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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흐름진단/시/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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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진단/시|
삶에 대한 지혜, 역사․자연 사용법
장이지|시인
∙안현미, 「카이로」(≪문학과사회≫, 2010년 봄호)
∙심보선, 「음력」(≪미네르바≫, 2010년 봄호)
∙신동옥, 「위경僞經」 부분(≪현대시학≫, 2002년 2월)
∙하종오, 「배반의 가족사」(≪리토피아≫, 2010년 봄호)
∙배창환, 「볍씨 한알」(≪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김사인, 「통영」(≪실천문학≫, 2010년 봄호)
1. 말해질 수 없는 삶, 혹은 죽음
‘천안함 참사’로 인해 국가적 애도의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3월 29일 해군 홈페이지에는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는 시가 게재되어 참사의 비극성을 하나의 절규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침몰 함미의 수색 작업에서부터 함미 인양과 승조 선원의 시신 수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또 사건 전말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의혹들로부터 시작하여 책임 소재 공방에 이르기까지 2010년 봄은 공적인 언어들의 사태沙汰에 짓눌려 사적인 언어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적어도 언어적 국면에 있어서만큼은 일상이 중단되었다고 할 만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공적인 언어만이 남은 이 시간 동안, 말해질 수 없는 삶, 혹은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문학이란 어쩔 수 없이 삶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죽음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국가적 애도의 시간 속에서 문학이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삶, 혹은 죽음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 그 애도의 대상에 대해 발설하게 된다면, 그것은 부득이하게 ‘절규’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번 참사를 통해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를 테면 문학을 의식하는 순간, 훼손되어버리는 삶, 훼손되어버리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역시 이 애도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섞여 있어야 더 진정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자의 멈추어버린 시간은 산 자들의 시계에 비추어 볼 때라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만약 산 자들의 시계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의미’에 대해 애도의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가 입을 막을 틈도 없이 터져 나온 절규였고, 바로 그로 인해 공적인 언어만이 횡행한 애도 정국이 그래도 덜 쓸쓸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시인이 그 작품에서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다는 식의 태도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또한 시인이 삶으로부터 괴리를 느끼게 되는 첩경이 되기 십상이다.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은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지 ‘쓰기’를 통해 실천하는 것일 텐데, 이것은 리얼리즘을 어떻게 새롭게 볼 것인지의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이 글이 그런 과제를 감당하기에는 역시 분에 넘치기 때문에, 삶과 세계의 접점을 탐구하는 시단의 몇 가지 경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해보고자 한다. 또한 리얼리즘과 벤야민의 자연사 개념을 맞세워놓고 리얼리즘의 당대적 양상에 대해 조금 고찰해 보려고 하는데, 이들 두 작업이 리얼리즘을 어떻게 새롭게 볼 것인지의 문제에서 아주 동떨어져 있는 작업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변명처럼 부기해 둔다.
2. 삶과 세계의 접점을 탐구하는 세 가지 시선視線
시를 쓰는 일은 어떻게든 삶에 대해 고민하는 일과 관련을 맺게 되어있다. 모방론적 문학관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다른 문학관에 있어서도 문학은 어느 정도 인간학의 성격을 띠며, 또 어느 정도는 모종의 인생론을 경유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령 삶과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시적 태도를 준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A) 주체를 경험 위에 명확하게 정립시키고 그 주체의 직관에 근거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유형. 이 유형은 젊은이다운 치기를 순치하는 과정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 데 그 특징이 있다. (B) 인간과 삶, 경험과 지혜가 모두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성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성숙해간다고 생각하는 유형. 이 유형은 세계의 불완전성에 실망하면서도 세계를 포용하고 개선해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얼마간 낭만적으로 보이고, 또 성실해 보인다. (C) 삶과 세계의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하고 세계를 부정하는 유형. 이 유형의 세계 비판이 가장 예각적이지만 한편으로 현실 도피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010년 들어 안현미는 ‘카이로’라는 제목의 시를 두 편 발표했다. 첫 번째 「카이로」(≪현대문학≫ 2월호)와 두 번째 「카이로」(≪문학과사회≫ 봄호)가 저마다 ‘카이로’라는 미지수가 들어있는 방정식인데, 이 방정식이 인생론의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방정식을 풀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시인 스스로가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강조가 ‘전언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카이로」가 일층 직설적인 반면, 두 번째 「카이로」는 상대적으로 우회로를 더듬고 있다. 두 편 모두 첫 시집 <곰곰>의 「러시안룰렛」, 「timeless time」 등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고 기다리고 다시 만나고 하는 원풍경과 이어져 있으되, 어쩐지 두 「카이로」는 그 원풍경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가령 방정식을 풀지 않겠다는, 연연해하지 않고 한번 살아보겠다는 복안과 맞부딪친 느낌이랄까. 두 「카이로」가 (A) 유형의 지혜로워지며 동시에 아름다워지는 형국이거니와, 여전히 ‘그’와 ‘그 여자’가 나오는 첫 번째 「카이로」가 아니라 곧바로 ‘너’라는 담화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두 번째 「카이로」가 더 흥미롭다.
