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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전장석/겨울 무쇠막생고기집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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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전장석/겨울 무쇠막생고기집 외 1편
전장석
겨울 무쇠막생고기집
저물녘 무쇠막사거리에 불똥처럼 진눈개비 내리고
피딱지 같은 게 얼룩얼룩한 고깃집 간판
서둘러 작업을 마친 허기가 곧 사납게 들이닥치리라
붉은 김이 솟는, 뭉텅뭉텅 썰려나온 생고기들
태양이 나무의 손바닥에 엽록을 채색하듯
시뻘건 화구火口의 고삐를 풀었다 죄었다 하며
인부들은 고기에다 불의 영양소를 입힌다
단단한 쇠를 달구고 메질하던,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가 베어있는 무쇠막골*
그리하여 생고기보다 연한 쇠, 쇠망치가 먼저 부드러운 식감을 느끼면
거북등 만한 무쇠솥과 농기구들이 도깨비에 홀린 듯 뚝딱뚝딱 만들어져
움막 뒤꼍에 가지런히 놓이던 시절 있었다
발톱을 세워 유리창을 할퀴는 습한 기운들
바깥 세상을 달구는 눈은 어떤 이기利器를 만들어낼까
누군가에겐 뜨거운 함성이었을 저 문 밖에는
추위에 데인 상처가 많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쉴새없이 두드리는 순백의 망치소리
연장통을 두고 온 인부들은 내일을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대낮의 쇠망치 소리 몸에서 서서히 잦아들 때까지
한강변의 찬 물살이 쇳물처럼 가라앉을 때까지
시커멓게 그을린 어둠 몇 조각
불판 위의 별똥별로 스러진다
*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의 옛 이름. 선철을 녹여 농기구 등을 만든 데서 유래.
아현역 나빌레라 갤러리
누가 저 박제된 나비들의 아버지일까
파동을 결박한 정지된 낢 어디선가
꽃은 피어오름을 멈추지 않는데
산하를 마음껏 누비던 기억의 낱장들
종신형으로 한 곳에 가둔 이는 누구였을까
기차가 꽃대궁 밀어올리듯 들어올 때마다
나비 채집가인 역장의 옷에서 꽃가루가 휘날리고
눅눅한 지하 역사驛舍 한 귀퉁이
바늘핀에 꽂혀 두 날개를 쭉 편 나비들이
미동도 없이, 붉은 씨방 하나씩 품고 있다
울타리 밖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비바람에 금방 찢기고 마는 세상
상한 날개를 보듬고 밤 새워 웅크리던
굴레방다리 아래서
스스로 박제가 되어버린 사람들
혹은 우화된 꿈은 어디로 갔을까
불꽃처럼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치던 시절
하필 그게 마지막 모습으로 각인되어
수인번호 같은 명찰을 달고
평생 날개를 소유한 삶의 명명식이 열리는
지금, 저 들판을 떠도는 나비 채집가는 누구인가
역장의 수신호에 맞춰
퇴화된 비상飛翔을 깨우는 전철이 달려오고 있다
*전장석 2011년 《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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