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8호 (2010년 여름호)책 크리틱/ 강경희-중복 수록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8회 작성일 11-03-25 15:00

본문

크리틱

박섭례,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리토피아, 2009)

허금주, <오늘만 아름다워라>(리토피아, 2009)



꽃 같은 사람으로, 낭만적 사랑으로

강경희|문학평론가

1. 관조의 시선과 밀착의 시선

자연을 향하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관조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밀착의 시선이다. 관조의 시선은 ‘거리’distance에서 발생한다. 관조는 대상과 사물의 현상을 관찰하고 성찰하는 사유 방식이다. 근본적으로 관조의 시선 안에는 사물과 대상과의 관련성 속에서 자아의 내면을 발견하고 반영하려는 화자의 숨은 의지가 담겨 있다. 조선의 시문학 작품들이 자연을 관조함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려 했다는 점을 보더라고 관조는 세계의 발견과 의미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에 반해 밀착의 시선은 자아와 사물 사이의 거리를 소거erasure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거리가 없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아와 대상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라고 인식할 때 거리의 시선은 발생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밀착의 시선을 획득하고 있는 작품들에서는 자연을 객관화하고 관념화하기보다는 구체적이며 주관화된 삶 그 자체를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밀착의 시선 속에 놓인 자연은 생동하는 구체적 삶과 생활을 노래한다.

박섭례가 그리고 있는 자연은 밀착의 시선이 낳은 살아있는 풍경화다. 그의 붓이 그려낸 풍경화는 안견의 그림보다는 김홍도의 그림에 가깝다. 그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인다.


서책을 배우는 아이들처럼

밤 내 개구리들이 책 읽는 소리

가갸 거겨 나냐 너녀

임자도 방언을 배우는 제비들도

가갸 거겨 나냐 너녀

노인대학에서 가갸 거겨 나냐 너녀

책 읽는 소리에 임자도 봄날은

오랜만에 사람 사는 동네 같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4-개구리가 가갸 거겨」 전문


“서책을 배우는 아이들처럼” “밤 내”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임자도 방언을 배우는 제비들”, “노인대학”의 노인들, 그 모두가 흥겹게 “가갸 거겨 나냐 너녀”를 소리 내어 읊는다. 인간과 자연 모두 하나의 목소리로 “책”을 읽는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책을 읽는 소리에서 시인은 “임자도 봄날”을 느낀다. 생명의 출렁거림, 합창처럼 울리는 목소리들, 자연과 사람 모두 생성의 봄날을 힘차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박섭례에게 자연은 인간과 밀착되어 있고, 삶에 뿌리박힌 생활의 풍경이다. 그가 자연을 느낀다는 것은 곧 인간을 느끼는 것과 다름없다. 박섭례에게 자연과 인간은 동일성의 지평 속에 묶인 공통감각의 세계이다.


갯벌은

날마다 산란 중이고

입덧을 하느라 끄윽끄윽

갯벌은 비린내 천지다

물이 빠지고 나면 갯벌은 하체를 다 드러내고

쑤-욱 잘도 낳는다

작은 게들이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쏟아지면

긴 부리 황새는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고

갯벌 깊숙이 은둔 중인 세발낙지는

촉각을 세우고 물때를 기다린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9-갯벌」 부분


이 시의 자연은 온통 의인화되고 있다. “갯벌은”, “산란 중이고”, “입덧을”하며 “하체를 다 드러내고” 있다. 즉 갯벌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인이다. 여인은 “날마다” 입덧과 출산으로 바쁘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인은 “하체를 다 드러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갯벌의 여인은 “작은 게들”을 키우고 “긴 부리 황새”를 살찌우게 한다. 가식도 허영도 존재하지 않는 생명이 들끓는 자연의 요동이 온통 “비린내”를 풍기며 진동하는 것이다. 박섭례는 생명의 신성함과 소중함을 추상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에게 자연은 대타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연에 대한 그의 인식은 구체적인 살의 감각으로 체득된 것이다. 이는 아마도 박섭례의 고향이 신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삶의 터전은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 아닐까 판단된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라는 시집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임자도”는 그의 삶의 핵심적인 거점이다.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임자도로 “귀향”했으며, 그곳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고자 기대한다. ‘자연인’이라는 말의 뉘앙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자연과 인간은 하나여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2. 행복한 노동의 자연

