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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책冊크리틱/금은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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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60회 작성일 11-03-11 15:50

본문

크리틱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

박찬일,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뿔, 2009)



구도자의 춤, 독무獨舞와 군무群舞 사이

금은돌|문학평론가

한 구도자의 독무獨舞

그녀의 시집을 다 읽어가자, 스르르 잠이 왔다. 맘에 안 드는 시집을 읽고도 잠에 빠져본 적이 없던 내가, 왜 잠이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최승자 시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빨리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시집을 신청했다. 택배가 배달되자마자 일인 침대에 누워 읽었던가? 소파에 앉아 읽었던가? 그 전날, 밤을 새운 것도 아닌데. 무엇이 이토를 나를 무너지게 하는가? 며칠이 지나 시집을 다시 펼쳐보았을 때도, 또 잠에, 빠져들었다. <쓸쓸해서 머나먼>은 꼿꼿이 서 있으려는 이성을 녹여버리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무방비 상태로, 무장해제 시키고 있었다. 내 안의 욕망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감춰진 권력욕,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기고 싶은 욕망, 겉으로는 품위 있는 척하면서 속물스러운 이기심들, 내숭과 요염함, 때로는 질투 같은 치기어림 등등, 이런 모든 잡것들을 모조리 놓아버리게 했다. 그리고 왜 글을 쓰는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했다. 결국, 나는 …… 잠을 잤다 ……. 몽롱한 상태에서, 내가 나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난, 이 지면에서 (살짝) 벗어난다. 그녀에게 편지를 띄워 보낸다.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흐른 것은

대서양도 아니었고

태평양도 아니었다

다만 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미래의 시간들은

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전문


당신의 시집은 읽기 쉬웠습니다. 단숨에, 후루룩, 넘어갔지요.

당신은 시 속에, 구멍을 뚫고 있었더군요. 그것도 아주 쉬운 구멍을요. 그 구멍에서 나오는 시어들은 쉽게 풀어지는 실타래 같았습니다. 행과 행 사이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하늘과 땅 사이, 당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블랙홀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개 구멍만으로 부족하여 (아직 철없는) 저의 구멍까지 뚫어버렸습니다.

그 헐거운 구멍 속에서 당신은 담배를 피우고,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이미 어려운 것-상처와 고난과 병-들이 다 걸러진 뒤여서, 가벼운 깃털 몇 개가 떨어져 내립니다. (지난 것들을 어려운 구멍이라 말해도 될까요?) 그 세월 동안 겪어왔던 원망, 도전, 토악질, 분노, 비극, 슬픔, 체념 등을 죄다 어려운 구멍에 방사放赦하셨더라고요. 그래서 한숨 같은 깃털로 시의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벌려놓은, 쉬운 구멍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상념을 보내 버리고 싶습니다. 젊음이 빠져나가고 머리카락 빠지듯 시간이 빠져나갑니다. 당신의 시간은 무척이나 상대적이어서, “십 년이라는 시간”이 “담배 한 대 길이”와 맞먹습니다. 그 사이, “새 한 마리가 폴짝/건너뛰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우습죠?

“나는 아파서/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깨어보니, 낯선 땅에 도착해 있는 기분이 들었겠습니다. 아마도 존재의 집이 사라져서 그러했을 겁니다. 1999년도에 시집 <연인들>(문학동네)을 발간한 이후로 10년 만에 <쓸쓸해서 머나먼> 시집을 발간한 것이니 말이죠. 시인은 시의 집()에 살아야 하는데, 시와 멀어진 사이, 구원의 손길이 멀어진 것처럼 느꼈을 테니 말입니다.


시를 쓴다는 것이 그 창작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오로지 내 자신에게만 국한시켜 말하자면, 시 쓰는 것이 어떤 구원과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너무나 심각한 비관주의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만약에 내게 무언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니고, 내가 더없이 마음 편하게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며, 내가 해야만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작은 변명 ― 모기 흐느끼는 소리만한 작은 변명 ― 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의 집>, 문학과 지성사, 1989, 시인의 말에서(밑줄은 필자가)


최승자 시인, 당신은 시를 쓰는 일이 “무엇인가 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기에, 욕망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기에, 오로지 구원 그 자체였기에, 그토록 순수하게, 자신을 밀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치열하게, 끝까지 말입니다. 그 끝을 보려고 했던 당신의 발걸음을 음미해 봅니다. 헐렁해진 발걸음 사이, 사이에, 행간의 침묵 사이, 사이에, 그 고단했던 땀방울이 맺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떡하나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참 우습다」)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으니. 어려운 구멍 속에서 “담배 한 대 피우며” 다른 세상 구경을 하는 사이, 40대가 사라져버렸으니.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새끼줄을 꼬아서 짚신을 삼을 수도 없고, 뭉텅, 사라져 버렸네요. 녹아버렸어요. 낯선 땅에 여행 갔다가 돌아온 기분이 과연 이런 것일까요?

