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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 정겸의 시 해설/김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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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36회 작성일 11-03-18 13:25

본문

시인의 DNA, 그 과잉 혹은 결핍의 지도에 관하여
―정겸의 신작시를 중심으로
  김효은|문학평론가



1. 
시인의 유전자에 대해 생각해본다. 과연 시인의 유전자 지도에는 일반인들의 것과는 다른 뭔가의 특징이 존재할까. 혹시 날 때부터 간직된, 특정한 시인만의 유전인자가, 일정한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비로소 빛에 닿은 감광지처럼 언어의 무늬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타고난 언어감각이 있다고 해서 혹은 후천적으로 창작의 기법만을 부단히 연마한다고 해서 꼭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닌 것을 보면, 타고난 유전인자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활성화시키는 특정한 환경요인 또한 중요한 요인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경우, 시인의 언어는 가난이나 외로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나 개인의 불우한 가족사 등 삶의 불행한 순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은 어떤 특정한 DNA가 과잉 존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근원적으로 결핍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채워지지 않는 구멍과 허기를 메우기 위해, 부단히 언어를 담금질하고 땜질하는 것은 아닐까. 

어두컴컴한 대장간에서 글자들이 담금질 당하고 있다
…(중략)…

기울어진 햇살 사이로
금빛으로 도금된 언어들이 마구 떨어진다
지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의 살갗을 파고 뚫고 가르는 바이러스성 습관
나에게도 그런 DNA가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시인의 DNA」 부분

정겸의 시 「시인의 DNA」는 “어두컴컴한 대장간에서 글자들이 담금질 당하고 있다”로 시작된다. “정갈한 암호”로 보이는 “언어의 조각”들은 분명 무생물인데도 불구하고, 시인을 보자마자, “일제히 늘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생물체가 되어, “펄떡펄떡 숨을 쉬며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마치 싱싱한 물고기처럼, 민첩한 뱀처럼 파닥이며 이내 “비밀리에 미로를 만들며 똬리를 틀”기에 이른다. 시인은 신기한 눈으로, “이 귀퉁이 저 귀퉁이”를 “퍼즐 게임하듯 맞춰보”는데, 그것들은 단 한 번도 중복되지 않고, 매일 매일 다른 이야기와 다른 그림으로 맞춰지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목적도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되어” 신화 속 “낯선 마을을 여행하기로”한다. 그는 포세이돈, 헤파이토스, 비너스, 바카스, 크로노스 등을 만나 험난한 모험을 겪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로맨스와 불륜 속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는가 하면 때론 요술램프 속 요정이 되어 “주술로 되살아나 숲 속을 걸어 보기도 하”는 등, “천일 밤마다 풀어주는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인물이 되어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기울어진 햇살 사이로/금빛으로 도금된 언어들이 마구 떨어진다”. 화자인 “나”는 “시인”을 “지구의 처음부터 끝까지/만물의 살갗을 파고 뚫고 가르는 바이러스성 습관”이 색인된 유전자를 지닌 언어의 연금술사로 규정한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정겸 시인 자신 또한 그러한 “DNA가 존재하는지 궁금하다”고 자문하듯 묻고 있다. 작가들에게 정말 그런 무궁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언어의 DNA’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천일야화千一夜話에서처럼,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구해주고 삶을 연장해주는 중요한 생명유지 장치와 보호 장비가 된다면, 그 보다 더 신비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마술도 세상에 없으리라.   

2.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묵묵히 암벽을 타는 남자가 있다. 그는 무거운 질통하나를 짊어지고 오늘도 “푸른 고등어 때 뒤척이며 동녘 밝히는” 이른 시간 “어둠 밀어내고 뼈대 앙상한 바벨산”에 오른다. 매일매일 “더듬더듬 암벽을 기어오르”지만 그의 등반은 시간이 흘러도 수월해지거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물만 늘어날 뿐이다. “발 아래 세상의 흉물들이 눈앞을 가리”는가 하면, 한 발 한 발 옮기는 험한 길은 “살얼음판”과도 같아 아슬아슬하다. 그가 삐끗하기라도 하는 순간이면, 질통에 있는 것들은 쏟아져 내리곤 한다. 그러나 묵묵히 암벽을 타는 남자, 번번이 “추락하는 거대한 나무뿌리”와 여기저기 부러지고 “꺽어진 나뭇가지”를 상처처럼 문신처럼 짊어진 이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암벽 타는 남자」는 아버지에 관한 시다. 아버지라면 누구나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매일 전쟁터 같은 일터로 나가 힘겹게 싸우고 미끄러지고,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힘겨운 삶을 살게 마련이다. “꺽어진 나뭇가지” 팔에 매달린 아이들, “진홍색 꽃망울”과도 같은 아이들의 눈동자와 그들의 목소리를 질통에 가득 담아 짊어지고 오르는 눈 앞의 암벽은 가파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공납금, 급식비, 노스페이스점퍼, 나이키운동화” 하나라도 더 사주려면, 한 발 한 발 있는 힘껏 암벽을 기어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정상이란 없다. 다만, 오르고, 추락하고, 또 오르는 일상만 있을 뿐이다. 「삼전도三田渡」라는 시에서도 가장으로서의 고달픈 일상은 앞의 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오늘은 저희 회사 총무부장에게 호되게 야단맞았습니다.
아니, 치욕스런 욕설까지 들었습니다. 아 그것까지는 참고 또 참을 수 있겠는데요 “그 따위로 일을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겁박을 받았습니다. 순간, 멱살을 잡고 한 바탕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처자식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양손에 힘이 빠지고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불현듯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삼전도三田渡」 부분