너는 구시가지를 지나왔어
암흑의 핵심에 대하여 생각했고 암흑으로도 빛나는 램프를 발명하고 싶어 해
모스크의 첨탑을 가리키고 있는 눈먼 예언자의 지팡이는 여러 생 전엔 너였을지도 모르지
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전쟁, 지진, 쓰나미, 기아, 자살 폭탄 테러……
삶은 죽음만큼이나 아득하다,고 느끼면서
새로운,이라는 강박에만 사로잡힌 이 세계
너는 구시가지를 지나왔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안현미, 「카이로」(≪문학과사회≫, 2010년 봄호)
「카이로」는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안현미는 ‘현재’를 새것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시대로 규정한다. 새로운 물신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각종 미디어에서는 “전쟁, 지진, 쓰나미, 기아, 자살 폭탄 테러……”와 같은 뉴스들이 흘러나온다. 이 묵시록적인 전언들 앞에서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인 인간은 애달파진다. 어느 순간 삶에 내재한 죽음의 기미를 느낀다. 이 운명적인 순간의 예감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인간이 ‘예언자’이거나 암흑 속에서 빛을 발명하고자 하는 ‘구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예언자’나 ‘구도자’의 삶도 역시 전적으로 어둠 속에 있다. 한 없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고 하는 데 시간을 소진한다. 어쩌면 그런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안현미는 이 불가지성 앞에 이른 듯하다. 그녀는 이 시에서 “너는 구시가지를 지나왔다”라는 구절을 반복하여 배치한다. 그것은 그녀가 삶의 불가지성에 대면하는 하나의 방법론처럼 읽히기도 한다. 미래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구시가지’로 표상되는 생의 경험(과거)을 다시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묘미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유행을 추종하는 데 있지 않고, 눈먼 예언자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데 있지도 않다. 단지 구시가지를 지나왔다는 부정할 수 없는 경험에 기댈 때에라야 삶은 살았다는 의미를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 「카이로」가 간직한 순금부의 철학인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읽었다.
<곰곰>(2006)에서 <이별의 재구성>(2009)으로 넘어오면서 안현미의 시들이 눈에 띄게 형식적 안정감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시가 특유의 언어 유희적 재기를 누그러뜨리면서 인생의 결이나 지혜 같은 것에 도달하고 있는 광경은 야단스럽지 않고 묵묵하면서도 뚝심이 있어 보인다. 한편 심보선의 「음력」은 「카이로」에 비할 때, 오히려 여리고 섬세한 면이 있다. 그가 삶의 지혜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들은 그 지혜가 얼마나 불완전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인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심보선 시의 낭만성이 발원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거니와, 이 낭만성이야말로 심보선 시의 독보적인 고유성으로 감지되는 것은 왜일까. (B) 유형의 성실성이 이 낭만성 뒤에 가끔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시인의 시들은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내어
나에게 말했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혀진 과거야.
젊은 시절 어떤 여행길은
목적지가 있다기보다
서쪽으로
그저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지.
그때 나는 노래했지.
어제까지 돌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오늘은 돌 아래 누워 있네.
어제까지 돌 아래 누워 있던 사람이
오늘은 그 옆에 또 다른 돌이 되었네.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최대한 낮은 어조로
서쪽의 지평선을 읽었지.
서쪽은 음력으로 어제의 동쪽이고
지평선은 하나의 완벽한 입체이니까.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영영 잊어버리고
미래에 펼쳐질 운명의 면적을
달 뒷면의 운석 자국처럼
느릿느릿 넓혀가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 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그것은 음력으로
인간의 아물지 않은 흉터이고
그때 그대의 사랑스러운 이름은
지상에서 이미 반쯤 지워진 채
화석 같은 인광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던 거야.
