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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 특집 현실 발언/조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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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순진무구함은 끝났다
―어느 발달잠정보류태의 청소년문학 읽기
조 은아|자유기고가
‘청소년 문학의 현재’에 대해서 ‘문학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나는 우선 세 개의 키워드를 놓고 나름의 개념 규정을 하려 시도했다. 청소년 문학, 현재, 문학성. 그러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청소년 문학이라는 그 애매한 규정에의 논의가 아직까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이미 여러 논자가 언급한 바 있으나 계속 논의를 이어나가기로 합의했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고, 또 사실상 내가 조율할 수도 없는 이 문제에 대해 굳이, 내가,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근자에 ‘청소년 문학’이라는 레떼르를 휘감고 등장하는 소설들이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는데(‘청소년 시’라고 부르는 것은 없으니, 우선 소설이라 말해두자), 이것들의 문학성을 평가하기를 나 같은 초심자에게 (진심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이 애매하고도 낯선 카테고리에 속한 빈틈에의 자유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도의 기회와 소위 ‘문학답다’ 여겨지는 장에서 감히 할 수 없었던 판타지적이고 이국적인 소재 서술의 가능성으로서의 잠재태에 대한 격찬, 그러나 한 편에서는 아직 치밀한 문학성을 띠고 있진 않으니 보다 자장을 넓이고 심연으로 파내려가고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도록 파이를 늘려 나가야 한다는 전형적인 평을 기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굳이,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없는 나에게 지면이 돌아왔을 리 만무하다는 나름의 영악한, 그러나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한 명의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에 중심을 두고 그간 읽은 소설들의 조각을 그러모아 피상적인 그림을 그려보는 일이 그것이다.
누가 읽을 것인가?
나는 무직이다. 동시에 무소속이다. 짐짓 넘어가도 될 개인 약력을 말하는 이유는 의도하지 않아도 이 글 도처에 산재할 어떤 주관, 선입견과 마주하기 전에 당신이 ‘글’이라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예의 신빙성, 그 기대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나는 사교육 시장이 타 분야와의 비교를 거부하고 무한 질주를 멈추지 않는 사태에 대해 지독한 혐오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끝에 매달려, 부모님께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나보다, 하는 일말의 안도감을 드리려 애쓰는 표리부동한 인간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깐깐하던 다른 선생들과는 (어딘지 모르지만 좀) 다른 (결론적으로 허술한)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덕택에 나는 가끔 청소년분들과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이것 역시 나의 착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완득이'가 나온 직후도 그랬다. 별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이런 저런 핑계를 삼아 책을 던져주곤 했다. 김려령의 이 책은 청소년 문학이라는 장이 형성되고 관련 담론이 구성되던 전후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책의 내용, 구성 등 여타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도 어떤 기점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할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기에 ‘'완득이' 이후’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일 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판이했다. 별로 던 데요? 그래? 반 정도 읽다 말았어요. 왜? 너무 뻔하게 흘러가더라고요. 내가 대면하는 청소년들의 개별적인 성향과 성장 배경, 독서 능력을 일반화 시킬 의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내가 ‘재미없다’는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나 그들은 ‘별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청소년 문학이 급성장하고 있고, 다른 여타의 문학 작품들과는 달리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쓰여지는 이 청소년 문학이 해당 타켓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더라, 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이제 질문을 좀 더 구체화 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청소년 문학에 진심으로 열광하고 있는 독자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대상으로 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지정도서 선정 여부와 무관하게)읽는다면, 그들이 여기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청소년 문학을 읽는 이십대, 발달잠정보류태
나뭇가지에 어떤 생명체가 매달려 있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그러니까 어떤 특정 곤충이 변태해서 일정한 모양을 갖추는 것을 성숙의 완성도라 규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떤 개체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그 변태를 거부하고 애벌레도 성숙태도 아닌 상태로 대롱대롱 나무 끝에 매달려 먹고 숨 쉬고 하는 것들이 생겼더라, 이 현상을 줌인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매스컴에 의해 한 동안 매체는 이들 존재를 특필하느라 진을 뺐다. 이들은 성장이 더딘 세대, 온실에서 자라난 세대, 화가 나도 들고 일어나지 못하며, 감히 전복을 꿈꾸지 못하는 세대로 규정받았다. 발칙하다 소문난 십대와 옆에서 지난날을 예찬하며 신경을 긁어대는 삼십대 사이에 껴, 촛불을 들고 광장을 거닐다 떨어진 촛농에 화상을 입을 뻔한 나는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친구들처럼 동일한 의구심과 맞닥뜨렸다. 나, 그렇게 못난거니?
