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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특집 현실 발언/임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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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1회 작성일 11-03-1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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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과 빨간 책
임 태 훈|문학평론가



대한민국에서 ‘중딩’, ‘고딩’으로 산다는 건 한마디로 지옥이다. 나로선 그네들을 ‘청소년’이라고 불러야 할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도대체 뭐가 ‘청靑’하다는 거냐? 학교에선 매일같이 두들겨 맞고, 공부 못하면 소 돼지 취급받고, 없는 집 새끼여도 소 돼지 취급받고, 바리캉에 밀린 머리는 영구 꼴이고, 좋은 대학 갈 능력 안 되면 평생 루저로 살게 될 거라는 악담이나 듣고, 화끈하게 놀아봤다가 혹은 엄한 놈 만났다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신세 종치는 거고, 선생님한테 맞는 거 지겹고 울화통이 터져 어쩌다 반항이라도 했다가는 또다시 매타작! 정학! 퇴학! 잠깐! 말 잘 듣고 착실하게 사는 애들도 많다고? 그 애들은 그래도 ‘청靑’하지 않느냐고?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들 역시 어른들이 만든 온갖 규율과 감시 속에 살며 ‘어렵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중딩’은 ‘고딩’이 되고, ‘고딩’은 ‘대딩’이 되면서 아니꼽고 치사하고 비루한 어른 세계의 일원으로 훈육된다. 그런데도 ‘靑少年’이라니? 이런 단어는 무슨 비결로 시효만료를 면제받고 있는 걸까?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사람들 참 비위도 좋다.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하다. ‘청소년’+‘문학’이라니? 이건 또 뭐란 말인가? 물론 ‘청소년 문학’이란 용어가 등장한 건 꽤 오래전의 일이고 그만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청소년 문학’이 느닷없이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출판자본의 새로운 마케팅 덕분이다. 그들의 ‘청소년 문학’에선 SF와 판타지가 뒤섞이고, 만화나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의 치기와 유머, 과장된 설정도 어느 정도 허용된다. 이런 ‘글쓰기들’ 자체는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오히려 더 재기발랄하고 다양한 글쓰기가 시도되어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고, 필요하다면 허락된 지면을 이 문제에 몽땅 할애하고픈 심정이다. 하지만 작금의 ‘청소년 문학’은 다양한 척 할 뿐 결코 다양하지 않다. 이것은 상업적 창작 테크닉과 출판 마케팅이 결합된 일종의 기획 상품에 불과하다. 시장에서 ‘먹힐’ 작품만이 ‘청소년 문학’의 레테르를 달고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유의 ‘청소년 문학’은 도무지 등장할 수 없는 구조다. 중딩이 섹스에 탐닉하는 소설은 ‘청소년 문학’이 될 수 있는가? ‘청소년 문학’에서 가능한 폭력의 수위는 어디까지인가? 폭력담임을 상대로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피의 복수를 실현하는 고딩의 이야기는 ‘청소년 문학’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상상력은 ‘청소년 문학’이 아니라 ‘일반문학’, ‘성인문학’에서 취급되어야 하는 걸까? ‘청소년 문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어디서 갈리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다음의 두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청소년 문학’에는 상상력 혹은 욕망의 제한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청소년 문학’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난센스로 삼을 만하다.
소년 소녀들에게 아름답고 선량한 생각과 상상력을 적극 권장해야하고, 그런 의미에서 중고딩들에 대한 ‘청소년 문학’의 이바지란 애당초 소박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 문학’의 소박한 이바지는 기실 중고딩에 대한 권력의 연성軟性화된 훈육술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소년’과 ‘문학’ 양쪽 모두에 X자를 긋고, 출판 시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중고딩들의 ‘글쓰기’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그들의 ‘글쓰기’는 연장통이다. 자신들을 옭아맨 거미줄 같은 규율과 감시를 조롱하고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가 가득한 연장통. 선생님과 부모님, 기성세대를 화나게 만들지만, 그때마다 중고딩들의 숨통이 트인다. 