―심보선, 「음력」(≪미네르바≫, 2010년 봄호)
「음력」의 시적 자아는 발치에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다고 노래한다. 그것은 제2연의 후반부를 참조하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뒤인 것으로 여겨진다. 시적 자아는 그 죽어버린 소중한 사람과 함께 왔었던 장소에 되찾아와 슬픔을 삭이려고 한다. 그는 슬픔을 ‘과거의 시간(음력)’으로 미루어 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운명”에 대해 온통 신경을 집중하면서 지평선 쪽을 응시한다. 슬픔을 음력의 일로 밀쳐내고, 지평선 너머에 묻어두는 삶의 간지奸智가 없었다면 인간은 이 슬픔 덩어리인 삶을 어떻게 다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음력」에서 심보선이 추적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의 간지라고 할 수 있다. 그 간지를 통해 인간이 슬픔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가 아니라 그 간지에도 인간이 얼마나 ‘겨우’ 슬픔을 견디어 가는지가 「음력」의 화두인데, 이 시 마지막 연의 장면은 사뭇 휘황한 면이 있다. 시적 자아는 이미 제3연에서 슬픔을 잊으려다가 “나의 이름을 영영” 잊어버렸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 자기 몰각의 시간 속에서 음력으로 밀어두었던 슬픔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나의 이름을 이미 잊어버린 것처럼 “그대의 사랑스러운 이름”도 반쯤은 잊어버렸다. 지상에서 그대의 고유성이 서서히 사라져갈 때 그 ‘이름’으로 응축되어 있는 고유성이 잿빛 자갈을 빛나게 하며 물질화한다. 인간이 얼마나 슬픔을 못 견디는지 어떤 삶의 지혜도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아물게는 할 수 없음이 드러날 때, 이 시의 슬픔은 비로소 완성된다.
안현미가 옛것을 통해 미지의 것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심보선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함께 성숙해가는 삶의 발견에 대해 나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신동옥은 삶을 조작하지 않고는 삶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위악적으로 드러낸다. ‘악공’ 연작에서 이미 탈현실적 신화 공간을 설정하고 그곳에서 예술의 완성을 위한 고투를 감행했던 신동옥은 「위경」에서도 속악한 현실과 척을 지고 오히려 ‘꿈’의 세계를 경전화한다. 이 작업이 필경 ‘위조’에 귀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작업을 멈추지 않는데, 왜냐하면 세계 자체가 이미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C) 유형이 고집스럽게 관철된 경우이다.
우리가 다시 한 시절, 유고를 겪는다면 꽃을 던지고 난간에 매달리고 거리에 운집할까? 나날을 잊고 부모와 형제와 화환과 장의 행렬이 하나가 되어 손을 잡을 순간이 있을까? 모두를 파헤치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무얼 더 물을 수 있을까? 무얼 더 묻을 수 있을까?
*
강바닥에서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새도록 삽날을 세워 나를 깠다, 국문학사는 역겨워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어, 詩가 재밌나? 내겐 잡음처럼 지지직거리는 게, 등짐을 지고 호이스트카를 타고 철망 너머 하늘에 눈을 담그고 오르락내리락 그런 기분, 캠퍼스에서 내가 배운 것은 대머리 대통령들의 순환 주기와 혁명 계보로 기운 러시아史였다, 알아? 공사판 구멍 뚫린 ‘아시바’ 위에서 배운 그것,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무언가를 세울지라도 지상에 커단 구덩이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 뿌리를 박고 기둥을 세우고 지반을 다지는 것도 아닌 구덩이, 그곳엔 우리의 피와 잡념이 묻히고 언젠가 광장이 된다는 것.
*
하지만 그것은 네 삶에 이미 갖추어지기 시작하는 진실의 기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남자들처럼 그곳에서 돌아와 그곳에 아련한 동물의 추억 한자락 붙잡히고
아무런 분노 없이 자신을 얘기하는 그런 비극만 아니면 되는 것.