그렇다고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하지 마셔요. 당신은 “마음 편하게 놀고 먹”지 않았으니까요. “모기 흐느끼는 소리”로, 아무 것도 되어 줄 수 없는 하찮은 시의 집()에서, 진실로, 시를 꿈꾸신 분이, 맞으니까요. 시는 하찮아서, 아무 것에도 쓸모없어서, 그럼에도, 그게 가끔, 가슴을 치고 들어와 맺혀서, 시가 시인 줄 아는 것이니까요. 그것 때문에 시를 버리지 못하시죠? 너무 진지하셔서. 너무나 비극적이었기에!

어떤 점쟁이가 그랬다면서요? “당신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내려올 적에 길가에 난 백합꽃을 꺾었어. 백합꽃 꺾은 죄로 이생에서 고생을 하는 거라구.”(「백합의 선물」, <연인들>) 그 고생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가에, 전생에 꺾은 백합꽃을, 이제는 가슴에 묻어놓으세요. 당신을 위해서. 그 가슴에 심은 향기가 치유의 선물로 피어날 수 있도록, 꽃대궁을 심어 놓으세요. 그러면 “미래의 시간들은/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릴 테니까요. 당신이 이 시에서 괄호( )를 빌어, 혼잣말 하듯, “모기 흐느끼는 소리만큼만”한 소리로, 자신을 위해 축복을 내리듯, 시가 구원이 되어줄 테니까요. 꿈속에서도, 시의 집()에서, 시집詩集을 짓고 있을 테니까요.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

이 춤을 어떻게 추어야 할까

하나는 너무 말이 없고

다른 하나는 다변이지만

둘 다 약속한 듯 신비주의적 본론은

입 꾹 다물고 있다

노자의 춤사위는 승무이고

장자의 그것은 탈춤인데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하나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새끼손가락만큼

아주 쬐끔 튕겨보았다

노자의 바다와 장자의 태산 사이에서

나는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에서


당신은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끝난 뒤, 마지막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어려운 구멍이 헐거워지며 제 자신이 낱낱이 해체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세포 구멍마저도 모두 다 열리고, 벌어져서, 허물어지던 걸요. 잠이 오던 걸요. 저도 당신 언어를 따라 춤을 추었나 봐요. 어깨에 힘을 뺀 채, 헐거운 춤을, 못났지만 몸의 숨결을 따라한 어색한 춤을, 다 버린 듯이,(그렇다고 착각하며 따라했던 거겠지만) 사념 없이, 추었다가 잠들었나 봐요.

사실, 당신은 첫 시집(<이 시대의 사랑>)부터 슬픔과 죽음의 춤을 추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 춤을 추네요.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과정에 도착한 지식의 집, 그 집에서 맛보는 춤 맛은 어떠하던가요? 여기서도 당신은 자신의 색깔을 찾으시네요?

그런데 제 눈에는 루비콘 강이 보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 이성과 무의식 사이, 책과 삶 사이에, 담배 한 개의 길이와 시간이 맞물리는 사이, 병과 병원 사이에, 책상과 떠돎 사이, 당신의 춤은 그 강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고깔과 버선을 모두 벗어 던지고, 맨발로 디디는 영혼의 춤이라, 아련합니다. 맨발이 닳고 닳아, 굳은 각질마저 벗겨져, 여린 새살이 힘겹게 올라오는, 혹은 너무 쉽게 돋아나는, 이상한 안타까움이 감돕니다. “눈물의 제의”(시집 <연인들> 김정환 표사의 한 구절)를 끝낸 뒤, 치루는 춤이기에, 쏟을 수 있는 건 다 쏟고 난 뒤, 저절로 우러나오는 살풀이이기에,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가녀린 떨림이 애절합니다.

당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시를 써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지요? “노자와 장자” 사이에서, 괄호( ) 속에 숨겨진, “랍비가 스치듯 지나가며 서로 인사하는” 사이에서 당신은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거였지요?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당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의지가 빛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여. 당신이 가고자 했던 그 끝은 어디였나요? 그 고원에서 당신의 춤에 날개를 달아 줄 무지개를 보았나요? 너무 멀리 가지 마셔요.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머리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온몸으로 행하고, 온몸으로 스며들어, 몸을 움직이는 시인이라는 걸 알기에, 당신 춤을 바라보는 마음이 애가 탑니다. 파도 앞에 흔들리는 촛불을 보는 것 같아서, 쓸쓸하니까요. 이제 그만 마른 고원 어디 즈음에서 쉬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도 말씀하셨잖아요.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요.