기한을 넘긴 이 미해결 안이 여러 차례 답을 요구했지만, 나는 차라리 완전발달체를 거부하는 뭣도 아닌 생명체가 되는 것이 속 편하겠다고 손사래를 쳐버렸다. 물론 이런 속편해 보이는 생명체를 잡아먹어 버리겠다는 공격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부모 세대에게는 아직도 제 밥그릇 찾지 못하는 속 끓이는 자식이 되고, 일찍이 취업해 결혼자금을 모으기 시작한 친구들에게는 놀고 있으니 부럽기는 하다만, 너는 대체 언제? 하는 눈초리의 대상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사 년제 대학 나왔으면서 당장 비빌 구석이 있으니 세상이 어쩌고 배부른 소리 하고 앉은 고까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자리가 아니니 논점으로 돌아오면,
한 마디로 '위저드 베이커리', '싱커'라는 대표적인 청소년 소설들에 가슴이 설렜다는 고백을 하려는 참이다. 단언컨대, 그것은 ‘그땐 그랬지’의 노르텔지아와 다르다. 청소년 소설의 평이 ‘그래서, 인물들이 성장했어?’ 라는 일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비판은 수차례 있어 왔고 나 역시 비판의 대열에 동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들이 나에게 일종의 설렘을 주는 것은, 내가 아직도 자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십대 후반이 되어도 부모님 집에서 쌀을 축내며 십대 때 끝냈어야 할 유사 언쟁을 벌이며, ‘나중에, 이후에,’ 라는 가정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을 위한 위안은, 사실 아직 이쪽에 더 가깝다. 물론 그 설렘이 정확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어긋남은 남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나를 동요시킨다는 것이다. 고치를 뚫고 짐작할 수 있는 모양으로 젖은 날개를 펼 것을 거부한 발달잠정보류태들은 아직도 뭣 모르고 거세게 뛰고 있는 철이 덜든 심장에 손을 얹으며, 눈을 떠도 지금, 여기 일 것을 이제는 알지만, 내가 지금, 여기를 다르게 발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린 소설을 읽으며 가중되었던 일종의 부담감을, 나는 그렇게 극복했(다 믿는)다.
그런데, 잠깐. 나는 왜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종류의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는가. 성인으로서, 지나간 시절을 아름답네, 아련하네, 하며 채색해본다거나, 아직 발육이 진행되고 있음이 눈으로 확인되는 친구들의 넓적한 등을 토닥여 주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동일시 해 버렸다. 그리고는 그 행위에 적합한 변명을 찾고 있다. 이는 어떤 징후인가?
다시, 누가 읽을 것인가?:압구정의 이중어 세대
1940년 스페인 접경에서 자살한 한 유태인 철학자는 집권을 앞둔 나치의 세력이 융성해져 가던 1931년 경,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에 대한 집필에 박차를 가한다. 뭔가, 이 사람. 죽음이 목전에서 잿빛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데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을 실패에 감고 있다. 조그만 손을 뻗어 장롱 속 주머니에 들어 있는 양말의 보들보들한 감촉에서 마법을 발견하던 꼬마는 몇 년이 지난 뒤 커다란 책장 문 앞에 선다. 부모님의 부재를 틈타 호프만의 책을 읽어 내려가던 훗날의 철학자는 그 안에서 또 다른 마법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이제 순진무구함은 끝났다. 그것은 금지 때문이었다.”
금지와 마주한 어린 영혼의 이야기는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 나에게도 있었을 (것이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순진무구함은 끝났다. 그런데, 그것이 금지 때문이었던가?
소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순진무구가 끝나버렸다 믿는 초상을 본다. 『약탈이 시작됐다』의 성준, 용태, 윤지가 그러하며, '위저드 베이커리'의 ‘나’가 그렇다. 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서 있는 인물들. 당면한 사태가, 지금껏 겪어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못한 용기를 필요로 할 때, 이들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 느낀다. 그런데 나의 순진무구는 언제, 무엇 때문에 끝나버렸더라? 분명한 것은 그것이 금지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과 다른 종류의 무엇이 지금 이 시대의 순진무구를 결단 내버리고 있다.
