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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집중조명/권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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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84회 작성일 11-03-18 13:18

본문

권정일
사이클 외 9편


침실의 시계와 거실의 시계와 서재의 시계는 정각에 울린다. 

침실의 비너스와 거실의 사회적 동물과 서재의 뿔테안경이 걸어 나온다.

아침이라는 환승역을 알린다. 

비너스가 사회적 동물보다 10분 빨리 일어나고 

뿔테안경이 사회적 동물보다 10분 늦게 나온다.

10분의 빠르고 늦은 맞춤으로 한 집에 모여 사는 사이클 

生生의 시간 

현재과거미래가 동시 탑승하고 

나와 벽 사이, 사이클은 정교하게 운행한다. 

나는 거울처럼 사이클의 뒷면을 보지 않고 탑승하지만 

사이클은 내 불안한 뒷면을 떠나보내며 산다. 

내가 정해놓은 시간에 태엽을 풀고 당기는 사이클 


나는 각기 다른 10분을 통과하고 있다. 

10분은 모두 외부다.

들추는 것도 잡아당기는 것도 없는 사이클을

오늘을 축으로 떼어놓았다 맞추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2월


검은 날에 검게 매달려 검게 대롱거리던 나는 빨간 색연필로 29일만 남겨놓고 골똘히 남은 검은 자본의 날들을 빨간 날로 바꾸어 버렸다. 매일매일 즐거운 백야, 생몰을 모르는 꽃이 피고 최초의 문장으로 개구리가 알을 낳고 뱀이 기지개를 켜고 누렁이가 송아지를 낳고 새들이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나는 발가벗고 코끼리 군과 왈츠를 추었다. 

검은 29일 바퀴가 없는 자전거를 타고 모처럼 인간의 마을로 놀러갔다. 이미 멸종 위기에 처한 공룡과 자꾸 배가 불러오는 고양이와 고함지르며 바락바락 대드는 십자가와 사진이 사라진 굴뚝의 사진사와 도금으로 팔을 만든 대처승과 마술에 속는 마술사와 난쟁이 신부와 나는, 인간을 변명하는 검은 한 날에 오돌오돌 지쳤다.





내 방 주위의 여행*


침대
홀로 여행하기 좋은 암자죠 스프링 위로 수억만 리 시간이 벌거벗고 묵은 체위의 배설을 위하여 춤을 춥니다. 말달리자 말 달리자 잠 너머 잠, 꿈의 출입구로 자전하는 애마여, 가끔 태몽을 꿉니다.


거울
나보다 먼저 웃지 않아요.
나보다 먼저 늙지 않아요.


서재 
생물들의 광장
인간의 진열장

니체(걸어온다) 파이프를 문 하이데거(앉아있다) 나는 루쉰과 중국을 (동행한다) 맑스(혁명을 한다) 화요일이었던 남자 모리씨(연애를 한다) 알랭 드 보통(불안을 집필중이다) 촌철살인의 시인들(턱을 괴고) 죄송하지만 박철 선생은 아직도 영진설비 돈 갖다 주러 가나요? 


시든 장미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운 묘비명이여!
가시에 찔렸군요…… 그 후 
릴케라는 이름의 화병에 흘러내린 피
목이 꺾인 채 방치되어 있군요.
푸른 알약을 삼키던 계절은 악천후였어요.
CGV에서 다시 보는 영화 
K2 베이스캠프에 활짝 핀 삶은 
설산처럼 희망을 데리고 놀아요.
시든 너처럼 씁쓸하군요.


흔들의자 
관절에서 무릎
표류하는 중이에요

우두커니, 방주 모서리까지

*메스트르의 소설 제목.

주) 4B연필 2개, 지우개 1개, 연두형광펜 1개, 잉크가 마른 만년필 1개, 맥주 3병, 반생의 여행 그리고 자화상, 여행은 다른 자화상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변성기, 발육하기 좋다 봄의 손잡이가 필요.