자연인의 눈으로 바라본 자연의 모습은 어떠한가. 박섭례에게 자연은 역동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밝고 힘찬 긍정의 세계이다. 탄생과 성장, 병듦과 늙음, 죽음과 소멸의 모든 것을 간직한 자연은 그에게 허무와 무상의 세계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가 인식하는 자연은 “탱탱하게 발기된 꽃대를 쏘아 올려/관능의 뜨거운 욕망을 쏟아내고 있”(「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3 -튤립」)는 에로스의 자연이며, “육탈을 끝내고 육젓으로 오젓으로/식탁 앞에 희망을 사는”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4 -전장포」) 건강한 노동과 땀의 얼룩진 희망의 자연이며, “눈인사도 없이 덜커덕덜커덕 가고/염려가 되는 제비들 마차를 따라가며/괜찮아요? 괜찮아요?”(「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2 -팔월의 아침」) 로 대답하는 소통의 자연이다. 박섭례는 자연에게서 사랑과 희망과 소통의 정신을 배운다.

이처럼 맹목적이라 할 만큼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동일화되려는 그의 태도 이면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세속의 삶에 대한 짙은 회의와 반성의 시선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마을에 파충류들이 몰려온다

영화 제목쯤이나 될 법한 현실이 섬뜩하다

제초제는 풀들의 씨를 말리고 농사철마다 뿌려대는 농약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보다 더 무섭게 종들을 살육한다

안전하고 싶어서 사람과 섞이고 싶어서

인간의 마을에 새끼를 치며 번식하고 있는 뱀들이

동면에서 때어나 첫 외출을 했는지

―「인간의 마을에 파충류가 몰려온다」 부분


더 많은 수확과 이익을 위해 제초제를 뿌려 대는 사람들, 자연을 향해 농약을 살포하는 행위를 화자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보다 더 무섭게 종들을 살육”하는 잔혹한 일이라 말한다.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무참하게 죽이는 사람들을 시인은 “파충류들”, “인간의 마을에 새끼를 치며 번식하고 있는 뱀들”이라 칭한다. 사악한 파충류들처럼 자연의 질서와 평화를 깨어버린 파괴자로서의 인간을 그는 증오한다. 또한 “다음해 들판을 식민지로 만든 침략자 앞에/우리 종들은 저항도 못해보고 죽어갔다/해가 바뀔수록 강대국이 된 외래종들 앞에”(「종들이 사라진다·1」)라는 구절처럼 강자의 논리와 규칙만이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농촌의 현실에 대해 그는 분개한다. 이처럼 박섭례는 자연을 향해 자행되는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인간의 이기심과 자본의 논리만을 강요하는 모순된 사회의 가치를 비판하고 있으며, 세속의 가치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는 비열하고 비정한 인간성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향하는 이상적 자연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살아가는 세계이다. 이는 건강한 노동과 공존의 철학이 있는 순수하게 지속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어린 떡잎들이 생쥐처럼 햇볕을 갉아 먹다가

인기척에 놀란 표정으로 일제히 좌향좌를 하고

빤히 쳐다본다 가까이 다가서자 자꾸 뒷걸음을 친다

애들아 주인이야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떡잎들과

눈을 마주친다 예쁘다고 만져주고 다독거리고

한참을 지내다 보니 믿어보겠다는 안도감인지

떡잎들이 쭈욱 어깨를 펴고 기지개를 켠다

사랑한다는데 예쁘다는데 믿지 못한다면

삐뚤어진 게지 단단히 비비 꼬인 거지

식물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몸으로 느끼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이야말로 병인 게지

