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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아트 아티스트/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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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 외 9편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 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만 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 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애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 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게 첫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굴뚝 소제부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 시
씽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나는 목례를 했다
그는 녹슨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서울의 제기동의 겨울 안개를 헤집으며 나아갔다
개천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며
북을 치는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냥 무심히
내 말을 잘 안들어 화가 나는 그녀를 생각하듯
그냥 무심히
은이후니
비극을 알리는 해풍이 문을 흔들고
버트레이가 죽고 그의 노모가 울고
막이 내린다 씽그는 만년필을 놓는다
강의실 창밖에 겨울 안개가 내리고
아침에 만나 그를 잠깐 생각하다가
커피집에 가는 오후 약속을 상기했다
말을 타고 바다로 내달리는
슬픈 사람들.
우리는 에리제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저으며 슬프고 가난한 시간 속으로 내달려 갔다
아침의 그를 문득 생각해 했다
은이후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석탄처럼 검은 빛
그를 다시 만났다
길고 깊은 암흑을 파내어
아침부터 밤까지 골목을 내달리는
그에게 나는 목례를 했다
내 전신에 쌓인 암흑의 기류를 파낼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은이후니
겨울저녁의 안개를 모호한 우리의 어둠을 두드렸다
실비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 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아내는 안해다
토박이말사전에서 어원을 찾아보면
‘아내’는 집안에 있는 해라서
‘안해’란다
과연 그럴까?
화장실에서 큰 거 하고 나서
화장지 다 떨어졌을 때
화장지 달라면서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사람,
틀니 빼놓은 물컵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생일 선물 사줘도
눈꼽만큼도 좋아하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
있어도 되고
없으면 더 좋을 그런 사람인데
집안에 있는 해라고?
천만의 말씀!
어쩌다 젊은 시절 떠올라
이불 속에서 슬쩍 건드리면
-안 해!
하품 섞어 내뱉는 내 아내!
엉아
원주중학교 동창 이준영(1942)은
전화할 때마다
-나, 원주 엉아야
꼭 이런다
그럴 때면
치악산 바람소리가 막 들린다
고려대 영문과 동창 강준식(1944)은
전화할 때마다 꼭 이런다
-엉아가 내 친구라는 게 정말 좋아
대기업 임원하며 잘 나갈 때
희떱게 골프 치던
쩍 벌어진 어깨가 막 보인다
엉아? 엉아?
참 웃긴다.
너희들 외로워서 그러지?
나야말로 정말 외롭단다
준영이 엉아야
준식이 엉아야
날 좀 살려 줘!
텁석부리
콧수염과 턱수염을 보름 째 안 깎았다
화장실에서 오줌 누며 거울을 보면
잿빛 듬성듬성한 콧수염 아래
턱수염이 純銀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알토란처럼 통통한 여자들이
짧고 더부룩한 수염을 한
텁석부리 내 얼굴을 볼 때마다
異口同聲, 고색창연한 수사법으로
아흔 아홉 명 모두 다 합창하듯
어마! 멋져! 야단들이다
아무렴, 아예 상투까지 틀어 올리고
구레나룻까지 더하면
茶山과도 어깨동무하고
秋史와는 너나들이해도 되겠다
나야 별 벼슬 못 했으니까
牧民의 그윽한 뜻은 엄두 못 내지만
올겨울 잣눈이 하루 걸려 쏟아지고
北風寒雪에 대나무 몽땅 얼어 죽은
歲寒을 났는데
松柏의 푸른 기상을 어이 모르랴
옛 선비 흉내 내면서
갈지자걸음으로 희떱게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아내 앞에서
텁석나룻을 점잖게 쓰다듬으며
어때? 하니까
에구! 에구! 송곳눈을 한다
여자들이 멋지다고 아우성친다니까
그런 말을 다 믿어?
천원 권 오천 권에 나온 퇴계나 율곡보다
엄청 더 할아버지네!
이런, 밴댕이 소갈머리 같으니라구!
七去之惡에 있는 妬去 多言去도 몰라?
이젠 반대해도 다 물 건너 갔다
텁석부리로 사는 내 生涯의 法이
99:1로 이미 통과됐다
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최고다
다음다음날 아침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질레트 세 날 면도기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싹 깎았다
텁석부리 내 생애가 이냥 요절났다
杜絶
穀雨 지난지도 한참 됐는데
새잎 하나 피우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는
벽오동이여 대추나무여
네 열매 먹고 살이 오를
鶴이 날아오는 하늘 지새우고
천둥번개 요란한
벼락 맞을 날 기다리며
묵묵부답
春信 杜絶이다
봄이 왔다고
촐랑대며 꽃 피우다가 이내 지는
나무들아
杜絶이 진짜 通信인 것을!
폭설暴雪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밥냄새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가다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오탁번∙1943년 천등산과 박달재 사이에 소재한 충북 제천군 백운면에서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를 통해 등단.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문학박사. 1971년부터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1983년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객원교수를 역임. 1998년 시 전문 계간 ≪시안≫을 창간.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수상. 시집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등. 창작집 '처형의 땅', '내가만난 여신', '새와 십자가', '정말과 기교', '저녁연기', '순은의 아침',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등. 평론집 '현대문학산고', '서사문학의 이해', '현대시의 이해' 등. 산문집 '詩人과 개똥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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