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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 책 크리틱/김석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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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1건 조회 2,455회 작성일 11-03-25 14:58

본문

크리틱


■장종권 시집,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리토피아, 2010)

■박해미 시집, <꽃등을 밝히다>(리토파아, 2010)



서정이라는 선율 혹은 그 변주

김석준|시인․문학평론가

싸늘한 디지털 기호가 비등하는 21세기에도 서정은 유효한가. 합리성과 이용가능성이라는 심급 위에 펼쳐지는 이 시대의 자화상 내부에 서정은 아직도 숨을 쉬는가. 분명 21세기는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고 있다. 아니 삶-시간-세계란 언제나 유희적 가상에 사로잡힌 채 기호적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허나 그러한 현실적 지평에 불구하고, 우리는 서정적 인간학을 고동鼓動시켜 이 세계를 유미적으로 포월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점점 더 물화되고 경화되어 더 이상 쇼팽적인 서정적 선율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리스트적 음율에 친숙해져 따스한 인간학을 도외시하게 된다. 헌데 금번 상재한 장종권의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와 박해미의 <꽃등을 밝히다>는 서정적 정조를 따스한 감성으로 감싸 안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사랑의 전언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1.자연성 혹은 모순적인 현실:장종권의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순수한 몽상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장 행복한 시살이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안온한 꿈 혹은 자연으로의 회귀. 헌데 시인 장종권은 그 안온한 몽상 옆에 삶-시간-세계가 펼쳐내는 모순적인 현실을 병치시키면서 인륜적 가치를 문제 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상식도 조화가 되면 더 아름답다”(「그녀의 마당」 중)는 인식의 토대 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펼쳐내는데, 그것은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열망이거나 훼손된 세계 공간을 치유하는 행위이다. 금번 상재한 장종권의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두개의 지점에서 시말을 욕동시키는데, 한편으로는 자연이 펼쳐내는 서정적인 풍경을 세밀한 필치로 부조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학이 발생하는 선험적 조건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응결시켜가고 있다. 비록 시인이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 중)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종권의 시말운동은 자연의 究竟을 통해서 저 심원한 메타성을 문제 삼고 있다.


눈이 참 예쁩니다.

마음도 참말로 따뜻합니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1」부분

머릿속으로 어둠이 자꾸 밀려옵니다.

어둠에 밀리는 어둠이 힘에 겹습니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2」 부분


시인 장종권에게 자연은 시말의 비등점이다. 하여 그의 시말은 현상적 사실에 대한 전유적 국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뜻함”과 “어둠” 사이를 마구 요동치다가 그 무엇에인가로 휘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움에의 향성이다. 장종권에게 그리움은 삶의 조건이자, 생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어디에 있어도 그리움이 있으면 살 만하다.”(「박꽃 이야기․2」중) 시인이 자연과 자연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을 시말 속에 응고시킬 때, 혹은 원근법적 시선으로 자연의 근경과 원경을 동시에 아우를 때, 그가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발전이라는 가상에 사로잡혀 너무 많은 것들을 도외시하고 산다. 아니 역으로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연파괴적인 발전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자연(식물)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사태를 연기적 자장으로 수렴시켜 삶-시간-세계가 생명의 운동임을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화적 상상력 혹은 식물적 상상력. 시말은 꽃에서 꽃으로 이접되어 자연의 내밀한 생명현상을 응시하게 된다.


너는 꽃빛만 보아도

가슴이 그리 출렁이더냐 「다시 가을, 또 가을」일부

보았다.

그대가 나를 무수히 흔들다가 아무렇게나 던지는 그때,

그대의 가슴에서 뻗어 나오는 독사의 길고 긴 혓바닥.

