 멀리서 왔는데 힘들 때마다 이 성모상을 보며 위로를 받으라고 했다. 낯선 이방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한동안 가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파리의 성소聖所 시테 섬에서 성인聖人의 현신을 만난 것 같았다. 허름한 거지차림이어서 우리가 몰라봤던 것이다.
정겨운 파리의 산동네, 몽마르트Montmartre 언덕
우리에게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 물으면 서슴없이 몽마르트 언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파리의 중심축을 이루는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을 거쳐 루브르에 이르는 곳은 너무 위압적이고 피 냄새가 난다. 그리고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너무 거만하고 도도하여 이방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어서 지배와 식민의 역사를 공인하지 않았던가. 숱한 프랑스 인들이 이 성당에서 감사를 드리고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을 것을 생각하면 성모의 자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몽마르트 언덕은 어느 누구도 거부감 없이 받아준다. 그래서 우리의 오래된 골목처럼 정겨운 곳이다.
몽마르트 언덕은 원래 해발 128m 정도 밖에 안 되는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산동네였다. 19세기 중반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가 새롭게 정비될 때도 그곳은 산동네로 그대로 남겨졌던 곳이다. 그 뒤에 이곳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반 고흐, 베를리오즈, 비제, 살바도르 달리, 에릭 사티, 위트릴로,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이 살던 집과 골목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를 추억해 낸다.
오스만 남작의 도시계획은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을 없애고 마차가 다니기 좋은 직선 위주의 널찍한 대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폭동과 소요를 통제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른바 ‘근대의 수도’ 파리가 만들어졌는데 이곳 몽마르트 언덕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낙후된 지역이어서 도시정비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었다. 벤야민의 말처럼 도시정비가 ‘부르주아적 질서의 확립’이었다면 이곳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소외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몽마르트 언덕은 정비되지 않은 미로 같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우리는 지하철 아베스역에서 내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기로 하였다. 지상으로 나오니 아르누보의 거장 기마르가 디자인한 철제 아치가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현재는 이곳과 포르트 도핀 역에만 남아있다고 하니 역사적 유물임에는 틀림없다. 나무 덩굴 모양의 굽어진 철제아치가 예술의 도시 파리임을 상기 시켜 준다. 아베스 광장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민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 생기 가득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몽마르트 언덕을 그냥 걷기로 하였다.
사실 그렇다. 몽마르트 언덕은 무엇을 보기 위한 목적보다 그냥 산책하듯이 걷는 것이 좋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을 잃어도 무방하다. 골목을 지나면 미지의 어떤 것들과 마주치게 된다. 흥미로운 가게나 독특한 집, 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떤 예술가의 흔적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도 그랬다. 테르트르 광장의 주변을 거닐다가 아주 우연하게도 살바도르 달리가 살던 곳을 발견하고 감격한 적이 있었다.
