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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책冊크리틱/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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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크리틱|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
■윤석정 시집, <오페라 미용실>(민음사, 2009)
송경동의 시 작업이 계기적 측면, 선택적 기로에서 소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와 삶이 일치해야 하느냐 아니냐, 혹은 시의 관습을 깨는 것이 좋은 시라는 선언을 하기 전에 시가 현재 삶에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게 더 먼저이다. 상시화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가난에 쫓기다 결국 목숨까지 내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들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바퀴벌레처럼 구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해 삶의 경계로 떠밀리곤 한다. 일상은 재난이 되어버렸지만 우리 시들이 과연 그동안 이런 부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한 재현을 감당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면에서 송경동 시는 누락된 현실감각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좌표를 보여준다.
1.
당신의 죽음 앞에서
어떤 아름다운 시로 이 세상을 노래해줄까
어떤 그럴듯한 비유와 분석으로
이 세상의 구체적인 불의를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구조적으로 덮어줄까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붕어빵아저씨 고故이근재 선생님 영전에」 부분
2.
오래 산 나무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찬 시들을 보면
벌목해버리고 싶은 충동
그 그늘에 기생하는
역사에 대한 미결정과
안온한 무지와 무책임의 농담이
늘 그 자리인 환원의 뿌리가
지겨워
―「오래 산 나무에 대한 은유를 베어버리라」 부분
위 시들은 그의 시가 결국 너무 직접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낯익은 비판에 대한 시인의 대답으로 읽힌다. 그의 시에 관한 익숙한 지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종류이다. 가령 “삶이 곧 시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송경동의 시에는 시와 삶의 불일치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그 부정성이 간혹 누락되어 나타난다…… 시인이라는 자의식으로 노동시의 관습을 깨쳐나갔고, 시의 전언으로 일반 시의 관습을 야유했으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은 이때 시의 관습과 닮게 된다.”라는 언급이 여기에 속한다. 말하자면 송경동은 시와 삶은 다르다는 한계점을 시에 내재적 양상으로 표현하지 못했고 발화의 양상이 시양식의 일반화한 흐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바꾸어서 되물어볼 수 있다.
시와 삶의 불일치를 언어적 불일치로 꼭 형상화해야한다는 관념이 그동안의 시적 관습 자체였다면 어쩌겠는가. 그런 점에서 시집의 제목 “사소한 물음에 답함” 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한다. 수많은 기교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시의 정전을 선언하는 그동안의 지식인들의 시선에 송경동 같은 시는 너무 단순해서 기존의 시적 미의식의 기준으로 보아선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송경동 시의 직접성은 어떤 미숙성의 징후가 아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서정을 꿈꾼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듯 송경동은 애초부터 시의 정체성 자체를 배려하지 않는다. 시를 두룬 상징과 은유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죽어나가고 있는데, 다른 쪽에선 아름다움을, 미적인 관념 놀이에 치중하고 있다. 사태는 분명한데 그게 시에서는 최소한의 물질성도 담보해내지 못한다. 말하자면 무언가를 시로 말하기 위해서는 주류화한 은유와 상징의 재판관 앞에서 통과허가를 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은유와 상징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닐 뿐더러 재판이 끝나고 나면 입안에 남아있던 말들은 어느 순간 기괴한 ‘부착물들’로 가려진다. 즉, 언어와 사물사이의 일반화한 간극의 차원이 아니라 다른 이데올로기적 전경으로 흡수되어 버려 껍데기만 남는 상황 말이다.