위의 시 역시 아버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과 그로인해 참고 견뎌야하는 수치와 화자의 구겨진 자존심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시의 제목인 삼전도三田渡란 조선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터로 지금은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곳으로 유명하며, 삼전도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맞대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의식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화자는 중학교 교과서에서 그런 인조를 보고 “얼굴 두껍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조선국 제16대/인조 임금님 정중히 사과드립니다.”라고 시의 첫 행을 반성적 어조의 서간문 형식을 빌려 시작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 시의 4연으로 화자가 회사에서 상사에게 당한 굴욕을 직접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이어 5연에서는 삼전도에서 오랑캐에게 당한 인조의 굴욕 또한 실은 “처자식과 만백성”을 위한 것이었음을 화자가 뒤늦게 깨닫고, 인조에게 사죄의 편지를 올리며, “그때 당신이 자존심을 접고 피 흘리지 않았다면/오늘, 저를 비롯한 식솔들이 무사히 아침 해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라고 하며 마지막 행에 이르면 “당신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겠습니다./절 받으십시오”라고 끝맺고 있다. 시인의 삶이, 더군다나 가장으로서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

40대 초반의 여인이 선뜻 튀어나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동반 나들이 축가를 불어주고 싶다고 한다
효녀가수 현숙이 불렀다는 ‘물방울 넥타이’
반주에 맞춰 커다란 엉덩이 굼실굼실 흔들며
구절구절 굽이굽이 오르막 내리막
살아온 풍파만큼 고비고비 구성지게 꺽는다

여인은 사나운 해풍이 불어올 때마다
목소리에 힘을 주며 한 옥타브 높인다
그때마다 겹으로 주름졌던 삶의 갈피들
수평선 밖으로 간단히 날려 버린다
물방울 넥타이, 나도 한번 오달지게 매고 싶다
―「물방울 넥타이」 부분   

그러나 비단 아버지의 인생만이 고달픈 것은 아니다. 인용된 위의 시를 보자. 삶의 질곡은 누구에게나 있다. 재래시장에 가보라. 혹은 새벽 수산시장에 가보라. 한 여름 폭염 속에서든, 한 겨울 한파 속에서든 그들은 시장 한 켠에 정물처럼 쪼그리고 앉아 구깃한 지전 몇 개와 녹슨 동전 몇 개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 찌든 땀과 눈물을 닦아낸다. 가끔 이른 저녁 텔레비전을 켜면 ‘6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국의 재래시장을 순회하며 즉석 노래방을 여는 코너를 볼 때가 있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즐비해진 대다가 더군다나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들의 삶이 그다지 풍족할 리 없음은 짐작할 수 있으나, 그들은 노래자랑에 나와 누구보다 구성지고 질펀하고 흥겹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이 시에 등장하는 40대 여인 또한 경품이라고는 기껏해야 “땅콩엿, 참깨엿, 호박엿”이 전부인 즉석 노래자랑에서, “살아온 풍파만큼 고비고비 구성지게” 노래를 꺾는다. 여인은 “사나운 해풍이 불어올 때마다/목소리에 힘을 주며 한 옥타브 높”이며, 애창곡 “물방울 넥타이”를 불렀을 것이다. 시인은 아마도 여인이 그 노래의 힘으로 애환을 달래고, “주름졌던 삶의 갈피들”을 “수평선 밖으로” 저 멀리 “간단히 날려버”렸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역시 마지막 연에 이르러 “물방울 넥타이, 나도 한 번 오달지게 매고 싶”노라고, 그리하여 고달픈 항해 끝에 잠시 “닻을 내리”고, 한 숨 돌리며 쉬고 싶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둘째」라는 작품을 읽어보자. “요상한 여자들을 비교하며 폄훼”하는 말로 “세컨드”라는 표현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나는 첫 번째는 물론 두 번째조차 해본 적 없”노라고 고백하며, TV의 “개그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코너에서 한 개그맨이” 히트 시킨 유행어 “첫째와 1등만 대우받는 더러운 세상”을 시에 인용한다. 또한 화자는 “1등의 자리를 놓고 선두 각축”을 벌이는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중계방송을 돌려보며, 한숨짓는다. 3연에서는 화자가 아이들의 싸우는 소리에 방을 건너가 보니,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화가 난 첫째 딸아이가 둘째에게 “야, 네가 입고 있는 내 옷 전부 내놔”라고 언성을 높이는데, 막상 언니 옷을 다 벗어주고 보니, “정작 자기 것은 속옷이 전부”라는 작은 아이의 울먹이는 소리에 문득 화자는 “둘째에게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아뿔사”하고 놀랄 뿐이다. “첫째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공감하면서도, 실은 자신도 첫째에게만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뒤늦게 우연히 깨닫고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상 정겸의 신작시 몇 편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에는 일상이 소소하게 담겨 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담담하게 기술하며, 작지만 꾸준한 반성과 내면으로의 성찰이 그의 시가 지닌 든든한 무기임에 분명하다. 그가 지닌 ‘시인의 DNA’가 어쩌면 그를 지루하고 힘든 일상에서 매일 매일 구원해주는 것은 아닐까. 시詩란, 그에게 바쁘고 무겁고 힘든 삶을 견디게 하는, 그리하여 가파른 암벽을 오늘도 어김없이 기어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그만의 “물방울 넥타이”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가 오늘도 “오달지게 매고 싶”어 하는 “물방울 넥타이”가 궁금하다. 그의 “물방울 넥타이”가 더욱 풍성하고 왕성한 작품들로 다채롭고 아름다워지길 빌어본다.

김효은∙안양 출생. 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10년 계간≪시에≫에 평론으로 등단. 현재 김포대 강사.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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