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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집중조명/ 정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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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겸
암벽 타는 남자 외 6편
푸른 고등어 떼 뒤척이며 동녘 밝히는 시간
어둠을 밀어내고 뼈대 앙상한 바벨산 향해 간다.
아직 잠자는 발자국의 흔적을 따라
배낭 대신 질통을 메고 더듬더듬 암벽 기어오른다.
한참을 올라가니 몸이 풀리며 등판에 땀이 배인다.
쏴아, 소리 내며 터지는 폭죽
발아래 세상의 흉물들이 눈앞을 가린다.
살얼음판 걷듯이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다리 휘청거린다.
출렁거리는 나무 비계길 갈지자로 걸어간다.
급경사 오를 때마다
오른발과 왼쪽발에 긴장의 전율이 흐른다.
삐끗, 온몸의 균형을 잃으며
질통에 담겨 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공납금, 급식비, 노스페이스점퍼, 나이키운동화…,
끝없이 추락하는 거대한 나무뿌리
꺾어진 나뭇가지마다
진홍색 꽃망울이 피어나고 있다, 아버지!
둘째
세컨드
때로는 요상한 여자들을 비교하며 폄훼시킨다.
사실 나는 첫 번째는 물론 두 번째조차 해본 적 없다.
TV를 본다.
KBS 개그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코너에서 한 개그맨이“첫째와 1등만 대우받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거침없이 외쳐댄다.
채널은 다시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중계방송으로 돌려지고
원형의 빙판을 따라 1등의 자리를 놓고 선두 각축이 치열하다.
순간
아이들 방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안방과 건넌방을 사이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내전
첫째아이가 쇳소리를 내며 소리 지른다.
“야, 네가 입고 있는 내 옷 전부 내놔.”
둘째아이도 이에 질세라 모두 벗어준다며 제 방으로 문 쾅, 닫고 들어간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한참을 지나도 인기척 없다.
방정맞은 생각에 살그머니 둘째를 들여다본다.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
언니 옷 벗어 놓고 보니
정작 자기 것은 속옷이 전부란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둘째에게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준 적 없다.
시인의 DNA
어두컴컴한 대장간에서 글자들이 담금질 당하고 있다
정갈한 암호들이 하얀 종이 위에서
난수표처럼 숨어 있다가 나를 보더니 일제히 늘어서 꿈틀거린다
펄떡펄떡 숨을 쉬며 튀어나오는 싱싱한 언어의 조각들이
비밀리에 미로를 만들며 똬리를 틀었다
이 귀퉁이 저 귀퉁이 퍼즐 게임하듯 맞춰본다
참으로 신기하게 딱 들어맞는다.
오늘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목적도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되어
낯선 마을을 여행하기로 했다
아마 내가 첫 여행지에서 만났던 것은 포세이돈이었을 것이다
푸른 파도 속으로 내 몸을 던졌던 기억
다음으로 헤파이토스를 만난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성냥을 건네주며 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비너스와 바카스의 유혹을 받았었나,
이후 나는 크로노스에 이끌려 하인처럼 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가끔은 작은 배 한 척으로 강물에 몸을 싣고 바다로 나가
갈매기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보기도 하고
대리인을 내세워 로맨스와 불륜 속에서 갈등을 겪은 적 있다
그리고 천일의 밤마다 풀어주는 이야기 속에서
요술램프의 주술로 되살아나 숲 속을 걸어 보기도 한다
기울어진 햇살 사이로
금빛으로 도금된 언어들이 마구 떨어진다
지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의 살갗을 파고 뚫고 가르는 바이러스성 습관
나에게도 그런 DNA가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물방울 넥타이
항해를 마친 태양
파도가 쌓아 올린 붉은 성벽 따라
궁평항*에 닻을 내린다
방파제 모서리에 자리 잡은
가위질 장단 치는 엿장수의 호객 행위
지켜보던 해송 무리도 낭창낭창 춤을 춘다
땅콩엿, 참깨엿, 호박엿,
경품으로 내건 즉석 노래자랑
40대 초반의 여인이 선뜻 튀어나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동반 나들이 축가를 불러주고 싶다고 한다
효녀가수 현숙이 불렀다는 ‘물방울 넥타이’
반주에 맞춰 커다란 엉덩이 굼실굼실 흔들며
구절구절 굽이굽이 오르막 내리막
살아온 풍파만큼 고비고비 구성지게 꺾는다
여인은 사나운 해풍이 불어올 때마다
목소리에 힘을 주며 한 옥타브 높인다
그때마다 겹으로 주름졌던 삶의 갈피들
수평선 밖으로 간단히 날려 버린다
물방울 넥타이, 나도 한 번 오달지게 매고 싶다
*궁평항:경기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 낙조로 유명함.