벤야민은 그런 파리의 산책자에 대해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은 어떤 도취감에 휩싸인다.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걷는 것 자체가 점점 더 큰 추력을 얻게 된다. 그에 반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상점, 자그마한 바나 웃음을 던지는 여자들의 유혹의 힘은 점점 더 작아지며, 다음 골목, 저 멀리 으슥하게 우거진 나뭇잎들, 어떤 거리의 이름 등의 자력磁力에는 점점 더 저항하기 힘들게 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파리가 그러기에 자유롭게 산책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이고 특히 몽마르트 언덕은 더욱 그러기에 좋다. 마치 우리의 산동네 골목처럼 정겨움이 가득하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가장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곳은 정상에 있는 사크레 쾨르 사원과 거리의 화가들이 몰려있는 테르트르 광장이다. 사크레 쾨르 사원은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하얀색 사원으로 어디에서 봐도 잘 보이기에 그냥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이 사원은 1871년 파리 코뮌시절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성당이다. 혁명과 학살이 반복되던 어두웠던 시대에 늘 그런 희생이 있기 마련이고 역사는 말이 없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은 알리라.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그들의 가여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파리의 가장 높은 곳에 성당을 세운 것이다. 지금은 그 성당의 의미보다 파리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 인기가 있다. 성당의 주변은 전망을 보려는 관광객 외에도 자그마한 공연이 늘 있어 방문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한 번은 르누아르와 고흐의 몽마르트를 그린 그림에 풍차가 있어 알아보니 예전 이곳이 언덕이어서 제분용 풍차가 많았다는 것이 아닌가. 혹시 남아있는가 알아봤더니 ‘물랭 드 갈레트’의 풍차가 남아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마침 비까지 치적거리고 내려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곳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한참 만에 그곳을 찾을 수 있었는데 풍차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한때는 화가들이 모여들었던 댄스홀이었고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풍차로 유명한 곳은 로드 랙이 그림을 그렸던 ‘빨간 풍차’, 곧 ‘물랭 루주’다. 소설로, 영화로 널리 알려져 있어 지금도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몽마르트 언덕을 내려와 대로에 위치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정말 가게의 입구에 빨간 색의 풍차가 네온사인으로 선명하다. 파리에서는 여간해서 네온사인을 쓰지 않아 은은하고 품위가 있는데 이곳 물랭 루즈는 네온사인을 사용하여 눈에는 잘 띄지만 3류 카바레처럼 천박해 보인다. 차라리 예전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모습 그대로 간직했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몽마르트는 ‘파리의 시골’이라고 할까? 그런 정겨움이 남아 있는 곳이다. 미로 같은 골목이 그대로 있고 포도밭이 아직도 남아있어 시골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해 6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근대의 수도로서 산뜻한 도시 파리가 아니라 뒷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정겨운 곳으로서 파리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정말 몽마르트 언덕의 골목길을 다니면 정겨운 이웃들이 어깨를 부비고 모여 사는 우리의 산동네가 떠오른다. 여기를 보니 우리의 서울에도 뭐든 밀어붙이고 재개발 할 것이 아니라 산동네를 정겨운 장소로 남겨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파리에 가면 그리운 마음에 언제나 몽마르트의 언덕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도시와는 다른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미술관,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파리에는 170여개의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을 다 다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중에서 가장 볼만한 박물관 혹은 미술관은 세계 최대의 전시물을 보유하고 있는 루브르와 근대 미술이 집대성된 오르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식민지 침탈의 역사를 간직한 루브르보다 영혼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인상파 그림이 많은 오르세 미술관이 더 좋다.
사실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한 곳에 하루나 적어도 한나절은 투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관을 둘러보는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며 파리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더 좋다. 미술관의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사실 필자도 그러지 못하는 편이다. 아내가 미술을 전공하기에 오랫동안 미술관을 같이 다니며 조언을 받았다. 좋은 그림을 많이 보다 보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여 감상법을 터득한 것이다.
루브르나 오르세는 워낙 많은 조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나름대로의 집중이 필요하다. 즉 무엇을 주로 볼 것인가의 테마를 잡아야한다는 말이다. 루브르에서 우리는 그리스 조각인 저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와 「사모트라케의 니케」, 그리고 다비드와 다빈치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조각품이고 그림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인체묘사와 균형미는 이것이 과연 기원전 1세기의 작품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니케상은 힘을 느끼게 하는 날개의 역동적인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날개의 양감은 금방 허공으로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 부분이 없는 것이 오히려 몸을 더 가볍게 하여 하늘로 오르려는 상승감을 준다. 어렸을 때부터 날고 싶은 욕망을 많이 가졌던 아내는 루브르에서 니케상이 가장 보고 싶었었고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시집살이와 육아, 그리고 남편의 뒷바라지로 날개를 꺾이고 꿈을 접어야 했던 아내의 생애가 날지 못 하는 니케상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니케상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를 보며 가슴이 저려왔다.
