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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이화은/순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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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이화은/순장 외 1편
이화은
순장
엄마 산소에 가져갈 국화꽃 화분에
듬뿍 물을 준다
내일이면 무덤으로 옮겨갈 꽃이다
무덤 옆에서 이른 생을 마감할 것이다
죽은 임금의 묘 안에
산 채로 함께 묻히던 젊은 궁녀처럼
전날 밤
그녀들도 최고의 만찬을 즐겼을까
엄마 곁에서 오래 피어 있으라고
아직 덜 영근 꽃송이들로 골라 왔는데
행여 비라도 오지 않으면
며칠이나 살아 견딜 수 있을지
마지막 밤에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듬뿍 물주는 일 밖에 없으니
돌아가신지 스무 해가 넘은 엄마에게
이 꽃이 기쁨이 될지 몰라
꽃 같은 궁녀들이
죽은 왕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사온지 하루 만에 몇 송이 새로 벙근 꽃들과
차마 눈 맞추지 못 하겠다
물 먹이는 일이 누군가에게
정말 물 먹이는 일이 되고 말았으니
기쁜 토론
기쁜 일이 없다고,
그래서 매일이 슬프다고,
커피를 마시면서 누가 말했다
우리는 잠시 기쁨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게 있었어?
장롱 밑에서 찾은 녹 슨 동전 같은 것
동전만큼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것
그건 착각이라고,
착각은 각이 없는 네모나 세모 같은 것
아지랑이 같은 게 있긴 있었다고
누군가 또 봄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헛것이었을까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하여
모두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마른 손금 위로 분명 무언가 흘러간 기억을
그 푸르고 서늘한
옛날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사람과
아예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사람들이 토론을 벌였다
기쁨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을 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흥얼거렸다 누가
줄장미가 서둘러 피고 있었다
서둘러 지고 있었다
*이화은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절정을 복사하다』, 『미간』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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