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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신현락/한 짝만 잃어버리는 생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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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신현락/한 짝만 잃어버리는 생 외 1편
신현락
한 짝만 잃어버리는 생
소년이 서 있다
곧 비가 올 텐데 신발 한 짝을 잃었다고
풀숲을 뒤지다가 다시 울다가
흙바람 속에서
같이 놀던 동무들 모두 돌아간 뒤
운동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소년이 서 있다
돌아보는 발자국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소년의 얼굴 위로
체념한 표정이 떠오르다 지워진다
남아있는 신발 한 짝을 들고
낯선 상실의 예감이 원경으로 펼쳐진
생의 분지 한가운데
소년이 서 있다
여기에 없는 허전한 눈동자로
어디선가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그 한 짝이 되어
그리운, 풍진 얼굴
-서산마애삼존불 앞에서
이 얼굴이 사람의 것일 수 있을까
마애불磨崖佛 앞에서 천 년의 풍상을 지나온 미소를 보며
나는 왜 이런 의문이 떠오른 것일까
나르시스는 짧은 생애를 현생의 자기 얼굴만 보고 갔다
야누스는 평생 타인의 얼굴만 만나고 갔다
나는 나르시스의 얼굴을 만나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살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 얼굴의 주름에서 바람의 무늬를 읽고 갔으나
아직 나는 그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얼굴은 슬프고 다정스런 타인이다
내가 나에게도 이상하게 먼 사람으로 보일 때조차도
사람들은 서로 거울처럼 낯설고 정다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슬픈 어떤 표정도 찾을 수 없어서
짐짓 무심의 가면을 쓰곤 하였는데
내부가 캄캄할 때 외부가 그만큼 환해 보이기도 하였으므로
영정 사진 속의 웃는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 서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얼굴을 그 사람의 과거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내 얼굴을 보고 아버지의 전생을 읽는 사람에게 나는 아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지금의 내 얼굴은 미래의 과거이다
바위를 갈라보아도 저 안에 마애의 미소가 없듯이
사람은 얼굴을 세워두지만 누구나 그 얼굴로만 살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간절함이 이 바위의 중력을 살포시 띄우고
어떠한 풍화가 이 부드러운 미소를 바위에 펼쳐놓은 것일까
심연에 잠겨 있어도 나르시스는 자기의 얼굴만 바라본다
두 얼굴이든 하나의 얼굴이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얼굴로 죽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삶이 얼굴을 만든다면 얼굴 또한 삶을 증거하는 것
이 삶 역시 지나가고 변화할 터이지만 그 또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절벽에 매달려 있어도 얼굴은 얼굴을 알아본다
나는 야누스의 얼굴을 통해 마애의 얼굴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굴에 도착하기 위해 나를 스쳐갔던 수많은 표정의 그리운,
풍진 얼굴들을……
*신현락 1992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만을 기록한다』외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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