그림으로 우리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다. 벽면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화폭에 100명이 넘는 인물들의 묘사가 생동감이 있으면서 사실적이다. 정말 색채가 아름다워 빛이 나는 것 같다. 복사본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원본의 아우라’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암스테르담의 왕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야경꾼들」을 보고도 느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야경꾼들의 모습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 지명도와 미술사적 가치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그림이다. 그런데 「모나리자」가 왜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있을까? 사연은 이렇다. 다빈치의 재능을 눈여겨 본 부르봉 왕조의 시조 프랑수와 1세는 만년의 다빈치를 루아르 강변의 앙부아즈 성으로 모셔왔다. 거기서 국빈 대접을 하면서 클로뤼세 저택까지 지어주는 등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거의 아버지처럼 모셨다 한다. 지금도 그곳 클로뤼세 저택에는 다빈치가 온갖 실험을 하며 만들었던 기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그 저택의 정원을 르네상스 정원으로 부른다. 이런 프랑수아 1세의 대접에 감동한 다빈치는 늘 그가 가지고 다니던 「모나리자」를 프랑수아 1세에게 주었고, 죽어서도 고국 이탈리아가 아닌 이곳 프랑스의 앙부아즈 성에 묻혔다. 그러니 「모나리자」의 국적이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전시물로 인해 정신을 차리기 힘든 루브르와는 달리 오르세 미술관은 차분하게 미술품을 감상하기 좋은 구조로 되어있다. 1848년∼1914년에 이르는 근대미술 2만점을 시대별, 작가별로 전시하고 있어 정말 ‘근대미술의 메카’라고 할만하다. 원래는 오를레앙 철도가 시작되는 역사驛舍였던 곳인데 이를 개조해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1986년에 개장했으니 미술관의 역사는 짧지만 전시 작품은 수준급이다. 특히 인상파 미술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마네, 모네, 드가, 고흐, 고갱, 르누아르, 세잔 등의 작품들이 작가별로 전시되어 있어 일목요연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실이 모두 70개가 넘으니 하루 종일 보더라도 다 못 본다. 더욱이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근대성의 수도’라는 파리의 분위기와도 어울려 파리가 아니면 보지 못할 작품 감상의 분위기도 갖추고 있다. 즉 파리가 근대의 중심이 되면서 모여들었던 미술가들,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그것이 만들어진 바로 파리에서 봐야만 제대로 본다는 말이다.
우리도 개장시간에 맞춰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작품을 봤지만 다 보지 못 했다. 특히 세잔이 그린 「사과」 연작이나 고흐의 그림들은 우리를 화폭에 붙잡아 떠나기 아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특히 고흐가 좋았다. 그 꿈틀거리는 붓의 터치는 영혼의 울림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고흐가 좋아 어느 날인가는 파리의 교외선을 타고 그가 마지막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가기도 했다.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르세 미술관에도 그가 그린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가 있는데 실제로 가보니 비슷했다. 고흐는 꿈틀거리는 붓의 터치를 통해 무생물인 대상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저녁 무렵 오르세를 나오니 파리는 저물고 있었다. 다시 파리는 아름다운 야경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킬 것이다. 우리도 에펠탑의 야경을 보기 위해 파리의 야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몽파르나스 타워에 올라가 야경을 감상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에펠탑이 각기 다른 색의 화려한 조명으로 빛을 발하며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어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했다. 저 다채로운 조명처럼 파리도 그런 도시다. 어떤 틀로도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도시다. ‘근대성의 수도’에서 ‘낭만’과 ‘우울’의 도시로, 혹은 ‘혁명’과 ‘자유’의 도시로, 혹은 ‘문학’과 ‘예술’의 도시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천의 얼굴을 가진 아름다운 도시, 그것이 파리인 것이다.
파리를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은 영원히 가슴 속에 파리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고 했다.
권순긍∙문학평론가. 저서 <우리소설 토론해 봅시다>, <역사와 문학적 진실>,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국고전소설>,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교육인적자원부 교과서 검정․심의의원, 대학교육협의회 대학입학전형 심의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고소설학회 회장. 세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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