써벌턴은 몰라도 중고딩은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온갖 성적 판타지의 극치를 달리는 팬픽의 세계는 흥미롭다. 자기 딸이 쓴 ‘화끈한’ 팬픽을 부모가 읽게 된다면, 당혹감에 그만 졸도할지도 모른다. 그 딸네미는 그저 ‘재미’로 그걸 쓰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걸 좋아했을지라도, 학교나 가정에서 함부로 발화할 수 없던 어휘, 묘사, 상상, 감각을 맘껏 풀어놓는 경험이란, 어른들의 세계에 순순히 훈육되는 것보다 삶을 다채롭게 만든다. 이런 글쓰기로 인해 팬픽 작가가 타락하고 일탈된 삶을 살게 될 거라 걱정하는 이가 있다면, 그 이야말로 진실로 걱정 받아야 할 사람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타락이 아니라 ‘정동(affect)’에 관한 문제다. 좀 더 많이 다채롭게 기뻐할 수 있는 능력, 좀 더 다르게 새롭게 욕망할 수 있는 능력, 내 정동을 위축하는 힘에 맞설 수 있는 능력, 이 힘은 규율과 금지에 눌려 있을 때보다 그것들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맞설 때 새로운 경지로 발견된다. 그 창조적 파괴와 일탈의 실천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현행법을 위반하는 범죄까지 다종다양하다. 그러니 이것은 양극단에서 양자택일할 문제 또한 아니다. 양극단 ‘사이’를 가로지르는 ‘욕망들’의 실천이 중요하다. ‘팬픽 쓰기’는 누군가의 ‘실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할 수 없어’의 명령어를 피해 사는 게 아니라 ‘~할 수 있어’의 자기 긍정이 필요하다. 이 일에 도움이 될 만한 ‘글쓰기’는 굳이 ‘문학’이라 불리지 않아도 된다.
‘섹스’를 ‘비행非行’에 등치시키고 상상력을 우회하거나 기피하는 ‘청소년 문학’은 10대의 ‘정동’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에너지를 외면한다. 10대 소년소녀의 섹스에 관한한 빛나는 고전문학인 '춘향전'을 떠올려보자. 춘향과 몽룡의 섹스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온 세상의 중심이자 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기뻐한다. 변사또에 저항한 춘향의 기개 또한 사랑과 기쁨을 만끽한 뒤에 확인한 자기 ‘몸’에 대한 자존감이자 확장된 정동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춘향전' 시대의 ‘섹스’와 오늘날 10대들의 ‘섹스’를 동궤에 놓고 생각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섹스’의 욕망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10대들의 세계에서도 복잡하고 오묘해서, ‘비행’, ‘탈선’, ‘범죄’ 취급하며 단번에 매도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춘향전' 시대보다도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더 불편해하고 자기 검열이 심하다. 이것은 우리 사유에 가해진 억압된 정동의 증거이며, 10대 시절부터 신체에 각인된 권력의 작동이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이런 식의 논의를 비판하며, 10대의 ‘섹스’에서 성매매나 성폭력의 심각성을 안일하게 생각한 때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그런 범죄는 역겨운 일이고 우리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나 역시 이견이 없다. 그러나 10대의 ‘섹스’가 성매매나 성폭력의 문제로만 환원되어야 할까? 오직 그 얘기만을 하도록 하는 게 10대들에게 ‘안전한’ 일일까? 10대들에게 ‘안전한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를 구성하는 데 국가와 사회의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이런 질문을 감당할 그릇이 못된다.
어른들이 뭔 소리를 하건 소년 소녀들은 나이에 상관 않고 섹스를 한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이런 경험은 아름답고 소중한 일이다. 피임은 했니? 강제로 당한 건 아니지? 부모님이 아시면 어쩔래? 무슨 여자애가 자존심도 없냐? 라는 식으로 수군거릴 문제가 아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침묵이 예의다. 내 삶에서 거듭 갱신되는 어떤 극치에 관하여, 나에게서 어떤 기쁨과 슬픔, 격정이 가능한가를 확인하고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섹스’일뿐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 스스로 ‘글쓰기’에 이르려면 또 다른 차원의 내면의 도약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런 ‘글쓰기’에 기대할 것은 ‘섹스’가 포함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가 이룬 ‘정동’의 확장이다.
마지막으로 빨간책과 음란비디오에 관한 개인적인 추억을 이야기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에는 한 반에 두세 명쯤 음란물 공급책이 있었다. 그 애들을 통해 반 아이들 전부가 이런저런 재밌는 것들을 돌려 볼 수 있었다. 교실은 신성한 수업장소이면서 음란물을 공유하고 즐기는 핑크빛 공동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청靑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종 일제 단속에 걸려 매타작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혈기왕성한 소년들의 본능에 근거한 공동체가 쉽게 와해될 리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가 돌려 보던 빨간책과 음란비디오 덕분에 학교는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이었던 듯싶다. 어른들이 아무리 강고하게 규율과 억압을 가해도 우리들은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그 시절의 ‘빨간 책’은 최고의 청소년 문학이었고 산소 호흡기였다.

임태훈∙평론가. 소설가.  제도의 경계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인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성균관대 국문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광운대학교 교양학부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1999년 삼성문학상 희곡부문에 「애벌레」가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활동을 시작했고,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된 후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 ≪작가세계≫ 등에 평론을 발표했다. 대표글로는 「게릴라의 글쓰기」, 「미적지근한 시민들의 촛불을 위하여」 등이 있다. 2008년 2월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을 통해 SF호러 「팽형자」를 발표하며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9년 12월에 「101」로 한국추리소설작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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