이쯤 되고 보면 「서정에도 계급성이 있다」에서 왜 그가 “그 마르지 않던 서정의 샘을/딱딱한 책으로 과학으로” 채워 나갈 수밖에 없었는지가 짐작된다. 노동자에게 다급하고도 시급한 건 삶의 조건과 가혹한 현실을 뚫고 나갈 서정이다. 이것이 그들의 서정이다. 삶이 이미 비시적이라면 그때 가능한 서정은 시적 부정성을 향한 게 아니라 삶의 부정성 자체를 향해 시를 공명시켜내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는 시를 향해서 분명히 편파적인 입장에 서야함을 말한다. 정형화한 미적 도식 바깥에 서식하고 있는 이런 서정을 시인은 “언제부터인가/있는 말보다/없는 말을 꿈꾼다//금세 가족이 되어 동화되는 말들은/그 말들이 아니다 그의 말들은/닮기 위해 오지 않고/설명하기 위해 오지 않는다”(「아직 오지 않은 말들」)라고 말한다. 설명으로 분류되고 수합되지 않는 “말”은 성애적이고 테러적인 탈근대담론의 가식적 제스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발 딛고 선 현실의 부정성을 향해 스스로를 마찰시켜내는 고투이다. 동시에 생존의 조건을 향한 근원적 질문이기에 정치적 고투이다. 시인은 몸이 빚어내는 생채기 속에서 계급적 서정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2. 내 속에 봉분 하나
윤석정 시는 작은 봉분의 시학이다. 그의 시는 무언가 이미 죽고 사라진 것이 묻혀있는 흔적들을 배회한다. 약간 봉긋하게 솟아있는 봉분의 굴곡은 현재에도 미처 의미화하지 못한 무수한 공명판과도 같다. 굴곡지고 걸리곤 하는 봉분의 돌출은 현재를 살아가기에 거추장스러운 “가시 하나”(「단단해지는 법」)이다. 삼키려할수록 더욱 아프게 들러붙어있는 역설의 기하학, “옛사랑처럼 다가가면 사라졌고/멀어지면 나타”(「옛사랑처럼」)나곤 하는 지점에 봉분이 위치한다. 말하자면 봉분의 표면적은 평탄한 다른 곳을 초과한다. 아주 사소한 차이로 주체를 성가시게 하는 잉여의 공간은 끝 간 데 모르는 욕망을 상징하는 곳이자 “모든 것이 돌고 돌아 아무 데도 도착 못 한”(「그 무렵 살찌우게」) 기이한 모습을 만나게 되는 곳이다. 약간 융기된 봉분에는 무수한 정념들이 층층이 봉인되어 있다. 여긴 “일만 헥타르 공장을 증기로 채울 수 있는 시간”(「구름공장공원」)이 있으며 “나도 모를 신기한 소리를 감추고”(「어디서 자꾸 소리가 나와요」) 있다.
저주에 걸려 말을 내뱉는 족족 모두 개구리로 변하는 설화 속 인물처럼 시인은 현실문법의 지배를 받는 순간 변하는 민감한 내면의 아픔과 슬픔의 감각을 봉분에 묻어둔다. 가령 “바람의 귀퉁이조차 건드리지 못한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아련한, 아련하게 떠오르는/하, 나마저 여기에 묻을까//내 속에 봉분 하나/타지마할, 눈부시게 숨 막히는”(「아름다운 봉분」), “내 거죽은 살아 있어서 소름이 퍼져 나갔다 거죽만 남은 이웃집처럼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아, 밤의 정령아”(「집고양이·2」). 이미 죽은 열정의 무덤은 인연의 뒤안길로 도망쳐버렸고 남은 건 지리멸렬한 현실을 살아가야하는 업보뿐이다. 영혼과 실체가 빠져나간 채 말하고 밥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가는 건 다만 거죽이다. 실체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건 주름진 표면의 굴곡들이다.
그러니 생은 몇 번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완성되었고 우리는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못한 채, 사라진 인연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인연이 내 가슴을 가져간 영 점 영영일 초”(「구름공장공원工員」)는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미처 현실을 살수 없게 만드는 무수한 시간성이 녹아있는 순간이다. “영 점 영영일”의 시간은 현실에서는 결코 체감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건 소수점 밑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무한을 향하는, 도달할 수 없는 상실감의 지옥을 가리킨다. “뼈만 골목마다 덩그렇게 남겨 놓는 내 지옥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어슬렁거리는 고양이」)처럼 심장을 일렁거리게 하는 미세한 감정의 흔들림 주위로 시어가 어슬렁거린다. 살랑살랑하는 듯 번져가는 순간적인 정념들의 핏빛 기억, 사랑의 상실과 상처는 막다른 생의 골목 끝에 도사린 기억을 불러들인다.
