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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2010년 가을호) 오탁번의 시 해설/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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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86회 작성일 11-03-18 13:12

본문

원시성의 마력
―오탁번 시인의 시세계
  진순애|문학평론가



1. 해학과 초월의 미학
원시성의 마력은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하기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말로써 형언할 길 없다. 지금·여기 우리와 무한히 멀리 있는 세계라서도 그러하며, 무한히 멀리 있으나 여전히 지금·여기의 우리를 유야무야 지배하는 세계라서도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시원이며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인 까닭에 더욱 형언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원시성은 현대 시의 세계도 지배하여 진부한 첨단으로 작용한다. 시원의 세계여서 진부하며 무염의 낯선 세계가 되어버려서 첨단적이다.
형언할 길 없는 원시성의 마력이 오탁번의 시에서는 남루한 일상을 해학적이며 초월적으로 건너가게 한다. 지상의 삶은 궁핍하여 남루하고 이와 같은 남루를 건너가야만 하는 것이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걸어야할 숙명의 길이다. 우리의 숙명의 길에 원시성의 마력은 때로는 즐거운 동반자로 때로는 쓸쓸한 동반자로 그리고 궁극의 세계가 되어 우리를 일탈과 초월로 유인한다. 궁핍하고 남루한 풍경을 남루하지 않게 건너고 있는 오탁번 시의 활보는 지금·여기, 그리고 저기에 있는 우리들의 숙명을 견지하며 초월하도록 유인하는 원색의 마차다. 오탁번의 시는 일상의 근거리와 시원의 원근거리를 오가면서 남루한 삶을 해학적으로 일탈하며 초월에 이르게 하는 마력의 울림인 것이다.
해학과 초월은 원시성의 마력이 이룬 일탈이자 해탈일 수도 있고, 원시성의 시학에서 비롯된 미학일 수도 있으며 시원의 세계가 모티프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오탁번의 시가 구축한 해학과 초월은 이와 같은 세 가지 경우 모두를 아우르고 있으며, 이는 시학이자 모티프이며 오탁번의 지향태로 보인다. 때문에 그가 머문 흔적마다에서 우리는 마력의 해학과 초월을 만나며, 초월의 정신이 점철된 시원의 세계를 만난다. 비록 원시성의 한 켠이 거칠고 적나라하여 서글픈 해학을 심화시킨다 해도 그 마력의 유인력이 불가항력적임을 부인할 길은 없다.

2. 남루한 원시의 풍경, 하나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폭설暴雪」 전문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내린 폭설’과 그 이하의 풍경은 진정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어야 할 것이나, 한편으로는 남루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에 연유함인가?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처럼 ‘좆심 뚝심’이 삶의 유일한 무기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내린 폭설’처럼 그것 또한 원시성의 마력임에는 분명하나 문명시대에 문명과 무관한 삶의 한 자락이자 무기라는 사실로써 서글픈 해학을 낳는다. ‘땅끝 외진 동네’의 쓸쓸한 이미지처럼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와 같은 풍경은 초월의 해학이면서도 서글픈 해학의 모티프 그 자체 또한 아우르고 있다.
땅끝 외진 마을에 울려퍼진 마이크소리와 원색의 비속어가 융합된 방언의 조화도 해학적 조화를 생산한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이나,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이라고 원색어를 가속하는 이장의 언어는 이승과 저승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하는 마력의 언어이자 문명과 원시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하는 초월의 언어이다. 그것은 남루한 일상의 해학이자 지상의 초월이며 문명의 파편적 후광을 비트는 시원의 유인력이다. 원시성이 첨단 문명시대에 첨단적 무기가 되어 일탈하는 마력의 힘을 난무한다.    

3. 남루한 원시의 풍경, 둘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굴비」 전문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가는” 풍경은 땅끝 외진 마을에서 ‘좆심 뚝심’이 무기인 이장이 사는 마을보다 더 외진 땅끝 마을의 원시성의 풍경으로 보인다. 그래서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라고, 굴비장수가 적나라하게 구애하는 풍경이 남루한 일상의 해학을 넘어선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계집이 잠시 생각에 잠겨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궁핍하고 남루한 일상의 존재태를 은유하고 있어서 가난한 일상의 성은 남루하기도 혹은 초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라던 남편의 당부처럼 “―앞으로는 안 했어요/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는 아름다운 원시성의 사랑의 밤풍경도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사랑은 남루하고 성은 쓸쓸한 해학으로 남는다. 남루한 사랑은 혹은 쓸쓸한 성은 땅끝 외진 마을보다 더 외진 일상의 쓸쓸함에 닿아, 끝내는 ‘굴비’의 유인력보다도 더 채워지지 않는 일상의 남루로 머물기도 한다.   

