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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010년 가을호) 책 크리틱/ 전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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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0회 작성일 11-03-2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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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배지영 소설집, '오란씨'(민음사, 2010)
■한지혜 소설집,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실천문학사, 2010)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전철희|문학평론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감각을 예술이 제공할 때가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가 존재하는 까닭이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름마다 공포영화가 양산되는 까닭은 사회 전체가 한 편의 공포영화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통속극에서 ‘파애破愛’와 이혼이 넘쳐나는 까닭은 사회에서 사랑 혹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 질문들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사회는 공포가 넘치고 소통이 단절되어있다. 그래서 공포영화나 드라마와 방법은 다르지만 공포와 소외를 섬뜩하게 그려낸 배지영과 한지혜의 소설은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1. 공포의 정치학
배지영의 첫 소설집 표제작 「오란씨」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의 성장환경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아버지는 술 먹고 아내를 때려죽인 불한당이고, 마을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류경사는 아버지의 집에서 개고기를 공짜로 얻어먹기 위해서 그를 무혐의 처리해버렸다. 한편 술집에는 거대한 가슴을 가진 노랑머리와 미스코리아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설희가 있는데 류경사는 술집에서 성상납을 받으며 그녀들을 학대하는 일이 다반사다. 설희를 사랑하는 ‘그’의 형은 얼마 후 류경사를 죽인 뒤, 그녀와 함께 도망치다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그가 패배자(Looser)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벤 존슨이 이기길 염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벤 존슨의 예선 기록이 칼 루이스보다 부진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의 불길한 버릇 중 하나는 늘 질 것 같은 팀만 응원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이 가뜩이나 별 볼일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런 버릇에서 파생되는 일종의 나비효과인지도 몰랐다.(45쪽)

따라서 이 인용문은 반만 맞았다. 그가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 것 같다는 추정은 맞았지만 그 원인은 “질 것 같은 팀만 응원”하는 그의 버릇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패배자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출생배경은 본인도 패배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면 그의 “버릇”은 허위의식에 빠지지 않은 패배자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인용문의 “버릇”을 “패배자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자. “그의 생이 가뜩이나 별 볼일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패배자로 태어난 자의 숙명에서 파생되는 일종의 나비효과인지도 몰랐다”.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식당의 백치 여자를 좋아하고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며 사는 트럭운전사로서의 “별 볼일 없”는 삶이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배지영은 사회의 경쟁이 불공평한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사회적 지위는 대물림된다는, 너무도 현실적이라서 이제는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결론으로 소설을 끝맺지 않는다. 그녀는 경쟁을 하기도 전에 패배자로 낙점된 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서 치밀하게 고찰한다. 그녀의 소설에는 강한 자로 보이는 악역들, 예컨대 가정과 마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류경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사회에서 존경받고 안정된 삶은 이룬 승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사실 혐오스러운 범죄자, 부패 경찰에 지나지 않는 그들은 승리자가 아닌 가해자다. 그들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처럼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패배자들이었던 것이다. 추측건대 아마 별로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패배자로 태어났을 “아버지”는 언젠가 두 가지 삶의 방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보신탕집을 하면서 그저 그런 가장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술을 진탕 마시고 가족들 사이에서라도 독재자로 군림해 볼 것인가. 류경사에게도 비슷한 성격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촌 동네 경찰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향응을 제공받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부패 경찰로 편하게 살 것인가. 그들 역시 패배자를 벗어날 기회는 주어진 적은 없었다. 90년대 인기 프로였던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패배자들에게는 이지선다의 선택지 밖에 없다. 피해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가해자로 살 것인가. 전자를 골라 평생 나아질 것 없는 막막한 삶을 살든, 후자로 살다가 언젠가 비참한 최후를 맞든 그들은 패배자로서 삶을 마쳐야만 한다.
배지영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뒤엉킨 패배자들의 세계를 그린다. 때문에 그녀의 책에서 「오란씨」와 같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파파라치」, 「어느 살인자의 편지」와 같은 가해자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파파라치」의 “남자”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사는 34살의 백수다. 그는 자신이 엑스트라로 일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못할 짓이에요, 그거. 바닷물에 창하고 엑스트라하고 떨어지면 누굴 먼저 건지는지 알아요? 창을 먼저 건져요. 조합에서 뜯기고 교통비 나가고 그러다 보면 남는 것도 없고 연기 못하는 것들 만나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요? 약값이 더 나가요.(147쪽)