(중략)
유리병 속에 갇힌 곤충 표본처럼 조금만 더 표피 쪽으로 표피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지만, 불안은 작은 생식세포가 되어 원생동물처럼 기하급수로 분열해 간다고 해도, 병색의 뺨을 비비며 서로의 옷깃에서 주검의 냄새를 맡는다고 해도, 병적인 신경증과 무관심 속에 움직이는 作者는 상상력의 파쇼, 서정적인 정열 속에 재재바르게 죽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는.
늑대는 잠 속에서 무리의 경험을 털끝까지 새겨 나르고,
인간은 죽음 이후에서야 이생을 억겁 반추한다.
내 삶은 잠 속에서 교전 지도를 확장한다.
―신동옥, 「위경僞經」 부분(≪현대시학≫, 2002년 2월)
「위경」은 전직 대통령의 ‘유고’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 ‘물음’은 섣불리 몇 줄 시구로 민주주의에 대한 소임을 다한 것처럼 교묘한 포즈를 취하는 흔한 시들의 ‘이상한 정치성’과는 궤가 다르다. 그러므로 정치적 전언 몇 줄만을 가지고 ‘시의 정치성’을 예단하는 비평가들로서는 이 시의 포즈가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 듯하다. 신동옥이 이 시의 첫 연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상한 정치성의 시’는 아니었을까. ‘유고 행렬’의 사라짐이 하나의 ‘환멸’로 다가왔을 때, 시인이 응당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이상한’이라는 수식어 극복의 당면 과제였을 터이다. 이 문제 제기의 무게가 이 시 자체의 무게보다도 오히려 더 크다는 데 이 시의 문제성이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신동옥이 이 당면 과제에 대해 내세운 답안은 시는 재미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국문학사나 러시아사로 표상되는 ‘정치성’은 관념적이라는 것, 발밑의 현실을 삽날로 ‘까면서’ 나아가지 않는 한 거대 담론은 관념화될 뿐이라는 것, 분노 없는 기록은 과거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나 역사의 관념성과 맞서는 ‘발밑의 구덩이 파기’의 현장성을 ‘미적으로’, 다시 말해 직접적인 전언이 아니라 모종의 묘사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신동옥은 자신의 답안을 실천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내세운 ‘장면’은 군대 파시즘 속에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면서 무의미한 삶을 강요받았던 군복무 시절 기억의 한 장과 여자 친구와의 일상적인 대화 한 대목이다. 군복무 시절 기억은 그 자체로 파시즘적 권력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내세울 수 있었거니와, 오랜 만에 만난 여자 친구와의 일상적 대화가 삽화로 제시된 것은 왜일까. 일상이야말로 역사나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발밑의 현실이라는 논리가 아닐까. 이 일상의 삽화에서 시적 자아는 여전히 ‘왕십리 하늘’과 같은 것을 말하고, 여자 친구는 회사일이나 애인 이야기를 한다. 생활인으로서 여자 친구가 볼 때, 시적 자아의 ‘왕십리 하늘’은 현실에 미달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군대에서의 기억이나 일상의 삽화가 ‘현장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놓여있음에도, ‘현장성’으로 곧장 나아가는 길이 두색되어 있는 현실이 「위경」의 시적 자아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형국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신동옥은 꿈의 영역에서 ‘교전 지도’를 넓혀가는 길을 택한다. 그는 “재재바르게”(정지용)의 문학사를 패러디하면서 위악적인 표정을 해 보인다. 그는 “내 삶은 잠 속에서 교전 지도를 확장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표면적으로 ‘꿈’을 경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경전화는 ‘꿈’이 ‘삶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미묘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삶 자체가 속악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비판이 가능한 지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삶과의 관계를 온전히 지우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여전히 국문학사나 러시아사의 정치성이 도달한 ‘관념’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다. 신동옥은 이 점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꿈의 경전’이 ‘위경’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뼈저린 고백이 제1연의 정치성에 대한 답변으로 미묘하게 반향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현실 발언보다도 신동옥의 고백이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위경」에서 신동옥은 막다른 지점을 보여주었는데, 이 시인이 이 궁지를 계속 밀고 나갈 것인지, 그 뒤에 어떤 초월이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모종의 탈출에 성공할 것인지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된다.