―「상사화」 전문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개나리, 호박꽃, 꽃비, 박꽃, 상사화, 미루나무, 잡초” 등 식물을 통해서 시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꽃과 세계 사이사이에 시말이 있고, 의식이 있다. 말하자면 시인 장종권에게 꽃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유년기의 동화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그 무엇이다. 계절의 순환 혹은 “다시”의 욕동. 시인에게 꽃은 생을 성찰하는 대상이거나 떨리는 “가슴”이다. 하여 장종권에게 꽃은 자연을 닮아가는 매개물이거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삶-시간-세계를 조율하는 기제이다. 허나 21세기는 가상이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늘 “호박꽃도 순이도 없는 외로움” 그득한 “환타지에 미친 도시”(「호박꽃나라․4」 중) 속을 살아가게 되는데, 어쩌면 시인에게 꽃은 구원의 심급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이 꽃을 통해서 읽어낸 것은 바로 어머니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헌데 이러한 식물적 상상력을 통한 영혼의 정화 작용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말길 전체는 꽃이 주는 순결한 상징 쪽으로 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시간-세계에 도사린 기만적 현실성을 응시하게 된다. 왜 그런가. 더 이상 꽃이 순수기호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인가, 디지털화된 이 시대의 삶의 자화상 때문인가. 아니 역으로 파편화되고 개인적인 성향이 농후한 21세기는 더 이상 「박꽃 이야기」 연작 속에 언표된 “세상 모두 덮”고, “세상 모두 담”을 만한 아량이 없다. 우리는 철저하게 사이버공간 속을 배회하면서 고립된 그 무엇인가로 존재하게 된다.


내가 그의 한쪽 눈으로 그의 생각을 읽고 있을 때 그가 다른 쪽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알고 보니」 부분


비밀번호는 나의 목숨이고, 나의 미래이고 나의 그리움이다. 나는 비밀번호에 붙들린 셈이다. 나는 숫자들의 조합에 꼼짝 없이 갇혀버렸다. 하다보니 거꾸로 나 역시 그녀의 그리움 속에 하나의 비밀번호이거나, 하나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지 궁금해져 버렸다. 뻔한 일이다.

―「비밀번호」 부분


행복한 이 나라에 사시려면 존재세를 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니 인정해야 합니다.

그냥 존재만 하는 사람은 조금만 내어도 됩니다.

하지만 존재에 의미가 있는 사람은 세율이 높아집니다.

남보다 잘난 존재는 잘난 만큼 내야 하고

더 잘난 사람은 더 잘난 만큼 내야 합니다.

존재한다는 사실이 만인에게 빛이 되는 사람은

버는 대로 모두 내야 합니다. 그래야 공평합니다.

싫으시면 존재하지 마십시오.

―「존재세」 부분


21세기는 무릎 맞대고 살가운 정을 나눌 수 없는 싸늘한 공간이다. 이중성 혹은 내면과 외면의 괴리.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아니 “나는/나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거나 “나는 내가 아니다.”(「나는」 중)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디지털이라는 신기원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환상성 혹은 미지의 공간 또는 “초점”의 이동. 우리는 노드되고 링크된다. 거기에는 무성한 사실만 있을 뿐, 진실이라고는 없다. 시 「알고 보니」는 인륜성이 사라진 삶-시간-세계의 단면도를 “두 눈”에 응고시켜 현대인들의 초상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눈빛조차 숨기는 존재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생각”을 읽지 못한다. 알 수 없다, “알 수가 없다”를 외치면서 현대인들은 고독의 강을 건너고 있다.

시 「비밀번호」는 자기만의 비밀 공간 속을 살아가는 인간학적 형상을 예리하게 투시하면서 전도 왜곡된 삶의 형상을 “숫자”와 결부시킨 수작이다. 장종권 시인이 말한 것처럼, 21세기는 “비밀번호에 붙들린” 그야말로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마법의 통로 혹은 숫자에 응고된 삶-시간-세계. 역으로 우리는 숫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말도, 세계도, 그리고 그녀의 그리움도 숫자에 갇힌다. 우리는 0과 1 사이의 디지털 조합이 만들어낸 코드화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숫자로 표상된 비밀번호는 그 자체로 “밥이고, 옷이고, 집이”기 때문이다. 아니 역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학적 자의식에 의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가 삶-시간-세계 전체를 조율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전도된 세계 혹은 디지털 코드의 역습.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어쩌면 영화 <토탈리콜>이나 <매트릭스>처럼, 사이버네틱스나 퍼지 시스템, 즉 인공지능학이 최고조한 달한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사유의 유일한 주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여 사유 주체나 인간의 행동의 최종 심급은 디지털 코드, 즉 0과 1이다. 그것은 역으로 0과 1로 환원된 것만이 의미이고 가치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시 「존재세」는 장종권의 시 중에 가장 시적 발상이 특이한 시이다. 분명 시인은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 비판의 칼날을 벼리면서, 그 모든 인간학적 국면을 “평화로운 세상”(「호박꽃나라․5」 중)으로 이접시키기를 열망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능력 사회이다.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후기산업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변증법적인 운동이 지배하고 있다. 도구적 존재 혹은 소모적 인간형. 이 세계는 자본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 헌데 시인 장종권은 존 롤즈의 <정의론>에 언표된 것처럼,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공평”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내리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혹은 새로운 인간학적 가치의 정립. 시인은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를 열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존재가치”는 자본의 많고 적음에 의해 결정되는 아니라, “세금”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고귀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세금을 많이 내시오. 그것이 행복한 나라에 살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이오.’ 장종권의 이러한 시적 발상은 어리석은 것이거나 무모한 것처럼 비추어지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토마스 모어나 마르크스의 이상국가의 건설을 겨냥하거나 진정한 평등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예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행복의 조건은 자본의 유무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륜성의 실현에 있다.