그나마 당신에게 시가 구원이어서 다행입니다. “병원 안 컴퓨터실/고요한 실내/책상 앞”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천국”(「책상 앞에서」)이라 안심이 됩니다. 시가 원래 헛소리도 하고, 꿈도 꾸고, 춤도 추는 장르이기에, 가끔씩, 자신을 치유해 주는 마술을 부리기에.

시인이여, 당신이 “잃어버린 것들의 하늘”에 저라도 “맑은 소프라노의”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이/아침 노래를”(「맑은 소프라노의」) 가끔씩 들으시겠지만, 가끔씩 그 노래가 끊어지면 저라도 불러주세요. 멀어서 부르기 어려우시다면, 그 소프라노 곡조가 끊이지 않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개인적으로 종교 생활을 안 한지 오래 되었지만 말입니다.)


황홀합니다

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바가지 이야기」에서


시집을 덮으며, 85쪽에 담긴 마지막 시를 읽습니다. 이 부분을 읽는데, “흐르르흐르르” 자꾸 무엇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실타래가 몸속으로 들어와, 목구멍에 콱, 들어와 막히려는지. 그래도 시가 함께 있으니, 다행입니다. 당신의 황홀한 꿈이 계속 되었으면 합니다. 시의 집()에서, 시집詩集으로, 또 한 권의 춤판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시집을 또 만나고 싶거든요.

그녀에게 이 편지가 도착했으면 좋겠다.

나도 최승자 시집을 읽으면서 쓸쓸하고 황홀했으므로!


관계 속에서 추는 군무群舞

박찬일에게 허공은 밀도가 넘쳐나는 공간이다. “별 하나 나무 한 그루 꽃잎 하나 나뭇잎 하나 다 별이라” 그냥, 비어있는 공간이 없다. 허공도 원래 에너지 기류가 흐르는 물질세계이다. 박찬일은 그 물질을 “하느님”이라는 호명한다. 시가 다가오는 순간은 곧, “하느님”을 발견하는 순간이 된다.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듯이, 사물 하나하나에 관계가 형성되고, 의미가 발견되는 순간, “하느님”이라는 호명이 이루어진다. 이때 모든 사물이 질감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박찬일의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거룩한 물질이다. 다소 남성적인 목소리로 굵직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목을 조이며, 때로는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다양하게 형태변화 한다. 그는 비가시 세계의 힘을 가시화시키기 위해서, 그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마찰을 감행한다. 손바닥으로 치듯이 허공을 때리고, 눈에 보이는 벽돌 한 장으로 만들어 놓는다. 최승자 시인처럼, 허공에 구멍을 뚫기보다는, 허공을 입체화시킨다.


멀티 콘센트 전기 차단 스위치를 누르면 선풍기에 붙어있는 정지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도 선풍기는 꺼진다

꼭 선풍기에 붙어있는 정지 스위치를 눌러 선풍기를 끈다

멀티 콘센트 전기 차단 스위치를 누르지 마소서, 하느님. 나의 목을 직접 조르소서, 하느님. 내가 알게 하소서, 하느님.

―「멀티 콘센트 전기 차단 스위치」 전문


시인은 “멀티 콘센트”와 연결되어 있는 정지 스위치 누르기를 거부한다. 쉽고 간단하게 선풍기를 끌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고는 몸을 움직인다. 멀티 콘센트와 선풍기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게다. 시인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직접 걸어가 선풍기 스위치를 누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 나의 목을 직접 조르소서,”라고. 왜 그럴까? 시적화자가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의 직접성, 들이대고 밀어내고, 튕겨내고 받아치고, 조이고 풀어내면서 마찰을 하려고 한다. 이 마찰 에너지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한다. 그것이 내 목을 조이는 위험이 있더라도, 그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시에도 이와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하늘 정중앙을 향해 쑥쑥 밀고 올라가는 꽃 대궁,

허공에 기대지 않는 줄 알았다.

기댈 곳은 뿌리, 뿌리로만 밀고 올라가는 줄 알았다.

허공이 흔들리는 거였다.

허공을 짚고 올라가는 거였다.

허공이 없다면 나 여기에 없을 것이다.

민들레 없을 것이다.

허공에 손바닥 자국이 나 있다면

그것은 내 손바닥이라고,

나를 자라게 한 것은 虛空이시라고.

