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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윤용선/상고대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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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윤용선/상고대 외 1편
윤용선
상고대
모두 잠들어 세상은 적막한데
추운 하늘의 별들도 졸고 있는데
어디서 시간의 갈피갈피마다
기억의 밑줄 촘촘히 긋고 있는
외로운 영혼이 있나 보다
퍽 곤한가 보다
잠들지 못하고 혼자 뒤척이는 걸 보면
이제도 목마르다고 웅얼거리는 걸 보면
시인들의 낡은 시집처럼
이미 세상이 다 잊은
한겨울 깊은 꿈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서성이는 사연은
저마다 또 따로 있나 보다
저 먼 산비탈에 서서
뜬눈으로 온밤 지새워 가며
잔가지 하나하나
하얗게 하얗게 덧옷을 입히는
수많은 나무가 있는 걸 보면
수도꼭지
일상으로 수도꼭지는
잠글 때나 틀 때나 한결같아야 하는데
더러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가령 누가 덜 잠근 채 지나치면
쓸데없이 물을 질금거리게 되고
너무 빡빡하게 조여 놓게 되면
제때 부드럽게 풀리지 않아
누군가 한참 불편을 겪게 된다
이 모두는 결코 수도꼭지 탓이 아니다
그런데도 성질 급한 나는
앞뒤 가려 가며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매번 수도꼭지가 못됐다고 한다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들이대기부터 한다
이렇게 일상으로 수도꼭지는
이리저리 당하면서도
꼭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누구 하나 고맙다고는 하질 않는다
*윤용선 197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가을 박물관에 갇히다』, 『꼭 한 번은 겨자씨를 만나야 할 것 같다』,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딱딱해지는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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