삼전도三田渡*
조선국 제16대
인조 임금님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국사교과서 가운데에 푹 파묻혀 숨어 있는 당신을 보고 참, 겁 많은 임금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느낀 당신의 첫인상은 쪼다, 백치, 얼굴 두껍고 염치없는 사람 그리고 당신을 직접 만났다면 ‘쪽팔리지도 않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은 저희 회사 총무부장에게 호되게 야단맞았습니다.
아니, 치욕스런 욕설까지 들었습니다. 아, 그것까지는 참고 또 참을 수 있겠는데요 “그따위로 일을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겁박을 받았습니다. 순간, 멱살을 잡고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처자식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양손에 힘이 빠지고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불현듯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1637년 1월30일
당신은 삼전도 나루에서
처자식과 만백성을 위해
오랑캐 수괴인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맞대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당신인들 자존심이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조선 제일의 왕이었는데요
그때, 당신이 자존심을 접고 피 흘리지 않았다면
오늘, 저를 비롯한 식솔들이 무사히 아침 해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는 제가 당신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겠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터.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임.
개심사開心寺*
푸른 심장들이 펄떡거리며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다
남김도 모자람도 없는 탄소동화작용
나무들은 무소유의 경지를 이미 깨달은 모양이다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목어의 울음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모두가 제자리에서 침묵하며 수행중이다
고요가 뭉쳐 있는 이곳
산록의 문은 녹음에 둘러싸여 굳게 닫혀 있다
성긴가지를 파고드는 햇살
유성이 되어 숲속으로 사라진다
이 시간 어떤 생명이 윤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한걸음씩 오를 때마다 공중 부양되던 독경소리
돌계단 사이사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범종각이 보이고 해탈문을 지나 대웅보전 보인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연못, 가슴을 활짝 열어
하늘에 핀 구름과 배롱나무 붉은 꽃송이 살짝 안았다
지나가던 노보살의 화두 같은 선문선답
“안 올라가면 괘씸하고 올라가 보면 개심한다”는 돌계단
이제까지 끌고 온 생각들을 슬그머니 풀어 놓는다
닫혀 있던 마음, 열리고 있다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절.
나는 태양
꽃의 신神들은
헬리오스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는
전설을 아주 오래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아파트 베란다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나도제비난꽃
햇볕 따라 기우뚱 피어 있다
보기에 왠지 불편하다 아니, 불안하다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화분을 돌려놓았다
이튿날 반항이라도 하듯
더 삐딱한 자세로 몸을 비틀어 햇볕 쬐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해를 따라 다니며 피는 꽃은
해바라기 꽃만은 아니다
아침, 밥상을 에워싼 올망졸망한 꽃대들
봄기운에 잠시 수런거리며 흔들린다
창문 밖 햇볕을 내 동공 속으로 불러 모은다
순간, 잠잠해진 꽃잎들
모두가 나를 향해 피어 있다
아니, 내가 태양이었다니
시작메모
시인이 시를 쓴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겠지만 시인에 따라 어떤 목적의식과 이에 따른 색깔과 냄새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나의 시에서는 어떤 색깔과 냄새가 날까? 가끔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성혁 평론가는 나의 시에 대하여 ‘전통 서정시의 계열과는 달리 세태 문명을 비판하는 리얼리즘 시로 읽힌다.’ 하였으며 김제욱 시인은 ‘일상에서 발견된 문제의식과 도시에서 소외된 자들을 시 안으로 끌어들여 다독이기 때문에 시의 운용이 안정적이고 명확하여 독자들과의 소통이 쉽다.’고 하였다. 나는 이 점에 대하여 내 안에 숨어있는 나의 생각과 시를 쓰는 목적이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내가 시를 쓰는 의미가 바로 점차 양극화 되어가는 현 사회에서 소외계층들의 삶과 애환을 도출하여 다소나마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이며 급격한 현대화로 인하여 점차 사라지는 옛 풍물과 선인들의 흔적을 끄집어내어 현대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 시 속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겸∙2000년 ≪세기문학≫,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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