잠시 우회하겠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압구정이 몇 호선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사 개월 째 이곳의 사람과 문화를 밤낮으로 관찰하고 있다(무엇을 하는지는 묻지 말자. 어쩌다 보니 그러고 있다). 첫 달은 문화적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주로 (엿)듣고 (엿)보게 되는 대상은 학부모들과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메신저, 보다 빠르고 디테일한 정보의 전달자였다. 거대한 시스템의 구조로서 막연하게 알고 있던 ‘지’의 세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벽이 실리에의 연대로 견고하게 부동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가 엄습했다. 문이 열리고 청소년, 혹은 예비 청소년이 들어온다. 이들의 입에서는 로마자가 튀어나온다. 한국어와 영어의 취사선택, 혹은 특정 규칙 같은 것은 없다. 무체계적으로 조직된 새로운 형태의 언어가 천천히 그리고 진득하게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해방이후 작가들이 죄의식을 동반하며 숨겨야 했던 이중어(한국어-일본어) 시스템이 새로운 형태로 현현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전 세대를 괴롭히던 죄의식의 자리엔 우월함으로 버무려진 자의식이 가득 들어차 있다. 공기가 나뉜다.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말하는 이들과 숨죽여 듣고 있는 나머지들. 구석에서 청소년 소설을 읽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두 세계가 가공할만한 불협화음을 내며 마찰하는 것을, 그리고 머지않아 엄청난 균열을 내며 부서져 내릴 것을 본다. 그러니까, 다시, 누구에게 무엇을 읽힌다고?
그렇다, 나는 분명 사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는 구역의 학생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압구정은 그 중에서도 극단적인 예에 가깝다. 범주의 협소함을 무릅쓰고 좀 더 이야기 하자면, 내가 만난 서울과 그 외곽 지역의 학생들은 밤낮 없이 이 학원에서 저 학원을 돌며, 사정이 좀 더 낫다면 집에서 시간에 따라 바뀌어 들어오는 선생들을 마주하며 자신을 단련시키고 있다. 엠파이어를 사수하라. 세습되는 특명 아래에서 순진무구는, 감춰야 할 부끄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금지 따위는 더 이상 제약이 아니다. 아직 순진함이 남아 있다면 감춰라, 살아남을 수 없다. 너무 일찍, 먹고 먹히는 세계의 선수로 번호 매겨진 이들은 조숙함을 강요받는다. 천천히 여물지 못한 미숙한 알맹이는 가려진채. 이들과는 또 다른 나에게조차 남아 있는 성장에의 강요, 그 흔적은 앞으로 도래할 현상들의 작은 파편일 뿐이다. 조숙과 미숙의 상호 부적절한 조화가 이 시대의 순진무구를 매장시키고 있다.
글의 초반에서 나는 해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두 개의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무책임해 보이는 기고가가 이것들을 말끔히 해결할 것이라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소년들이 근래의 ‘청소년 소설’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모른다. 심지어 그 소설들을 자의로 읽는 학생들이 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기 때문에 읽는다고 할 수 있을는지의 여부도 모른다. ‘현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청소년’ 소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여기에 열광하며 물을 주는 문학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청소년은 아니지만 어른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껄끄러운 나는 독자로서 이 현상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호기심은 앞서 말했듯이 문학의 장이 넓어지고 소재가 다채로워지는 것을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는 여느 문학가 내지는 연구가들과는 또 다른 관심에서 비롯한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직은 문학성을 논할 때가 아니라 버라이어티를 즐길 때다.
학생들과 조화를 이룬 답변은 하나였다. 판타지에 유독 매료되며 해리포터에 열광하는 이유, 청소년 소설에 시공간의 넘나듦이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 그곳이 어디든지, 언제이든지, 지금, 여기만, 아니면, 된다. 청소년이라는 구획에 들어간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시기,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들고 삭막한 학원 복도를 부자연스럽게 가로질렀다. 우둘투둘한 검은 양장본의 커버, 그 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어떤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맹세컨대, 그 안의 내용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엔 일종의 흥분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내 손아귀에 들려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유발되는 흥분. 그것이 오븐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위저드 베이커리'의 ‘나’와 '싱커'에 접속하는 미마와 부건이 공명하는 흥분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 움켜쥐려고 하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을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짜릿함. 그것을 원하는 이들을 모두 포괄하기에, ‘청소년 소설’이라는 구획이 오늘따라 비좁아 보인다.
조은아/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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