부산은 왜 반도의 끝 부산에만 있어야 하고 서울은 왜 한강변에만 있어야 하나 부산이 어쩌다가 서울이면 안 되는 일이고 서울이 가끔은 부산이면 안 되는 일인가 부산으로 가다가 서울에 와 있는 나는 서울로 가다가 부산에 와있는 그대를 만나고 싶다 나는 정신병동으로 간다 「정신병동으로 간다」 부분


반역은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

반역의 십자가는 숨은 음모이다.

그리고 슬픈 유머이다.

모든 성자 역시 그렇게 떠나서

또 매양 같은 방식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래서 실패를 위한 우리들의 반역은

성공을 위해 아름다운 피를 흘리게 되고

피어서 겨우 알량한 꽃이 되었다.

껍데기로 핀 꽃이다.


―「똥개들의 반역」 부분

신은 간음을 통해 아들을 세상에 내려보냈고, 그 아들은 바람대로 무너져가는 세상을 구했다. 세상의 평화는 간음이라는 길을 통해 왔으니 간음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구원의 통로이다.

―「동문서답」 부분


21세기는 들뢰즈와 가따리가 <앙띠오이푸스>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문제 많은 세기이다. 물론 그 원인이 자본의 구조에 의해서 파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자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동적인 힘이다. 허나 이러한 능동적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분열하는 정신이거나 징환에 휩싸여 온전한 자기를 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실상이 아니라, “허상”(「저녁의 생각․3」 중)이다. 우리는 공간에 고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간 이동을 통해서 삶의 신기원을 이룩하거나 그곳에 당도하지도 못한다. 헌데 시 「정신병동으로 간다」는 이제까지 형성된 공간의 문제와 주체 문제를 “정신병동”에 응고시켜 가치전도를 시도하고 있다. 도플갱어 혹은 공간의 착종. 우리는 삶-시간-세계가 펼쳐내는 그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차원이 3차원이라는 시공간을 알 수 없듯이, 우리는 3차원의 관점에서 초공간의 원리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공간과 시간의 개념 안에 갇혀있거나 가다머적 선판단의 질곡 속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역으로 장종권 시인에게 저 분열증적인 광기를 표상하는 “정신병동”은 전도된 천재성이거나 존재의 새로운 개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간의 전복과 너와 나의 주객전도만이 관념의 전복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전환 혹은 새로운 세계의 정립적 국면. 우리는 “정신병동”에 도달한 순간에만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하여 전복은 “반역”으로 연결된다. 아니 시인의 전복적 의지는 모든 “실패”를 승인하면서 그 실패가 다시 성공으로 역전되는 반역이다. 시 「똥개들의 반역」은 의미심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시간-세계를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우리는 “똥개”다. 우리는 “죽음”이다. 우리는 “성공”을 믿으면서 모순으로 존재하는 “반역”이다. “음모 혹은 유머”. 생은 언제나 패러독스로 점철된 그 무엇으로 표상되는데, 우리는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을 피우게 된다. “부활”을 꿈꾸면서 혹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여성적인 것을 통해서, 장종권 시인은 반역이 성공되기를 희원하고 있다.