A. B. C 컵, 봉긋한 것들은 부화한다. 나는 쉽게 높이를 가지지 못해 오늘은 등을 켜들지 않았다. 대왕귀뚜라미가 전갈을 제압하고 곤충계의 무법자로 등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가장 작은 사이즈의 A가 가슴에 기생하는 밤, 나는 한밤의 마디를 꿰고 매듭을 엮어 귀뚜라미 화관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 에이. 비. 씨. 컵으로 부화한다.

증발, 육감은 휘발한다. 휘발하는 것만이 미래, 그러나 현실은 가장 안쪽을 채우는 호크. 알몸으로 활짝 피었다 쪼그라드는 휘발메모리 A. 문 열고 나가 투항할 내일의 바깥 B. 경계의 안팎을 넘나드는 C. 모든 출렁거림은 한 라인이다. 새들은 추락하는 법을 구별하면서 공기를 가르지만 나는 컵을 탕진하면서 한 생을 흐른다.  





콜라, 꼴라쥬


콜라시대, 밤에도 낮에도 태양은 떨어지지 않았다 열일곱 얇은 몸과 다락방 언어들과 블랙은 구명조끼처럼 떠다녔다 핑크 보라 블루의 무채색을 의심했다 감춰진 눈의 언어, 불량하고 달콤한 혀가 혀끝으로 음미하는 몸의 파동, 얼음을 와삭와삭 깨물어 먹을 때의 콜라 같은 감정, 이별과 중독의 관계, 콜라는 마시기만 했다 여름이 흔들렸다

꼴라쥬 날들,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엄마는 팔 다리 심장까지 신신파스가 너덜거렸다 구슬을 붙이고 바늘을 꽂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덕지덕지해진 관계 꼴라쥬는 다락의 좁은 창에 검정 테이프를 붙이기만 했다 열일곱의 순도 높은 검정은 굴뚝에서 노래를 불렀다 분명 관계가 있다고 의심했다 여름의 언어는 검정 휘파람을 불었다

콜라 꼴라쥬, 계절은 고백하지 않아도 왔다 엄마는 일생을 찢어진 레이스만 깁다가 항문이 막혀버렸다 동시다발로 솟구치는 고전의 엄마, 엄마를 뒤적였지만 줄곧 깨져버리는 엄마 입에서 검은 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열일곱은 검은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수채화를 그렸다 여름이 핫핫 웃었다 안녕! 카스테라를 뜯어 콜라를 마셨다 여름은 자명했다 열일곱은 세상에서 어두운 관계가 되었다





팝콘효과 


밤새 안녕하십니까? 
음악을 들으면서 잠들거나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든 적 있을 겁니다. 음악 속에 드라마 속에 누군가 시퍼런 수술용 드릴과 칼날을 숨기고 당신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면 당신 안에 있는 「그대」라는 단단한 벽을 뚫고 「그대」를 훔치기 위해 벼리고 있었다면 당신은 그대로 두고 「그대」를 훔쳐갔다면, 당신이 내일의 눈을 뜨고 거울을 닦으며 훌쩍 떠나고 싶다면 당신 속의 살아온 날이 문득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대는 오래 전 당신이 아니고 당신 또한 오래 전 그대가 아닙니다. 지금 그대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그대」라는 주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음악을 들으며 이유 없이 슬퍼지거나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고 싶은 충동을 강요받았다면 그건 명령입니다 무언가 당장에 다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을 이 글의 마지막 두 번째 행을 읽는 순간 당신이 느낀다면 영원히 「그대」는 안녕하신 겁니다. 





백미러


우리는 둘이서 지나갔다/우리는 한 마리 순한 짐승 

우리는 우리에게 앞을 보여주지 않고 지나갔다/우리는 후광을 비추는 사람 

우리는 우리에게 뒤를 보여주지 않고 지나갔다/우리는 역광을 지나가는 사람 

우리는 낯선 공기처럼 끼어들었다/우리는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우리를 나눠가졌다/우리는 흩어졌다 뒤를 돌아보면 또 뒤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갔다/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 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달라붙어 있다/우리는 여름과 여름 사이 





‘꽃을 다오’ 