3. 패턴화․물질화하는 역사, 혹은 인간의 자연사
역사와 자연을 양극으로 하여 그 사이의 분광分光 비율을 따지는 것은 오늘날 리얼리즘 시의 현황을 정리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가령 가족사가 이 양극을 잇는 선분 위에서 제법 폭넓게 씌어졌다(유형 A). 물론 이 가족사는 전형성에 초점을 두고 구축하는지 개별성에 초점을 두고 구축하는지에 따라 더 세분하여 살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전형성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경우가 역사 쪽에 더 기울어 있는 형국으로 기술할 수 있을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적인 것이 본연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역사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다(B). 이 유형에서 특징적인 것은 ‘기억의 물질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역사가 대자연으로 잦아들어 자연의 이미지를 띠게 되는 경우다(C). 아득한 개인사가 이미 자연적인 것으로 잦아들어 소멸하기 직전의 애잔함이 이 유형의 특징이다.
근래 하종오는 새롭게 ‘가족사家族史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가족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는 대를 이어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시대와 사회에서 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를 진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위인들이 만드는 역사에 의해 밀려나고 짓밟히고 훼손된 범인凡人들의 시간을 ‘가족사’로 복원함으로써 한 시대를 살아냈던 평범한 사람들의 존재 의미를 추적해간다는 점에서 이 연작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A) 유형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기획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한평생 농사짓던 아버지는
도시로 나가 공부 많이 한 아들이
산천경개나 구경하며 살기를 바랐는데
아들은 식량 주권을 주장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유기농을 하다가 망했다
그 아들이 장가가서 사내아이를 낳고는
농사나 지으며 밥 먹고 살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사내아이도 자라서
공장으로 들어가더니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평생 곡기 챙기는 안살림이 싫었던 어머니는
여린 딸이 선보고 시집간
도시에서 옷 잘 입고 살기를 바랐는데
딸은 장사에 실패한 남편에게 매 맞다가
고향으로 도망쳐와 남의 논밭에 품 팔러 다녔다
그 딸은 낳아서 품고 온 계집아이를 키우며
고향에서 함께 살기를 바랐으나
계집아이는 자라서
대처로 나가 유흥가를 떠돌아다니더니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종오, 「배반의 가족사」(≪리토피아≫, 2010년 봄호)
「위경」(신동옥)이 권력자들의 역사를 부정하고 삶의 현장성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생활’을 얻지 못하고 ‘꿈’의 영역에서 전이 지대를 확장했다면, 하종오의 ‘가족사 연작’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가족사’에서 현장성을 발견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종오는 끊임없이 국가 사회적 공공성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여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가족 공동체가 몇 대에 걸쳐 훼손되고 붕괴되는 비참한 광경을 ‘진정한 역사’의 이름으로 환기시킨다.
「배반의 가족사」에서 하종오는 우리 근대사에서 도농都農의 관계 문제, 입신출세주의와 탈향脫鄕의 문제, 가난의 대물림 문제, 남존여비 의식과 여성의 물신화 문제 등을 ‘가족’ 내부로 끌어와 구체적인 실상으로 보여준다. 아니, 끌어왔다는 것은 착각이며, 오히려 가족사 안의 ‘실상’들이 먼저 있고 그것들이 모여서 근대사를 형성했다는 것이 더 적합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종오는 기존의 근대사 이해의 관념성을 이와 같은 역발상으로 폭로하고 있거니와, 실상으로서 가족사의 역동성을 어떻게 포착해낼 것인가의 과제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실상으로서의 가족사는 해피엔딩의 드라마와는 다르다는 것, 그것은 가족 간의 기대가 무너지는 ‘배반’의 과정이자 사회구조가 가족 공동체를 외부에서 압박하는 ‘배반’의 과정이라는 것이 「배반의 가족사」에 구현된 역동성이다. 어찌 보면 이 이중의 배반이 만들어내는 감정 소비를 그려내는 것이야말로 난제였을 텐데, 하종오는 그 감정 소비는 여백으로 남겨둔 채 가족사를 일종의 보편 역사로 환원한 감이 있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쉬운 시’를 표방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뜻 깊은 연작이 관념적인 역사나 정치 영역에 충격을 가하면서 실상으로부터 ‘진정한 근대사’를 재발견하는 기폭제가 되기 위해서는, 대구법적으로 패턴화된 가족 구성원들의 인생험로를 오히려 특수한 체험, 개별적 체험으로 탈패턴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배반의 가족사」가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 사회적 공공성의 이름으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우리 가족들의 시간을 일종의 패턴으로 복원해 내었다면, 「볍씨 한알」은 역시 그 공공성에 의해 훼손된 범인凡人들의 시간을 기억의 물질화를 통해 복원하고 있다. 이것을 (B) 유형의 일종으로 설정할 수 없을까.