이 세상에의 모든 반역은 사랑이다. 아니 시인의 논법대로 사랑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그것을 반역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반역은 시인이 지향하는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사랑의 전언이거나 인간학적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 「동문서답」은 너무도 자명한 성령이나 진리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비껴가면서 사랑과 평화의 문제를 반추하게 만든다. 대저 “간음”은 무엇이고, “신성한 구원”은 무엇인가. 무릇 우리는 어느 쪽으로 휘어질 때, 완벽한 삶-시간-세계를 살아냈다고 말하는가. 신성한 진리의 저 지고한 기획을 우리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학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전개되지는 또한 우리는 모른다. 헌데 하나의 길이 있다. “간음”이다. 인간이면서 신이고,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님”. 허나 우리는 저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무엇을 예정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시인말대로 “동문서답”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거나 우리 이해의 한계를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2.시의 본령, 혹은 사랑과 평화의 전언:박해미의 <꽃등을 밝히다>

시가 말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일러 아름다운 시라고 하고 또 무엇을 일러 새로운 시라고 말하는가. 특발적인 새로움만이 좋은 시가 되는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가. 가제트적인 발상을 시말 속에 응고시킨 시만이 위대한 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박해미의 <꽃등을 밝히다>를 읽는 내내 시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왜냐하면 시란 그 자체로 소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시간-세계를 위무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의 그리움”(「입춘」 중)을 “푸른 노래”(「알토란」 중)로 승화시키면서, 시말은 이 세계 전체가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차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특히 박해미의 <꽃등을 밝히다>는 그 시적 성패에 앞서 이 세상에 산일해 있는 “어둠” 같은 절망을 “빛”(「관계」 중)으로 치환시키면서 “사랑은 둥그러운 것”(「일요일에」 중)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시인에게 시란 마음이 내는 길이거나 마음으로 투시한 이 세계의 아스라한 잔영이다. “따스한 마음씨”와 “손이 따스한 사람”(「따스한 손에 관하여」 중)을 그리워하면서 시인 박해미는 사랑의 전언을 이 세상에 흩뿌리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사랑과 평화의 사자이다.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또 다른 이웃들을 알게 되듯이

낯선 모습들 낯설지 않도록 자리 내어 주는

비밀한 풍경의 뒷베란다를 알게 되었다.

물을 많이 주어 밑둥이 뭉개진 가시선인장이

뒷베란다 그늘에서 상처를 치유 중이다.

귀 기울이면 내 안에서도 새순 꼼지락이는 소리 들린다 「앞뒤의 풍경」부분

넉넉한 어울림으로 다시 싱그러워지는 것은

삶이라는 그 지순한 향기 때문이다. 「장미와 김밥」부분

저마다 그만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생 잘 디뎌가고 있다.

―「덕양에서 봉두까지」 부분


“삶은 자체로 보이지 않는 눈물”(「시계」 중)로 점철된 것이거나 고통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허여된 삶-시간-세계란 지난한 그 무엇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 자체로 苦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생이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고를 짊어진 채 삶-시간-세계를 살아가는 운명의 형식이다. 헌데 시인 박해미는 그러한 생에의 형식을 응시 통찰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따스한 감성으로 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박해미 시인이 펼쳐내는 시말운동은 생 밑에 가라앉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거나 이 세상에 버려진 타자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박해미의 이러한 시적 태도가 시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때론 이 세계 속에 울체된 그 무엇인가를 세세히 기록하면서 때론 사랑과 평화의 전언을 통해서 생을 위무하면서 “삶”의 “지순한 향기”가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염원하는 그것이 바로 시의 본령이다. 하여 박해미의 시말길은 소통적 포월이다. 맹자의 불인지심不忍之心과 같은 마음을 이 세상에 흩뿌려 “생명 있는 모든 핏줄”들을 “사랑”(「화사한 봄」 중)의 심급 아래서 포용하고 있다. 따스하고 예쁜 마음이다.


밑둥이 잘린 나무의 나이테가 따뜻하다. 어느새 조화를 이룬 색깔의 중심에서는 아직도 삶의 온기가 묻어난다. 이승에서의 그 나무 온몸으로 상수리나무의 낮은 어깨를 떠받들고 살았다. 곁의 상수리나무 푸른 팔 하나가 밑둥 잘린 나무의 상흔을 어루만지고 있다.

