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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강외숙/메가네우라*의 사랑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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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강외숙/메가네우라*의 사랑 외 1편
강외숙
메가네우라*의 사랑
석탄기의 쇄설물로 수프가 끓는 아침
메가네우라*의 그물 날개로
삼억 오천만년 전의 햇살이 춤을 춘다
사랑을 마치고 죽은 잠자리의 혼일까
일흔일곱의 용서를 달고 날아간 사랑이
캄캄한 지층 속의 기억을 데리고 왔다
사랑을 마치고 나는 죽었다
죽었으므로 기억이 없다
누군가 짙푸른 숲의 노래를 불렀지만
밀림의 열망은 융기되고 실종되었다
그 무렵 사랑이 죽고 나도 죽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은 듯한데
사랑한 기억이 없다 그 없음 속으로
삼억 오천만년 전의 오로라가
잠자리 날개처럼 날아오고 있다
* Meganeura-석탄기의 큰 잠자리.
Before Sunset
43번가의 저물녘 뉴욕 이민자 거슈인의 노래를 듣는다
‘내게서 그것을 뺐지 못해 Can't Take That Away From Me’
저 조그만 사람들, 뉴요커도 유러피안도 도넛을 파는 스페니쉬도
햇살에 반짝이는 소소하고 아름다운 오늘의 저녁을 뺐지 못 한다
욕망이 흘러가는 웨스트사이드로 노을이 물감을 풀어 놓는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잠재적 슬픔이 스멀스멀 촉수를 뻗는다
새 한 마리 안간힘으로 저녁을 휘저어 노을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석양을 배경으로 앉은 노파를 ‘비포 선셋’이라 명명한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보헤미안들
우린 모두 Before Sunset이다
언젠가 오늘 같은 노을로 내 마지막 저녁이 걸어온다면
그래, 그런 저녁 내 영혼이 잠잠히 적막을 밟고 갈 때
한 생이 지나가는 저녁 강에 누군가 꽃잎 몇 장 흘려주기를…
*강외숙 〈시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이은상문학상, 상상탐구 작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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