소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는 엑스트라로 사는 그의 삶 역시 이미 패자로 낙점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 볼일 없는 프리터로 계속 살 것인지, 부도덕적인 일을 범하면서라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가해자로 살 것인지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그는 40대인 파파라치 파트너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담아 엽기 사이트에 올려 돈을 벌며 무고한 사람이 폭력을 당해도 그것을 그저 카메라로 찍기만 하는 부도덕한 ‘가해자’가 되었다. 「어느 살인자의 편지」의 살인자는 「오란씨」와 같이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오란씨」의 주인공과 같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삶을 선택했고 살인범이 되었다. 이 두 작품이 한 소설집에 실렸다는 사실은 같은 배경에서 태어나 패배자로 낙점된 사람들이 피해자도 될 수 있고,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그러나 승리자는 될 수 없다는)배지영의 냉정한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모든 패배자가 잠재적 가해자(범죄자)라면 패배자가 양산되는 한국에서 흉악범죄가 들끓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연이어 일어나는 흉악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을 때, 여당과 보수언론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요즘 보수정권의 치부를 가리기에는 최선을 다하는 보수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를 거들먹거리며 흉악범들의 신상과 사진을 공개하는데 앞장서고, 철거민들을 강경진압 해 7명이나 학살한 여당은 피해자의 ‘인권’을 말하며 흉악범을 악마화하며 더 심한 처벌을 주장하는 등의 어색한 일들을 연달아 보고 있다. 흉악범을 줄이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사회에서 패배자로 낙인찍은 이들이 재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겠건만 그들은 그런 대책을 거부하고 격리와 처벌만을 역설한다. 괴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너희는 가난한 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지극히 정치적인 그들의 행위는 공포의 뇌관을 제거하지 않고 사람들의 머리에 공포만 심어주게 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더 가중된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버스」와 「몽타주」는 상징계적인 공포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묘사한 작품들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죄가 없다. 그들은 그저 열심히 살기 위해 아침부터 버스를 탔을 뿐이고(「버스」), 기자에게 속아 인터뷰를 한 번 당했을 뿐이다(「몽타주」). 그러나 그들은 불안하다. 이 사회에는 흉악범들이 넘치고 언제 누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을 조르는 공포가 전적으로 거짓된 것은 아니겠지만, 이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흉악범들도 우리와 같은 패배자였다는 사실과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숨기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게 된다. 배지영의 소설은 이런 이데올로기와, 패배자와 가해자로 분열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공소장이다.

2. 사랑을 넘어서는 소외
한지혜의 2번째 소설집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의 첫 소설 「소리는 어디에서 피어나는가」에는 장애인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불구에 발기불능의 몸을 가졌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채울 수 없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육교를 올라가 여자들에게 부축을 요청하며 스킨십을 하는 것 정도밖에 없다. 여자는 하루아침에 소리를 잃어버린 귀머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소리를 ‘느끼는’ 능력을 얻는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소리였다(…)소나기 소리, 바람 소리, 꽃망울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 그런데 이전의 소리와는 조금씩 달랐다. 더 미세하고, 더 광범위한 소리가 여자의 몸에 닿았다(…) 전에 들을 수 있던 소리뿐 아니라 그 영역을 넘어선 소리도 때로는 들렸다.(27,28쪽)

여기서 “소리”는 청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소리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촉각이 예민해진 여자가 느낄 수 있게 된 진동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설정을 위해 그것을 청각적 소리와 구분해서 촉각적 소리라고 명명하고 두 가지를 비교해보자. 청각적 소리를 대표하는 것은 말(언어)이다.

제일 먼저 멀어진 것은 또래 친구들이었다. 함께 깔깔거리거나 속닥속닥 비밀을 나눌 때 비로소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모든 언어가 형식으로만 다가왔다. 알아듣기는 하지만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었다.(18~19쪽)