평생 아날로그 때를 벗지 못하다 컴맹에서 막 탈출한 터라, 휴대폰으로 문자나 겨우 주고받아, 줄 갈아끼울 줄도 모르고 그냥 달고 다녔는데, 어느날 후배 여선생님이 대추리에서 거둔 마지막 씨앗이라며 새 줄을 달아주어,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들고 가만 보니, 작은 화분에 떡잎 두개 단 식물의 꽃자리에 볍씨 한알! 덩그렇게 얹혀 있었다.
땅에 떨어져 내년을 기약하든지, 가마니에 담겨 농민들의 겨울 양식이 되어야 할 볍씨가 휴대폰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 마냥 눈물겹기도 했다. 아마도 대추리 사람들은, 소나무가 죽음 앞에서 남은 힘 다하여 솔방울을 퍼뜨리듯, 고향 산천 어디에도 심어놓을 데가 없는 대추리 볍씨를, 마지막으로 세상에다 흩뿌려 사람농사라도 짓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마음 구석이 저려왔다
볍씨는 내 가슴에 고요히 실뿌리를 내렸다. 어딜 가든 모든 길은 대추리에 닿을 것 같았다. 이제 볍씨 없는 사람은 다시는 대추리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누구에게도 이 씨앗을 나눠주지 못했고, 세상 어느 흙에도 다시 뿌려 거둬들이지 못했다.
대추리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던 날, 그날 나는 대추리, 가지 못했다
―배창환, 「볍씨 한 알」(≪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볍씨 한 알」은 ‘대추리 사건’의 후일담을 진술시 형태로 풀어낸 작품이다.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대추리 사람들이 남긴 ‘볍씨 한알’이 디지털 기기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휴대폰의 장식이 되어 돌아온 사연을 배창환은 산문적으로 덤덤하게 기술한다. 시인은 ‘볍씨’가 흙으로 돌아가거나 농민들의 겨울 양식이 되지 못하고 원래의 쓰임새에서 벗어나 하나의 장신구가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 안타까움은 볍씨가 없는 대추리 사람들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대목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그럼에도 배창환은 이 ‘볍씨 한 알’이 대추리에 얽힌, 국가 권력의 파시즘화에 대한 기억을 연장해주리라는 기대를 내비치기도 한다. 한편으로 「볍씨 한 알」과 같은 시의 존재 의의 역시 바로 그와 같은 ‘볍씨’의 새로운 효용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볍씨 한 알」의 마지막 행은 시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날’ 대추리에 있지 않았다는 지식인의 자기반성은 다분히 ‘시적’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실천은 언제나 ‘사후적事後的으로’만 가능하다는 맥락에서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진정성을 얻는다. 국가 권력이 대추리 사람들에게 행한 만행은 이제야 비로소 사후적事後的 전망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없을까.
한편 「통영」의 경우는 「볍씨 한 알」과는 또 다른데, 이것을 인간의 개인적 역사가 대자연으로 잦아들어 희미해지는 ‘인간의 자연사’(C)로 설명해 보고 싶다.
설거지를 마친 어둠이
어린 섬들을 안고 구석으로 돌아앉습니다
하나씩 젖을 물려 저뭅니다
저녁비 호젓한 서호시장
김밥좌판을 거두어 인 너우니댁이
도구통같이 튼실한 허리로 끙차, 일어서자
미륵산 비알 올망졸망 누워계시던 먼촌 처가 할매 할배들께서
억세고도 정겨운 통영 말로 긴 봄장마를 한마디씩 쥐어박으시며
흰 뼈들 다시 접으시며
끙, 돌아눕는 저녁입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이래봬도
충청도 보은극장 앞에서 한때는 놀던 몸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 홀려
앳된 보슬비 업고 걸리며 민주지 덕유산 지나 지리산 끼고 돌라 진양 산청 진주 남강 훌쩍 건너 단숨에 통영 충렬사까지 들이닥친 속없는 건달입네다만
어진 막내 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도 지나왔습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루하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 같은 것이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김사인, 「통영」(≪실천문학≫, 2010년 봄호)
「통영」은 작은 섬들을 안온하게 끌어안는 모성적인 어둠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에서 인간사의 소소한 현장들은 자연사와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다. ‘너우니댁’이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미륵산 비알’ 근처에서 억세고도 정겨운 봄 장맛비가 쏟아진다. 제2연의 “일어서자”는 이 인간사와 자연사의 대위법적 동시성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두 선율이 인과적으로 맞물리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제4연의 인생 유전 역시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과의 관련 속에서 술회된다.
