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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허연/이별의 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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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42회 작성일 20-01-1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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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허연/이별의 서 외 1편


허연


이별의 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파스타를 고르다가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있었다는 것뿐


그 사이에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 같은 게 왔다 갔고


만국기처럼 별의 별 일들이 펄럭였지만
우리는 그져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


철로가 있었고
루드비키아가 피어있었고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있었고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많았지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를 찾아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오히려 누군가를 살게 했을지도 몰라
더 이상 한심해 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할 일을 다 한 거 같았고
강변에서 일어나기로 했지  


기뻐서 했던 말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기를





중심에 관해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허연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불온 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미터』.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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