처방전도 없는 불치병

―「텃밭에서」 부분


박섭례는 자연과 인간의 진정한 소통은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사랑은 “눈을 마주치”는 것이며 “예쁘다고 만져주고 다독거리”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는 자연을 향해 인간이 순수하게 마음을 열면 자연 또한 의심과 경계를 풀고 “안도감”으로 인간을 맞아 준다고 역설한다. “식물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몸으로 느끼는데”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사랑은 불신을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되돌리는 경이로운 체험을 선사한다. 보잘 것 없는 “어린 떡잎”도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정작 인간은 “불신”의 “병”으로 인해 자연의 진정한 손짓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박섭례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향해 인간의 몸과 정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1 -제비」는 이러한 그의 인생관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나뭇가지에 순한 잎들이 생쥐처럼 쫑긋쫑긋 돋아나고/청보리와 유채꽃이 수채화 같은 들녘에 앉아//봄볕을 무릎에 눕히고 어머니의 흰머리를 뽑아주듯/흰머리를 뽑아주자 봄볕도 꾸벅꾸벅 나도 꾸벅꾸벅”이라는 표현처럼 자연과 인간은 서로 교감하며 동일화된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몸짓처럼 자연과 인간 또한 서로를 아끼고 어루만지는 행복한 교감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임자도는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과 갈 수 없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꽃과 같은 사람”, “꽃 같은 사람”(「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튤립․1」) 이다. 즉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 꽃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임자도에 방문할 수 있는 것이다. 박섭례는 꽃의 순수한 마음, 작은 생명체들이 전해준 따뜻한 위로, 행복하게 식구들을 위해 밭을 일구는 이웃들의 건강한 노동이 숨 쉬는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다. 그의 노래가 맑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의 마음이 바로 사랑의 꽃이기 때문이다.


3. 감상적 자아와 낭만적 자아

허금주의 <오늘만 아름다워라>는 그 제목부터 낭만적 풍미를 가득 풍긴다. 낭만성은 인간의 정서와 감성에 기초한다. 낭만성의 발로는 심리적 동경과 이상적 세계를 향한 인간의 감정적 충동과 분출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때문에 감상적이며 감성적 태도는 낭만성의 한 축을 형성하는 기본원리로 작용한다. 1920년대의 한국시단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퇴폐적 낭만주의, 허무적 낭만주의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낭만성의 파토스적 에너지는 결코 이성적이며 주지적 관점에서는 획득할 수 없는 무한한 자유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소홀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낭만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자유의 정신을 내포한다. 그것은 재단되고 질서화된 세계가 아니라 충동적이며 분방한 자유의 이념을 표방한다. 비록 20년대의 시단이 보여주었던 낭만의 가치가 어둡고 자조적이며 퇴락한 것들에 대한 상념과 애착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지라고 그 출발은 감정의 자유로운 발로와 창조적 영혼에 대한 갈망, 이상적 세계에 대한 희구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금주의 시집을 일관하고 있는 정신은 감상과 낭만성에 대한 고찰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출몰하고 있는 감성의 파동을 기록하고 있다. 시인의 내면적 감성의 목록들을 살펴보면 ‘눈물’ ‘어둠’ ‘비’ ‘거리’ ‘서러움’ ‘사랑 ‘고독’ 등과 같이 다소 우울하고 슬픈 감정의 산물들이다.

비가 내립니다 창백한 사랑이 못 다한 마음을 하늘로 올립니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섞이어 나 태어난 땅밑을 두드립니다 좁은 길목마다 기진한 말씀의 편력이 떨고 있습니다 어둠 속 불빛마저 혼미하여 빗소리만 눈물 끝에 살로 부비다가 아득히 깊은 어둠을 풀어 내립니다

