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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김은자/틈의 연대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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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27회 작성일 20-01-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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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김은자/틈의 연대기 외 1편


김은자


틈의 연대기



콘크리트 틈을 뚫고 풀꽃이 피었다 한 때 풀밭이었던 곳 수 천 개의 풀씨를 뒤엎고 풀 등 위에 집을 짓더니 구멍이 생긴 것이다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막아 틈 한 톨 없는 새집이 완성되었을 때 새집에는 몇 년 동안 마당을 쓸어 놓은 것 처럼 풀잎 하나 돋지 않았다


풀씨들은 빛 한 줌 없는 지하에 갇혀 회로를 모색했을 것이다 모색이란 적극적인 것이어서 발광체의 그림자만 스쳐도 공복처럼 피를 토하고 몸

부림 치며 빈틈을 끌어 안았을 것이다 


달빛이 인형 손톱보다 작은 창문 하나 긁고 갔을 때 틈만이 되돌아가는 길을 알기에 풀씨는 틈을 뒤져 골목을 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방울보다 조그만 조짐도 터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굽은 몸을 쫙-펴고 죽을 힘을 다해 밀어내고 틈을 벌렸을 것이다


틈으로 틈을 벗어나는 꿈을 날마다 꾸었을 것이다


말미를 빼앗길 새라 한 쪽 발은 쾅쾅-틈 위에 못질을 했을 것이다


이어져 있는 모든 이름은 틈의 탄생이므로
모여 있는 모든 안은 간극의 속성이므로


틈으로 밖을 접수했을 것이다





헤어 모텔



문제는, 
죽이고 살리던 것들이,잘라내고 이어내던 것들이,
구부리고 펴내던 것들이, 염색하고 탈색하던 것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일을 하며 
한 가지 일을 이루어내는 일도 버거운데
모색을 꿈꾸던 것들이, 손질을 실천했던 것들이,
불 꺼진 미용실 속에서
한데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도구는 도구로 취급당할 때 슬프다


어떤 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라 했지만
충전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만
온종일 더운 입김을 뿜어내던 헤어 드라이도
지친 머리를 쓸어내려주던 빗도
미용사의 손에 들리면 
날던 새도 떨어뜨리던 가위도
머물러 있는 것이라 했지만 


그곳은 훼손됨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 
잘려나감으로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은
헤어 모텔의 가훈 


문제는,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초승달 닮은 빗으로 시간을 빗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은자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 중앙일보 컬럼 ‘문학산책’ 연재. 뉴욕일보 시칼럼 ‘시와인생’ 연재.  1660 Am ‘ K’ Radio 에서 문학전문프로 ‘시詩쿵’ 진행. 시집 『비대칭으로 말하기』 등.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온다』 등.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윤동주문학상 해외동포부문. 제1회 해외풀꽃 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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