―「숲에서」 전문


오이꽃에 앉은 이슬처럼

나도 맑아진다

―「장마 지나고」 부분


세월이 지나면 때로 꽃과 받침대의 역할이 바뀌기도 한다. 어머니 이른 새벽부터 받침대 위 꽃들처럼 부산하시다. 오늘은 내가 그 꽃이 받침대가 되기로 한다. 꽃들의 중심은 받침대,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받침대는 꽃이다. 꽃의 중심이다

―「받침대」 부분


삶-시간-세계를 맑고 투명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성공한 인생도 없다. 아니 우리는 “이슬”처럼 영롱한 영혼의 심급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화시키게 되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온 이유이다. 헌데 박해미의 시적 태도는 성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희망의 전언으로 키질하면서 혹은 “앙금 같은 그리움”(「탱자꽃」 중)을 문면에 안치시키면서 상호타자성의 원칙을 실현시키고 있다. 산다는 것은 상처와 친숙해는 과정이다. “조화” 혹은 위무. 우리는 그렇게 “삶의 온기”를 나누면서 삶이 만들어놓은 “상흔”들을 서로 어루만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박해미가 지향하는 시말운동의 본질이다. “사랑도 깊으면 사랑에게 짐”(「가을 연서-친구 선경에게」 중)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시인은 너와 나 사이를 따스한 인간애로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너를 불러 너의 지친 영혼을 위무하고, 너는 나에게서 사랑을 읽어내는 그 경지, 그것이 바로 박해미가 지향하는 시세계다. 헌데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점이 있다. 삶-시간-세계 속에 내재한 물상들의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대저 무엇이 중심이고 또 무엇을 일러 주변이라고 하는가. “꽃”과 “받침대”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가. 관계의 전도 혹은 역할의 순환.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유기적으로 결속하여 하나의 우주를 상생의 리듬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시인의 시살이 전체는 상극으로 치달아가는 이 세계를 상생의 기운으로 전환시키면서 신생하는 “새싹”들의 비등하는 “힘”(「이유」 중)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노오란 민들레,

사이가 좋다.

벚꽃 그늘 아래,

야채트럭이 편안히 쉬고 있다. 「평화」전문

건축현장으로 떠나시는 아버지를 위해 하나

기름 작업복 절절이 스민 작은 오빠를 위해 하나

너만은 공부를 해야 한다. 열병 앓은 딸을 위해 두개

중학생 막내를 위해 하나

같은 쓰며 학교 다니던 사촌언니를 위해 두개.

어머니, 이른 새벽이면 온통 도시락 밭을 가꾸신다.

그리하여 이삭마냥 별들을 줍게 하시고,

어시장 좌판으로 장사를 떠나신다.

―「도시락을 준비하는 아침」 전문


금번 상재한 <꽃등을 밝히다>의 지배적인 정서는 사랑과 평화이다. “꽃들도 따뜻한 사랑이 그립다”(「봄날」 중)는 전언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 박해미는 사랑과 평화의 사도이다. 헌데 시인의 그 사랑과 평화의 전언은 지극히 높고 숭고한 곳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이다. 하여 박해미의 그것은 이념이나 교설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실천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시 「평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사이”에서 빚어지는 진정성의 구현이다. 이를테면 평화란 사이의 운동이다. 아니 시인에게 사이란 넉넉함이거나 너그러움이다. 왜냐하면 사이란 그 자체로 여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여 평화란 나의 살핌이 아니라, 너를 너이게끔 만들면서 너의 너됨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맞다. 평화란 공간의 문제이지 결코 시간의 문제일 수 없다. 왜냐하면 평화란 하나의 공간 안에 다양한 삶의 양태가 공존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명한 그 무엇인가를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편안한 쉼이 바로 평화의 본질임을, “민들레”는 민들레끼리 사이좋게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이 이 세계의 진정한 평화임을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평화가 거대한 이념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랑도 세세한 일상 속에서 발견된다. 시 「도시락을 준비하는 아침」이 보여주는 어머니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박해미 시인의 사랑의 근원이자 실체이다. 사랑은 “도시락”이다. 사랑은 “도시락” 속에 새겨진 사연이거나 “새벽”에 떠오르는 “별”이다. 사랑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도시락”의 따스한 온기의 퍼져나감이다. 비록 “어시장 좌판”에서 생선을 팔지만, 사랑은 “이른 새벽”을 여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하여 사랑은 희생이다. 아니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 사랑은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가족들의 안녕을 위한 새벽을 여는 노동 속에 응고된 어머니의 사랑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그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는 여백이다. 마치 평화가 사이가 벌이는 여백 위에서 펼쳐지듯이, 사랑도 “별”과 같은 영롱한 꿈을 키우기를 염원하는 어머니의 너그럽고 자애로운 마음에서 비롯한다.


