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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이광찬/빈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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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이광찬/빈혈 외 1편
이광찬
빈혈
1.
모로 누워 공복을 견디는 노모는 아래층에, 나는 위층 방바닥에 스미어 서로를 엿듣습니다. 이즈음엔 천장이 벌어 간밤 꿈속이 다 환해지더란 말씀을 자주 되뇌곤 하시던, 그러니까 열십자 전등이 빛을 발하는 천장은 미망의 노모에겐 소천小天인 셈인데요. 저 왔어요, 스위치를 올리면 믿음은 더욱 영롱해져 흐트러짐 없이 타오르기도 한다죠. 그럴 때 당신은 한 가닥 기도로 허기를 면하기도 합니다만.
2.
1층은 슬래브 벽돌이,
2층은 조립식 패널을 얹어 지은,
삼 대가 함께 살을 맞대 온 이 집의 내력
3.
매일 쓸고 닦아도 써걱거리는 장판 저 아랜 가라앉지 못하고 부옇게 뜬소리들만이 들끓습니다. 가령 계단 경사면 아래께 침하된 벽의 하중을 떠받치던 곡면거울이 등 뒤 들 뜬 타일을 다독이는 소린, 쩡. 낮에 먹다 남은 뼈 조각을 핥던 옆집 개는 낯선 그림자를 제 주인에게 일러바치느라 컹. 이런 소리들로 밥을 안치면 삼층밥은 무난히 지어 먹을 수 있을 정도. 그 중 가장 가벼운 건 물에 만 밥술을 뜨다 말고 끙, 약 봉지를 털어 넣는 소리인데요. 나는 이 밤의 위독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간절해지기만을 바랄 뿐. 여긴 처마 끝 녹슨 물받이가 내지르는 비명도 한 옥타브 아래. 어쩌다 욕실 여닫이문이 열렸다 닫히면 변기 물소리까지 딸려 와 푸석거리는, 이 위 밤은 적막하고요. 아예 눌러 앉으시려는지, 벌써 엿새째 빈혈은 차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외투가 걸린 풍경
짐을 꾸린다
더듬거리는 말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몸짓, 벽지의 표정까지도
박스에 꾹꾹 눌러 담은 뒤, 책상은
이내 본래의 책상으로 돌아갔고,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불룩해진 휴지통을 비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지막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려는데, 미처
따라나서지 못한 여벌의 외투 한 벌, 옷걸이에 단정하다
버릴 게 너무 많다
*이광찬 2009년 계간 《서시》로 작품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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