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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황종권/사과가 오고 있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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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황종권/사과가 오고 있다 외 1편
황종권
사과가 오고 있다
저녁이 등을 보이고 서 있을 때
사과가 오고 있다
사과에겐 붉은 날짜가 적혀있다
박새가 사과의 뒤통수를 쪼갠다
중력이 오뚝이 인형같이 갈라진다
반듯한 허수아비는 낙과 따위 관심이 없었다
과수원은 침묵으로 문이 닫힌다
사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갈라지고 무른 곳마다
어느 죽은 벌레의 얼굴이 박혀있다
공중의 이빨이 되는 사과였으나
지금은 앙증맞은 귀다 빨갛게 익은 귀다
박새가 튀어 오르는 해질녘
사과나무가 나이테 시계를 가을로 돌려놓는다
옹이 바늘이 서쪽으로 기운다
사과가 되기까지의 거리를 박새만이 안다
견고한 사과, 사방이 둥글게 닫혀있어
붉은 것이 흘러나올 듯하다
앵무새
새는 좀 더 어두운 은신처를 가지고 싶어
사거리 앞에 서 있다
빨강 노랑 파랑을 가진 앵무새를
이 도시에서는 신호등이라 칭했다
색을 바꾼 새의 언어만이 구멍을 드나든다
어둠이 당기는 저녁이 올 때
태아처럼 웅크린 그 길이 잘 보인다
앵무새는 혀를 날름거린다
죄를 낱낱이 구술하듯
발목 사이 행간을 나눈다
날개를 비워두면 빛이 고일까?
은폐로 깊어가는 문장아
그늘진 폐허가 키운 핏덩이들아
아픈 이마에 반짝이는 빛들아
신호등은 새라는 앵무로 태어나고 싶었다
신호등은 새를 키우는 구멍이거나
부러진 발목들이 쌓이는 새장이 아닐까?
오늘은 좀 더 어두운 저녁을 헤집고자
달의 이마에 제 부리와 발자국을 찍는다
*황종권 201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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