민무늬 검정 스카프를 휘감은 늙은 여자 미치도록 사랑해 본 여자 줄무늬 팬티를 즐겨 입는 여자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는 여자 후미진 골목 바람벽에 기대어 헛웃음 파는 여자 펑퍼짐한 엉덩이 드는 여자 능청스레 일어선 여자 엉덩이에 눌려 있던 소파의 잃어버린 부력처럼 생이 통째로 움푹 들어간 여자 글씨가 지워진 벽보에 이름을 쓴 여자 이력이 여자라는 여자 여인숙 입간판 사이의 여자 비릿한 눈빛이 거웃처럼 검은 여자 어둠을 삼키는 여자 사방에 빈틈없이 붙어사는 여자 골목을 지워도 골목에서 지워지지 않는 여자
―「파리」 전문
파리가 주위를 맴돈다. 파리는 결코 냄새의 실체 주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깨끗한 풍경에 티처럼 붙어 있는 파리, 계속 아른거리는 파리의 움직임 위로 사창가 후미진 골목의 늙은 여자가 오버랩 된다. 여자로 반복되는 기이하고 중첩된 문장들은 파리의 음습한 움직임의 반복이자 불안의 징후이다. 그래서 묻게 되는 건 시인의 눈에 비친 풍경 자체라기보다는 여자의 형태로 단속적으로 규정된 그 무수한 여자들 사이의 빈틈이다. 파리는 여자들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가 실패하는 지점, 규정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기미를 읽어내는 게 된다.
시인이 말하는 파리는 여자들 모두의 규정이 실패하는 죽음, ‘시체’ 주위에서 떠도는 강력한 증언이다. “생이 통째로 움푹 들어”간 죽음 위로 또 다른 삶이 이어진다. 죽음을 애도하는 삶 말이다. 사라진 실체를 대신하는 건 미세한 흔적으로서 파리만이 남는다. 무언가 있었다는 증거로 작은 잔존물들은 남아서 현존 주위를 맴돈다. 가령 “어쩌다가 나는 모기로 태어나/사라진다는 불안”(「어쩌다가 나는 모기」)에 시달리거나, 냉장고를 점령한 “보송한 솜털을 피운 곰팡이”(「어디서 자꾸 소리가 나와요」), 혹은 “쥐는 소문을 번식시키는 종”(「귀」)이라는 명명은 모두 이와 관련 있다. 골목에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골목을 지워도 골목에서 지워지지 않는 여자”는 「일요일 없는 일요일」처럼 시인이 겨냥하고 있는 게 실체론적 규정 너머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시집에서 반복되는 살갗, 거죽, 봉분의 표피성은 바로 x없는 x의 물질적 기호인 셈이다.
그런 형식 논리적 모순은 생의 모순을 향한 일종의 상형문자이다. 가령 젊음의 방황, 사랑의 열병, 생의 공허 등을 서술한 「그 무렵 살찌우게」는 “생이 목차가 침목” 같이 벌어져 있던 순간의 비망록이다. 제목의 비문법적 문장의 운명이 암시하듯이 “맴돌던 환풍기”와도 같이 돌던 방랑 뒤에 시인이 본 건 “모든 것이 돌고 돌아 아무 데도 도착 못 한” 생의 아이러니이다. 모든 탐색이 결국은 부질없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그런 의미에서 방황의 시간을 살찌게 만든 순간은 또한 유의미했다. 시인이 만나게 된 깨달음은 찾았던 것이 소멸한 순간 찾아오는 깨달음이다. 시인은 어떤 걸 진정으로 얻는 순간은 그걸 잃어버린 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상실을 뒤로 하고 생은 그 무엇으로든 팽팽해진다. 표면과 실체와의 간극으로 생이 가득 찬다.
이훈∙200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현재 광운대,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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