미움보다 사랑해야 할 날이

아직은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꽃」 부분


가슴 밑바닥 잔잔히 흐르는 숨결로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의 사랑을 익히도록 합니다.

가장 적은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기쁨으로 살기로 합니다.

그대를 위하여 촛불을 밝히고 싶습니다.

―「작은합창-동백원 아이들과」 부분


희망은 내 키보다 한 치수 위에 머물러 있지만

다시 일상을 위해 끈을 조금 느슨히 해둡니다

―「출근을 서두르며」 부분


역시 문제의 중심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삶-시간-세계를 조율하는 최종심급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사랑의 농도에 따라 그 존재론적 양태가 변화무쌍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랑의 밀도와 농도이다. 사랑이 민족우월주의로 치우치면 쇼비니즘이 되고, 사랑이 타자 쪽으로 휘어지면 범성적 겸애가 된다. 하여 사랑은 나와 너 사이서 빚어지는 작용인데, 그것은 양주와 묵적 사이의 거리이다. 사랑과 미움의 변증법 혹은 선과 악의 반복교체.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시 「꽃」은 인간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랑임을 고지하면서, 사랑이 바로 존재의 “이유”임을 증언하고 있다. 비록 사랑이 “불안으로부터 움터나 불안 속에서 성숙”(「화사한 봄」 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을 나를 굽혀 너에게 이르는 진정한 길이다.

하여 사랑은 확장이다. 사랑은 나의 나됨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너의 너됨을 보듬어 안는 측은지심이다. 시 「작은합창-동백원 아들과」는 그러한 사례의 적확한 예이다. 사랑은 실천이다. 사랑은 손에 손을 마주잡고 안아 넘는 포월의 정신이다. “그대의 아픈 살 속”을 치유하면서 혹은 “그대와 조화”(「가지치기」 중)로운 인간애를 형성하면서, 이 세상에 버려진 아이들이 온전하게 성장하기를 염원하는 바로 그 지대가 사랑이 위치하는 곳이다. 하여 사랑은 “희망”이다. 사랑은 너를 위해 “촛불” 밝히며 “잊혀진 꿈”을 다시 욕동시키는데 있다.

허나 그러한 사랑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일상”이라고 삶의 공간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일상은 치열할 뿐만 아니라, 경쟁이 지배하고 있다. 헌데 박해미의 「출근을 서두르며」는 적자생존의 경쟁적인 일상이 아니라, 한층 여유로운 일상적 삶을 야기하고 있다. 희망과 일상적 삶 사이를 가볍게 가볍게 건너가면서 시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운 인사”를 먼저 건넨다. <꽃등을 밝히다> 전체는 사랑과 평화의 전언으로 가득 차 있다. 헌데 이러한 시말운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인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용서”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것처럼, 용서의 恕란 내 마음을 미루어 너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다. 하여 용서란 공감대이자, 타자를 포월하는 정신성이다. 다음의 시 「해바라기」는 그러한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간직된 수작인데, 그것은 <꽃등을 밝히다>가 욕동하는 지점이자, 시인의 인간품이 자리한 지점이기도 하다. 하여 박해미의 시말운동은 비등하는 삶-시간-세계의 초상을 이해의 심급 아래 포월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전체를 사랑과 평화의 전언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너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세상쯤 잊을 수 있다.

지나온 날들 한 번쯤

돌아볼 수 있겠지만

이제는 뜨거운 가슴도 다 용서하고

너를 만나기 위해서는

한세상, 가벼운 몸으로

훌쩍 건너 뛸 수 있다.

―「해바라기」 전문



김석준∙1999년 ≪시와시학≫으로 시, 2001년 ≪시안≫으로 평론 등단. 시집 <기침소리>. 평론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 <현대성과 시>, <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 <무덤 속의 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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