4. 남루한 원시의 풍경, 셋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가다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밥냄새」 전문

‘태어나자마자 먹어야 할 젖조차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린 유년’이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겨우 숨을 이어갔다”는 서술에서 오탁번의 개인적 시원의 세계이자 우리의 집단적 시원의 세계를 확인한다. 누구에게나 유년은 삶의 보고로 작용한다. 풍성한 유년이었건 궁핍한 유년이었건 기억으로 환기되는 유년은 우리의 풍성한 생명의 샘이듯이 시인에게야 생명이자 창작의 샘이니 더 이상 이를 말이 없다. ‘밥조차 굶주린 오탁번의 유년’이 집단적 유년으로 확장하면서 <밥냄새> 혹은 ‘밥냄새’는 서정의 깊이와 동일성의 효과를 배가한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밥때 되면 만날 온나//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회상이, 곧 60여년 어쩌면 70여년 전의 일이 생생하게 현재로 살아있는 오탁번의 창작의 샘을 상징한다. 가난은 역설적이게도 ‘진외가, 진외당숙모, 어머니, 나’ 등의 가족을 긴밀한 유대감 형성에 기여한 집단적 모티프이자 시인의 창조적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는 웃지 못할 사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밥’의 위력을 해학화한다. 유년의 ‘밥냄새’는 오탁번의 현재진행형의 밥냄새로 살아 있는 개인적 원시성이자 우리의 집단적 원시성인 것이다. 유년의 ‘밥냄새’가 역설적이게도 곤궁한 문명적 일상의 우리를 초월에 이르도록 하는 시원의 마력으로 작용한다. 

5. 그리고 순결한 시원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 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속손톱만 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 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애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 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게 첫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 전문 

남루한 원시의 풍경을 건너 이제 시인은 순결한 시원의 세계에 이른다. 순결한 시원의 세계는 ‘하늘과 땅의 사이’가 애초에는 없었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사이’가 생기면서 순결은 남루해지고 그 사이에 ‘과’가 등장하여 ‘과’로 연결된 하늘과 땅은 각각이면서도 환원하는 통일체로 완성된다. 이와 같은 하늘과 땅 사이를 문명의 우주 탐험대가 연결지으려고도 하나, 백두산에 오르면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 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는”, 그래서 ‘과학적 탐험절차가 전혀 불필요한 통일의 세계를 확인하게 된다’고 시인은 초월적으로 순결하게 노래한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애꿎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 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고, 시원의 세계에 흡수된 시인의 목소리가 초월적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리는” 시원의 세계 앞에서 시인은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고, 순결의 세계를 새삼 자각한다. 순결한 시원의 세계 앞에서 거칠고 적나라한 원시성의 언어가 빛이 바래는 순간을 맞는다.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 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실비」 전문

순결한 시원의 시심은 <실비>에 이르러 동심으로 상징된다.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재채기라도 하셨나”라는 ‘실비’가 하느님의 재채기라면, 소나기는 잠시 그쳤다 다시 우는 하느님의 눈물일 터이고, 하루 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는 하느님의 속마음 깊이 묻어둔 한의 눈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실비/비는 하느님처럼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해 주는 ‘과’의 실체이자 통로라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심이 실비 타고 지상을 초월하기도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수직적 초월은 동심 같은 순결한 시원의 시심으로 하늘에 오르는 일인 것이다.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에는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들면서” 제 몸을 키운다는 동심의 시심이 하늘과 땅의 ‘사이’는 애초에는 없었음을 찬미한다. 그러므로 애초에는 없었던 하늘과 땅의 사이이므로 하늘 향한 수직적 초월이 불필요한 시원의 세계로서 동심의 마력이자 시원의 마력임을 시인은 은밀히 예찬하고 있다. 시원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 사이에 부재하는 ‘사이’를 은유하는 동심에 대한 예찬이다. 원시성은 순결한 동심 속에서 그 마력의 폭과 깊이를 더욱 융숭하게 수 놓고 있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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