김사인은 통영 앞바다에 이르러 잠시 멈춘 삶의 긴 행로를 ‘속없음’과 ‘따뜻함’의 양가감정으로 회고한다. 그런데 이 회고는 인간이 ‘현재’에 속한 ‘세계-내-존재’로 온전히 돌아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세계-내-존재’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세계의 외관, 즉 ‘동백’이나 ‘벚꽃’에도 이제 싫증이 났다고 말한다. 이 고백으로부터 시인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현존재로서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 된다.
이 시의 웅숭깊음은 이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완성된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현존재를 둘러싼 시․공간적 배경을 드러낸 것에 그치지 않고, 몸 안의 “여치 같은 것”(존재)이 우는 곳이 현존재의 내면인지 “저녁 바다”의 몸 안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개인사가 자연사自然史의 일부로 스며드는 순간이 바늘자국을 남기지 않고 봉합되어 있는 형국[天衣無縫]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고나 할까.
4. 어느 신춘문예당선자 특집에 나타난 삶의 양상
근대 이후 문학이 제도에 의해 떠받쳐져 왔다고 할 때, 신춘문예만큼 문학장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도는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년 여러 문예지에서 신춘문예당선자 특집을 마련하는 것은 이 제도를 기념하고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는 의미가 있다.
≪현대문학≫ 4월호에는 여덟 명의 신인들이 쓴 개성 있는 작품들이 실려 있었다. 그 작품들을 보면서 받은 첫인상은 신인들이 서사를 손에 잡히게 만들어내는 연습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 자체가 없어서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튕겨져 나간 경우도 있었고 이야기를 만들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들을 변주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들이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유연함만을 놓고 보면 「한 양동이의 어둠을 뒤집어쓰고」(유병록)가 제법 안정적이었지만, 한편으로 돼지 잡는 날의 정경이 눈에 익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만월」(박성현)의 제삿날 정경은 우리말의 구사라든지 삶과 죽음을 뒤섞어놓고 시치미를 떼는 의뭉스러움이 돋보였지만, 그와 같은 정경이 자칫 아나크로니즘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우 비슷한 것이 들기도 했다. 「바라나시로의 산책」(김성태)은 가장 기대되면서 가장 걱정되는 작품이었다. 이 시인은 유려한 수사적 장치를 스타트 라인에서 이미 갖추고 있지만 기성 시단의 잠언 취향을 답습한 혐의가 있으며 ‘바라나시’로 가야만 하는 필연성이 없는 이상 이국정조에 대한 편애의 혐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삶을 형상화하는 것이 매너리즘에 빠져서도 안 되고, 시대정신과의 조응으로부터 이행되어야 하며, 떠나고 머무는 데 필연성이 있게 이루어진다면 좋을 것이다. 최근 정우영의 <살구꽃 그림자>를 읽고 든 생각이기도 하다. 어떤 문학평론가가 이 시집을 읽고 백석白石을 떠올렸다고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백석도 백석이지만, 왜 다시 이 시점에서 그 ‘아재’라 불리는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다시 문제가 되는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에 잠겨버린 일이 있다.
≪현대문학≫ 4월호만 보고 신인들의 미래를 점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그들의 시가 내 시들보다 훌륭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글에서 내가 방점을 찍고 싶은 것은 삶의 양상을 그린다는 일의 어려움 자체랄까. 시 쓰는 일이 삶에 대한 관심과 불가분의 관계라면 시 쓰는 일은 결국 삶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그 고민이 개별 작품에서 어떻게 ‘쓰기’로 이어지는지, 혹은 어떻게 그 고민이 한 시인의 시 세계에서 점점 모양을 갖추게 되고 또 깊어지는지에 대해 조금 말해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2007), 편저로 <이수복 시 전집>(2009)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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