꽃은
염주 한 알이었다 
목에 걸 수 있는 하나의 열매였다 

한때는 황금비를 쏟아내는 잎이었으나 
아무렇게나 움튼 
꽃잎이었다 
잎이 고분고분한 그늘로 자랄 때 
리듬 있게 흩날리는 꽃잎
반성 없이 꽃 피울 수 없어
황홀하게, 황홀하게 벌레 먹어 

시다림에 들었다

오래 전 잃어버린 꽃, 꽃을 찾아 
마야의 절망을 빌려 
목선에 돛을 올렸다 
한 生은 술잔, 한 生은 도화, 편주로 떠돌았다 
방방곡곡 노류장화를 노저었다 

꽃이 없는 곳에 꽃은 꽃에게 있었고 
길에서 주운 꽃은 만개했다 
아직 가슴끈 풀지 못한 꽃을 미워하지 않았다 
목에 걸 수 있는 오로지 꽃이었다 
염주 한 알이었다 





국어 
ㅡ완전한 책

s# 읽기 
지나간 것은 읽지 않는다. 읽는 순간 모든 것이 지나간다. 바둑이를 읽는 순간 바둑이가 지나가고 영희 철수를 읽는 순간 영희 철수가 지나가 버린다. 김소월을 읽는 순간 진달래꽃이 지나가고 읽는 다는 것은 외로움이다. 슬픔이다. 나는 지나가면서 공란이 많은 페이지를 넘긴다.

s# 받아쓰기 
핏덩이로 어머니를 받아쓴다. 햇살과 바람과 비와 벼락을 받아쓰고 나무 산 강 바다 꽃 나비를 받아쓰고 연필과 책가방을 받아쓰고 사내아이를 받아쓰고 술과 사랑을 받아쓰고 연어 요리를 받아쓰고……, 당신 대신 여자를 받아쓰면서 기호가 되고 숫자가 되고 느낌표가 되고 물음표가 되고 마침표가 된다. 

s# 띄어쓰기 
햇볕과 어둠은 띄어 쓴다. 소녀와 소년은 띄어 쓰고 사랑과 이별도 띄어 쓴다. 행복과 불행은 띄어 쓰고 전쟁과 평화도 띄어 쓴다. 남과 북은 띄어 쓰고 여보 당신도 띄어 쓴다. 띄어쓰기는 띄어 써야 한다. 앞면을 뒤집어 뒷면이 나오는 것은 띄어 쓴다. 빛의 색은 앞면에 어둠의 색은 뒷면에 쓴다.





희망소비자가격
ㅡ완전한 책

시집 '완전한 책' 
시 한 편에 120원 정도가 
권장소비자가격 

詩는 생물
詩는 소똥

100원에도 팔리지 않는 
이건 혁명이다 
어둠의 총성이 짜낸 
피륙의 적정가격 

내가 발화하는 지점 
자라지 않는 
양철북을 두드리며 
365일 휴일도 없이 
야근에서 숙직까지 
눈알 달궈 만들어낸 
시 한 편의 가격 

킬로그램 당 140원 
폐이지 가격보다도 낮은 

도대체 100원 



시작메모
여백은 이분법이 아니다

하얀 여백을 바라보면 나는 슬펐다. 내게 여백은 존재나 비존재가 아닌 수많은 경험들의 결과물이다. 흑과 백, 부와 빈, 나와 당신이라는 이분법들은 여백 위에 물리적으로 세워진 슬픔이다. 하나의 ‘노마드’로서의 여백인…….

시는 ‘나’를 ‘나’대로 쓰면서 때로 침묵한다. 나의 침묵은 행과 행, 연과 연, 문장과 문장 사이 인연들을 세우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물物화 되고 구체화 된다. 사회적 약자로서 수많은 차별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침묵이기도 하다.

詩가 낭비되는 시대다. 詩가 행복을 가져다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詩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은 분명 있다. 아픔이 있는 곳에 詩는 가야 한다. 비울 수 없는 여백이 눈처럼 쌓인다. 시(나)를 추구하기보다 시적인 것을 맹목하기에.

권정일∙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지막 주유소', '수상한 비행법', 산문집 '치유의 음악'. 2009년 부산 작가상 수상.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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