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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010년 가을호) 신작시/조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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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용
풀치 외 1편
1.
크다만 은빛들이 떠올랐다
어둔 밤이면 은하계의 별들이 바다에 잠기었다 지상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데
곰소항 어물전에 가면
치! 하고 콧방귀 뀌는 콤콤한 소리가 볏짚에 엮여
갯바람을 몰고 있다
어린 것들의 비린 냄새로 익지 못한 말들을 숨겨놓는다
선명한 비늘이 사위고 몇 날 갯바람과 해무가 스며들면
사라지고 남는 것은 빨랫줄처럼 널리는 영혼의 냄새
죽음의 뒤태란 콤콤한 냄새로 제 뼈를 풀어헤치는 시간이다
우리가 살아온 내력이란 다 익지도 못하고 헐거워지듯
죽어서 진화하는 풀치가 헐렁하다
2.
임종을 앞둔 아버지도 풀치가 먹고 싶다고 했다
죽음 앞에 생각나는 건 아내와 자식들에게 용서와 사랑일 텐데
풀치조림. 하지감자에 풀치를 넣고 끓인 국이 먹고 싶다고 한다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지고 아버지는 소낙비처럼 그쳤다
풀치조림 풀치국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입에서 청국장 같은 풀치들이 바다로 가고 있었다
간장게장집 여자
영화동 목포식당 여주인의 갯벌 같은 사투리가
더운 바람을 몰고 달라붙는다.
몽골인 같은 두툼한 얼굴엔
갯벌을 질러온 물길이 오랫동안 닿았다 쓸려간 주름이 보인다.
게들처럼 몇 번의 허물을 벗었을 것이다.
형광빛의 희멀건 살빛 흔적이 눈 밑으로 흩어졌다
목에서 멈춰 있다.
바다의 구릉지대를 오가던 게들의 옆걸음을 닮은
그 여자의 걸음걸이를 보면
물컹한 식욕에 포말이 밀려오는데
몇 그릇의 속을 채워도 입맛이 가시지 않은
달달한 간장게장 맛만은 아니다.
살구나무집 주인의 자선처럼
떨어진 살구를 눈치코치 없이 맘껏 먹어도 좋다는
탱탱한 봄날 기억을 밥상에 올리는 여자.
잘 익은 간장게장에다 갈치속젓 조기구이,
총각김치, 시원한 물김치까지 그리고 또 무슨 젓갈까지
그릇그릇 넘치도록 치마폭이 넓은 여자.
가마솥에서 금방 퍼올린 밥이 오를 때까지 그 여자는
밥상마다 연꽃처럼 서서
‘아자씨, 참 멋지요.’
‘게장맛은 암컷이 더 좋은 께로 많이 드시쇼.’
‘우리넌 야박한 사람들이 아닌게 묵다 모지래믄 더 달라고 허시쇼’ 하면서
넉살 좋게도 제 고향 갯벌을 밀고 간다.
제 것을 허실이 퍼주고도 환히 웃는 여자.
알이 슨 게딱지에 입맛을 비비기 위해
세발낙지의 흡반처럼 게 몸에서 게딱지를 손 익어 갈라놓는다.
마치 제 허물을 가르듯
도시 바닥의 깊이도 모르고 밥도둑을 파는 여자처럼
능소화 핀 골목을 벗어나면
제 고향 목포의 갯벌에 게들이 별빛으로 살아있다고 믿는 여자처럼
참 맛있는 여자.
바다를 닮은 여자가 있다.
조찬용∙전북 부안 변산 출생. 1999년 ≪시인정신≫으로 등단. 시집 <국어 시간에 북어국을 끓인다>, <숲에 들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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