―「눈물에 녹다」 전문

“비가 내”리고, “창백한 사랑”이 있고, “길목마다 기진한 말씀의 편력이 떨고 있”으며, “어둠 속 불빛”은 “혼미”하고, “눈물”로 “깊은 어둠을 풀어 내”는 화자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는 상처받은 여린 감성적 자아의 고백을 드러내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내리는 비는 눈물이 되고, 창백한 사랑은 어둠 속 혼미한 불빛으로 은유되고 있다. 비, 눈물, 흔들리는 불빛, 떨고 있는 말씀, 어둠의 공간은 모두 한없이 감성화된 주체의 의식을 반영한다. 이러한 감성적 인식의 밑바탕에는 외부세계에 대한 이지적 태도와 저항과 공격의 의지를 상실한 위축된 자아의 심리가 깔려 있다. 이는 외부세계에 대한 자아의 반응이 지극히 수동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듯 수동적이며 감상적인 반응양식을 보여주는 것일까. 허금주에게 그것을 상처의 기억과 연결된다.


멀미와 빈혈로 뒹굴었다

끝없이 유서를 쓰면서 소등한 오늘

그러나,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다이얼의 비밀번호 교묘히 맞추던 날

가볍게 허물어지던 문의 침묵

밀물이 왔다

허기진 배를 참아내는 아비가 쓰러지고

무섭게 바람을 일으키는 어미의 유서

손을 흔드는데

젖에 굶주린 아기가 새파랗게 운다

나는 눈물에 녹으면서 유서의 눈물을 녹인다

―「장롱」 부분


끝없이 썼던 “유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는 끔찍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멀미와 빈혈로 뒹굴었다”, “허기진 배를 참아내는 아비”, “무섭게 바람을 일으키는 어미의 유서”, “젖에 굶주린 아기가 새파랗게 운다”와 같은 구절이 함축하듯이 처절한 가난은 ‘나’의 가족의 삶을 처절히 유린해버렸던 것이다. 죽음보다 지독한 가난의 악몽 속에서도 “그러나,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라고 고백하듯이 ‘나’는 끊임없이 허물어지는 슬픔을 온몸으로 경험해야만 했다. ‘장롱’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끔찍한 가난은 슬픔에 유폐되어 버린 병든 자아와 끊임없이 대면하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었음을 드러낸다. 가난은 가족을 망가지게 하고 죽음을 벗으로 삼아야하는 어둠과 상처의 뿌리인 것이다. 이렇듯 상처의 기억은 허금주의 시의 모태로 작용한다. 허금주에게 상처의 기억은 세상으로부터 타자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정신적 트라우마로 이어진다.


버리고 버림 받았다

내 살아있는 골목

너를 만날지도 모르지

만나도 내 눈길 피할 테지

그날 죽어버린 손목시계, 벌어진 입술, 흔들리던 어깨,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저문 길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와 섞이어 머리칼 쥐어뜯고 누워 칼을 잡는다

―「저문 길」 부분


“버림받았다”는 인식의 기저에는 타자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의해 이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강제적 상황에 의해 “버림 받았다”라는 생각은 삶에 대한 화자의 태도가 지극히 방어적이며 수동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별의 상처는 “죽어버린 손목시계”처럼 시간의 의미를 상실하게 했으며, “흔들리던 어깨,”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처럼 떨림과 어둠의 공간속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그럼으로써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자폐의 방식으로 세계로부터 차단시킨다. ‘홀로 있음’ ‘빈방의 기억’, ‘격리의 심리’ 등은 이러한 시인의 태도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허금주가 지향하는 낭만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밀의 추억’ ‘서럽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경험’에 대한 그리움이다.