―「민들레」전문


식물이 하늘을 향해 직립하려는 것은 향일성 때문이다. 햇빛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 그것을 향해 식물은 수직으로, 위로, 꼿꼿하게, 전진한다. (필자도 시인과 비슷한 시적 풍경을 본 적이 있다. 길가 보도블록에 있는 개망초 꽃대궁이 한번 부러진 상태로 꺾여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잎사귀들이 허위허위 걸음을 옮기듯이, 블록 바닥에 부러진 줄기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부러진 마디를 꺾고 일어나 결국 하늘로, 직선으로, 자라고 있었다. ‘ㄴ’자로 꺾이어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순간이리라.) 시인은 “허공을 짚고 올라가는” 식물의 힘을 본다. 시인의 눈에 허공은 만져지는, 마찰이 가능한 것이기에, 더욱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손바닥 자국”을 내는 것이다. 확실한 자국을 내려고 아마도 박찬일은 손바닥을 허공과 ‘딱’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도장을 찍었을 게다.

마찰은 무한 에너지 공간인 허공을 입체적으로 돋을새김하기 위한 방법이다. 시인은 사물과 사물의 마찰을 통해 관계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싶어 한다. “민들레”마저도 외롭게 “뿌리”에 기대어 혼자 자라나게 아니었다. 식물에게 “허공”은 계단도 되고, 손잡이도 된다. 상호 이익을 주는 관계이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따로, 존재하는 사물은 사라지게 된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완전한 고독도 없고, 시인이 노래하는 고립된 섬도 없다. 고독에 빠진 순간에도 미생물들은 사람의 머리카락 속에서 번식을 하고 있다. 완전한 혼자는 없는 것이다. 박찬일은 세계를 유기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능숙하다. 이것은 단순히, 거미줄과 같은 네트워크 차원이 아니다. 인연이니, 전생이니 하는 낱말로 치환시키기 어려운,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어, 질감 있게 허공을 표현하는 것이다.


별 하나 나무 한 그루 꽃잎 하나 나뭇잎 하나 다 별이라 사람 한 분 한 분 다 별이라 잠시 살다 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힘을 합해 붙잡아 주기 때문이라 술병 하나 책 한 권들도 다 별이라 그동안 살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붙잡아 주기 때문이라 나도 한편이었기 때문이라 붙잡을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눈물 한 방울 웃음소리들 눈물 한 방울 웃음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라 별은 熱이라 熱이 끌리는 것이라 열이 끄는 거라

나의 몸이 그대를 향해 약간 기울어졌던 것도 그대 몸이 약간 나에게 기울어졌던 것도 잠시뿐이었지만 그런 것이었지요

―「動力이라는 열정」 전문


박찬일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힘을 합해 붙잡아 주기 때문”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뜻을 (다소 엉뚱하게라도) 음미해 보면, 허공에 날아다니는 손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말이 된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힘,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의 손이, 중력과 인력의 모습으로, 원심력과 구심력의 원리로, 밀고 당기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생물이라 여겼던 “술병 하나 책 한 권”도 허공의 손이 붙잡아 주고 있다. 더불어 시적주체인 “나”도 그 역할에 능동적으로 동참한다. “눈물 한 방울”마저도 존재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과학적인 태도로 이 부분을 설명한다. 모든 물질에 “열”이 있기 때문이라고. “열”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기대고 싶은 거라고. 사랑이 발생한다고. 다른 이름으로 끌림이 발생한다고. 열은 N극과 S극이 서로 다르기에 잡아 당겨 만지고 싶은 끌림이고, 다른 이름으로 위치를 바꾸고 싶은 사랑의 동작이다. 그렇다! 허공에는 열이 있고, 모든 물질에도 열이 있다. 그 열 때문에 “나의 몸이 그대를 향해 약간 기울어졌”고 “잠시 뿐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랑이 우러나와, 끌리고 있었던 게다. 사랑이라는 말로 다하지 못하는 사랑조차도, 순간적인 사랑조차도, 예열豫熱을 준비하고 있는 하느님이었다. 박찬일의 하느님은 이렇게 세상 곳곳에, 일상에, 허공에 넘치는 물질로 떠다닌다.

최승자 시인은 독무獨舞의 방식으로 시를 쓴다면, 박찬일 시인은 여럿이 함께 추는 군무群舞의 방식으로 시를 쓴다. 박찬일은 관계 속에서 더불어 미끄러지며 기대고, 받쳐주고, 이끌어주는 집단 관계의 춤을 지향한다. 열에너지를 감지하며, 끌어당기고 밀치며, 마찰을 원하는 춤이다. 마찰 속에서 우리는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박찬일 시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의 목을 직접 조르소서, 하느님. 내가 알게 하소서” 외친 것이다. 이것이 생존의 “동력動力”이기에. 그 마찰을 통해 사랑을 감지하고, 관계를 정립하고, 하느님을 느끼고, 생명을 직시하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째로 깨달으며, 그는 점차 미니멀리즘적인 세계로 파고든다. 본질에 가 닿기 위해서 장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집중해 들어간다.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이다.



금은돌∙2008년 ≪애지≫로 등단. 2008년 「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 개인전.

추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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