언어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가 세상에서 격리당해야 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사회에 소통이 부재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 소설에서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일종의 제의로 그려진다. 소통이 사라진 현대인들은 그 제의를 통해서만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문명의 상징이었던 언어는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증거로 전락해버렸다. 반면 촉각적 소리는 원초적이고 정직하다. 그것은 거짓이 없는 진실된 관계를 상징한다. 사회에 물든 인간의 말을 통해서는 발생될 수 없는 촉각적 소리는 종종 신비스러운 자연의 공명으로 소통에 목마른 그녀의 몸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녀는 “몸이 뜨거워 아무 때나 자위를 하는, 갈 곳 없는 여자”(25)로 취급받으며, 가사도우미가 되고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자가 빈 콘돔에 자위를 하며 내는 신음소리가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여자의 성감대를 자극하게 되고 이에 자극받아 그의 방으로 간 여자는 발기되지 않는 성기를 어루만져주다가 함께 자위를 시작한다. 제한적인 소통이 가능한 때조차 그것이 완벽한 결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 장면은 남녀가 각자 절정을 맞으며 끝이 난다.
한지혜는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그려낸다. 근대적 사회는 사람들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은 「소리는 어디에서 피어나는가」의 남녀나 「실종」의 노인과 아이처럼 사회에서 벗어난(버림받은) 이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들은 현대 사회에서 소통이 사라진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단지 소유물(택시)과 직업(드라이버)으로 인간이 명명되는 사회의 물신숭배(「미스터 택시 드라이버」)와 인간보다 돈(개발)을 중시하는 사회풍토(「실종」)에서 소통의 부재가 유래한다고 암시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 속에서는 정말 소통이 불가능할까. 현대 사회에서 가장 숭고한(계산을 넘어선) 감정으로 인정받는 사랑이라면 인간을 서로 소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한지혜는 이 질문에 대해서마저도 부정한다. 「4월이 오면 그녀도 오겠지」에서 사랑은 우연적인 것, 시간에 따라 흐르는 것 정도로만 묘사된다. 더욱이 표제작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한지혜는 사랑이 소외를 막을 수 없는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 소설은 여러 사람의 기억을 몽타주처럼 제시하며 서사를 진행한다. 여자는 506호에 사는 여자를 만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그 집은 빈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자수한다. 그러나 남편(김이상)은 살아있다. 파편화된 서사형식 자체로 소통의 단절을 표현하는 이 작품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그를 죽였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은데, 그녀의 “살인”은 남편을 사망신고하고 그가 신지 못하게 했던 하이힐을 신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뒷부분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상징계의 층위에서 그를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남편을 죽였을까? 이 질문이 소설의 핵심 주제다. 결혼 10년차인 그들에게 “대개 그렇듯 서로에게 열정이나 뜨거운 사랑 같은 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흉기를 겨눌 이유는 더더욱 없었”(85)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자가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 내용은 “사랑하는 당신, 나는 오늘 당신을 죽이기로 했습니다”였다. 이 쪽지는 사랑의 부재도 살인동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을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이 말하듯 사랑은 “너무나 진부한 루머”였다. 이 말은 그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부정한 것은 이 사회에서 사랑만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낭만적 환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 환상이 루머에 지나지 않았기에 사랑을 이유로 결혼을 해 10년을 함께 산, ‘미친 듯이 사랑스럽거나 죽일 듯이 미웠던 적도 없는’ 그들의 삶에 남은 것은 ‘가끔 섹스를 한 뒤 남는 나른함’ 뿐이었다.

함께한 시간은 많은데, 함께 나눈 대화는 기억에 없다. 왜였을까. 갑자기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하루를 살고, 열 달을 살고, 벌써 10년을 살았는데도 쌓아지지 않는 기억. 살아온 시간을 반추하는 데, 십 분도 소비되지 않는 그 맹맹함.(78쪽)

사랑은 그 맹맹함을 없애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사랑(에 대한 환상)이 그 맹맹함을 만들었다. “506호”가 여자에게 “영원히 헤어지는 것과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것, 어느 쪽이 더 잔인한 운명”(74)이라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여자는 후자라고 답했다. 사회에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인되는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도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했다. 사랑을 해도 서로에 대한 위로와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살인”은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외부에 밀려난 자들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소리는 어디에서 피어나는가」를 통해 말한 한지혜는 이제 사회의 내부에서는 어떤 경우에도(사랑을 통해서도)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가 만드는 소외를 이보다 더 처절하게 그릴 수 있을까.

이상으로 두 작가의 소설집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공포영화와 드라마가 현실을 공포와 소외의 코드만을 신비화시킨다면 그녀들의 소설은 반대로 거짓말 같은 현실의 허위를 벗기고 구체화시킨다. 그래서 그녀들의 시선은 대체로 명랑하고 가끔은 경쾌하기까지 하지만, 소설들의 섬뜩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곧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전철희∙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제8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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