4. 낭만적 사랑으로 태어나는 황금새


대학로를 걸었다

서로의 비밀스런 추억

몰래

너무나 멀리 혼자 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미끄러져 간다

살갗만 스쳐도 꿈을 꾸는 여자의 가슴

앞으로 남은 날들

만두 속처럼 터진다 해도

라라라 ~ 라라 ~ 라라 ~ 라라라

<그대를 내 맘 속에 유혹하고 싶어>

―「오늘만 아름다워라」 부분


“서로의 비밀스런 추억”을 간직한 채 화자는 “대학로를 걸었다” 화자의 사랑은 과거의 사랑이다. 과거의 사랑은 현재에까지 지속되지 못하는 하나의 추억일 뿐이다. 그런데 이 비밀스런 추억을 화자는 곱씹는다. 이별은 상처이며, 슬픔이며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남은 날들/만두 속처럼 터진다 해도” “살갗만 스쳐도 꿈을 꾸는 여자의 가슴”으로 비밀스런 사랑을 다시 하고자 희구한다. “<그대를 내 맘 속에 유혹하고 싶어>”라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허금주의 사랑은 혼자 꿈꾸는 사랑이다. 현실의 사랑은 상처와 눈물과 어둠으로 얼룩져 있지만, 꿈의 사랑은 여성으로서의 감성과 본능을 그대로 간직한 낭만적 사랑을 의미한다. 혼자 꿈꾸는 사랑은 아픔도 이별도 불가능도 없는 아름다운 절대적 사랑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해독 되지 못한

여름의 육체가 숨 가쁘게 허덕였어

찢기워 불타버린 사랑은 바다에 던져두고

마법보다 운명보다 더 항상 멀리

사랑을 열매 맺자고 하얀 거품들

내 몸을 입술로 덮었어

살 속에 둥지를 튼 여름

―「비닐하우스」 부분


허금주에게 사랑은 “마법보다 운명보다 더 항상 멀리” 있는 절대적 대상이다. 모든 육체를 소진하도록 몰입하는 사랑은 “찢기워 불타버린 사랑”으로 표현되듯이 온 몸의 사랑이며 모든 것을 던지는 전폭적 사랑이다. 허금주는 사랑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의 사랑은 지성으로 해독되지 못하는 것이며, “숨 가쁘게 허덕”이고 모든 것 태우는 저돌적 사랑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은 현실 안에서 좌절되고 버림받는 상처의 사랑이다. 즉 은폐된 자아가 꿈꾸는 사랑은 정열과 욕망이 끓어오르는 불같은 사랑이다. 하지만 현실적 자아의 사랑은 침묵의 언어로만 대답해야 하는 비극적 사랑이다. 이 상충하고 대립하는 사랑이 시인을 병들게 하고 또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에게 사랑은 독이자 약이 되는 파르마콘parmacon 같은 것이다.

허금주 시인의 낭만성은 이러한 이중적 자아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고 해소하려는 그만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랑은 불안하지만 정열적이다. 실패하지만 물러서진 않는다. 위축되었지만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사랑이 바로 시인의 운명임을 고백한다.


고요히 숨져가는 지상의 시간, 홀로

천 길 쯤 파고 들어간 곳에서

날마다 한 줄의 문장을 바쳤던

헐어 찢어진 사랑의 속살

한쪽으로 비틀린 사랑의 입술

깊은 밤, 나는 그를 뿌리째 없앨 거다 우우우

바람이 발길질을 한다

먼 데를 휘돌아 오는 이의 몸짓을 믿고 싶다

아아, 그를 기다린다.

―「대추나무」 부분


시인이 기록한 “한 줄의 문장”은 고통이 만들어 낸 “헐어 찢어진 사랑의 속살”에 다름 아니다. 홀로 외로운 “지상의 시간”과 싸움하면서 “천 길”의 어둠과 대면하면서 시인은 “비틀린 사랑의 입술”로 말한다. 사랑이 상처의 기억과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시인은 “바람의 발길질”을 참고 견디어 내며 “먼 데를 휘돌아 오는” 언어의 “몸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허금주에게 시란 어떻게 탄생하는가? “상처의 뿌리에서 태어나는 황금새여”라고 그의 시 「동굴」에서 말하고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시의 언어는 상처로부터 그 상처의 사랑으로 인해 빚어지는 것이다. 황금새를 기다리는 시인은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자이다. 그의 낭만은 처절한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동반한다. 그가 감상의 포로가 되지 않고 낭만적 사랑의 힘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세계를 구축해내기를 바란다.


강경희∙숭실대 박사. 현재 숭실대, 산업대 강사. 계간 ≪리토피아≫ 편집위원. 저서 <타자의 언어학>,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 <살아있는 말들의 대화>, <불온한 시대와 공존하기>.

추천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