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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이진희/아주 이따금 쓰는 일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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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이진희/아주 이따금 쓰는 일기 외 1편
이진희
아주 이따금 쓰는 일기
게으르고 서툴지만 나는 여태
이만큼의 나를 만들어왔다
어디서나 전학생의 심정으로
지금도 속으론 전학생처럼 쭈뼛대지만
나는 자주 나의 모든 것이 낯설다
겨우 이만큼이지만
겨우 이만큼이라서
자기연민에 좀 빠지면 안 되느냐고
되물은 적 있다, 내가 아니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줄 대상을 찾던 밤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땅을 파고 들어가야 해라고 말하던
너는 여전히 예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 말은 나에게 필요한 말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너에게 건네던 오후
조금 더 사랑했더라면
조금 더 침착했더라면
조금 더 꾸준했더라면
지금과 다를까 여럿 속에 섞여 앉았다가 우르르 자리를 옮길 때, 누군가 다른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으면서 나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나 혼자에게로
일곱 살
자라지 않은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노파를 목격했다
엄마 흉내를 낸 계집애처럼 칠한 입술과 볼
큼지막한 귀걸이에 짤따란 원피스
그러나 노파는 어깨를 꼿꼿이 펴고
앞을 똑바로 보며 걸어갔다
나의 마음은
일곱 번의 일곱 살을 거쳤으나
아직 열네 살도 안 되었겠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말할 것 같으면
열한 번째 일곱 살을 앞둔 작년여름
갑작스레 생을 마감하셨는데 그때까지
여덟 살쯤으로 사신 것 같다
일곱 살에게 오늘이라는 날은
어제에서 이어진 어느 날일 뿐
어지럽고 무서운 꿈이나
우기雨期에 침수된 휴일이
몸과 정신에 남긴 충고를 간과하면서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다보려 하지 않는다
철 든 척
짐작 삼아 세상을 살고 있는 내가
이렇게 우스꽝스러울 수 없다
*이진희 2006년 계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실비아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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