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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김가연/즙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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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김가연/즙 외 1편
김가연
즙
당신은 나의 첫 문장이며 마지막 문장입니다
또한 탄생 이전의 말이며 세상 이후의 말입니다
당신은 속살의 음률이며 초록을 깨우는 바람이어서
나는 당신의 소리로 듣고 당신의 빛깔로 봅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당신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당신을 말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거대한 협곡을 떠도는 파장이고
나는 그 너머를 유영하는 떨림입니다
울림과 쉼표로 남은 소리의 질료들이
당신의 계절로 와서 꽃이 됩니다
이제
나의 언어를 삭제합니다
완연한 날을 위해
말의 찌꺼기를 버리기로 합니다
유목의 계절
연안沿岸에서 살았던 기억은
푸른빛의 태몽처럼 아득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명耳鳴 같은 그곳에서
새들은 서로의 입김에 데어가며 적도赤道로 향했고
바람은 나무의 몸속에 밍근한 수액을 채워 넣었다
뜻밖의 주검을 대면한 강물은
울음소리를 바다로 흘려보내며
어린 나무의 발목을 씻어주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걱정들과
비늘처럼 반짝이는 이름들을 건져 올리며
슬픔도 조금은 흐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가연 2009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푸른 별에서의 하루』 외. 충남시인협회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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