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39호(2010년 가을호) 권정일의 시세계/ 백인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59회 작성일 11-03-18 13:20

본문

꼴라쥬, 혹은 신경증―시적 차원次元의 붕괴 양상
―권정일의 시세계
  백인덕|시인



1. 낯선, 유쾌한 상상력의 도약跳躍
얼마나 진부해져 버렸는가.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하기’란 시학적 전략은(더 크게는 ‘충격’이라는 아방가르드의 미적 전략마저도), 아직도 이런 저런 시작법 서적의 한 귀퉁이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種이 “어떠한 인간 존재도 내부 현실과 외부 현실을 서로 관련지우는 일의 부담을 면제받지는 못한다.”라는 영국 정신분석학자 위니코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그 누구나 매 순간을 새로운 충격과 낯섦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권정일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행위들, 아니 일상 자체의 진부하고 사소함을 견디지 못하는 활달한, 끈질긴 습성의 시인이다. ‘활달’하다고 한 것은 시 작품을 마치 어린아이들이 레고블럭을 가지고 놀듯이 끊임없이 해체, 재조립하는, 심지어는 그런 행위, 상상력의 전개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더불어 ‘끈질긴 습성’을 소유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런 행위가 인식론적, 존재론적 층위를 마구 가로지르면서 ‘시간, 여성성, 무의식’ 등의 존재 근거와 관련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근본적으로 현 단계의 ‘시적 차원’에 쉴 새 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아도 그리 큰 비약은 아닐 것이다. 남는 문제는 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의문들을 어떻게 정리, 코드화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사차원의 시공간에 익숙하지만, 최신 물리이론(초끈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1차원’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4이든 11이든 이것은 이미 우리의 정신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이므로 방정식의 수립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권정일 시인의 “낯선, 유쾌한 상상력”도 정리, 요약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필자는 잠재적 기준으로 이번 집중조명의 대상 작품들을 ‘꼴라쥬’ 계열과 ‘신경증’ 계열로 구분하고자 한다. 후자는 시간과 자아라는 두 개의 중심축을 따라 전개되고, 전자는 공간과 기억이라는 ‘차원’에서 전개된다. 물론 ‘시간-공간’, ‘자아-기억’이 분리될 수 없다는 불변의 사실쯤은 다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이 ‘편법’(?)은 다만 개별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렬도’의 차이 이상의 의미는 없다. 

콜라 꼴라쥬, 계절은 고백하지 않아도 왔다 엄마는 일생을 찢어진 레이스만 깁다가 항문이 막혀버렸다 동시다발로 솟구치는 고전의 엄마, 엄마를 뒤적였지만 줄곧 깨져버리는 엄마 입에서 검은 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열일곱은 검은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수채화를 그렸다 여름이 핫핫 웃었다 안녕! 카스테라를 뜯어 콜라를 마셨다 여름은 자명했다 열일곱은 세상에서 어두운 관계가 되었다
―「콜라, 꼴라쥬」 부분

이 작품은 ‘혼합 매체’라는 ‘꼴라주’의 원뜻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어쩌면 ‘콜라’와 ‘꼴라쥬’의 음성적 유사성(유포니)에 기대어 상상력을 전개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레이스만 깁다가 항문이 막혀버”린 ‘엄마’와 “검은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수채화를 그렸”던 ‘열일곱’의 ‘나’의 기억이 “콜라와 꼴라쥬”의 음성적 유사성처럼 ‘병치’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의 새로운 ‘콜라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검은 날에 검게 매달려 검게 대롱거리던 나는 빨간 색연필로 29일만 남겨놓고 골똘히 남은 검은 자본의 날들을 빨간 날로 바꾸어 버렸다. 매일매일 즐거운 백야, 생몰을 모르는 꽃이 피고 최초의 문장으로 개구리가 알을 낳고 뱀이 기지개를 켜고 누렁이가 송아지를 낳고 새들이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나는 발가벗고 코끼리 군과 왈츠를 추었다.
―「2월」 부분

반면에 이 작품은 이른바, ‘현실원칙’을 거부하는 ‘자아’의 ‘환상’을 주조로 하고 있다. “검은 자본의 날들”(노동)을 “빨간 날”(놀이)로 바꾼 ‘자아’는 ‘현실’을 무시하고 유쾌한 ‘환상’의 세계, “발가벗고 코끼리 군과 왈츠를 추”는 ‘원초적 쾌락의 세계’로 ‘회귀’한다. 이 또한 ‘신경증’이 원초적 분리와 억압에서 비롯한다는 프로이트의 기본 원리에서는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런 어긋남, 벗어남이 바로 권정일 시인의 시적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런 “낯선, 유쾌한 상상력”을 “끈질긴 습성”으로 되풀이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 글의 방향은 그 ‘원인 탐색’에 바쳐질 것이다.

2. 신경증-‘시간’과 싸우다
시인은 엄밀하게 말해서 ‘시간을 여행하는 자’가 아니라, ‘시간을 이해하려는 자’이다. 이를 ‘철학자’나 ‘과학자’에게 맡기려는 경향은 자못 자연스러운 것이나 올바른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철학자나 과학자는 논리적 이성으로 시간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시인은 감성적 직관으로 이해한다는 방법의 차이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감성적 직관’으로 이해한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철학, 과학적 논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차피 이 모두가 인간의 정신작용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던가?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이를 간단하게 시간을 순간의 점, 즉 수학적으로 미분했을 때의 공간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흐름의 지속’으로 이해하는 방식(베르그송)으로 나누기로 한다. 권정일의 작품은 이때에도 미묘한 혼융, 또는 혼합된 의식을 보여준다. 

침실의 시계와 거실의 시계와 서재의 시계는 정각에 울린다. 

침실의 비너스와 거실의 사회적 동물과 서재의 뿔테안경이 걸어 나온다.

아침이라는 환승역을 알린다. 

비너스가 사회적 동물보다 10분 빨리 일어나고 

뿔테안경이 사회적 동물보다 10분 늦게 나온다.

10분의 빠르고 늦은 맞춤으로 한 집에 모여 사는 사이클 

生生의 시간 

현재과거미래가 동시 탑승하고 

나와 벽 사이, 사이클은 정교하게 운행한다. 

나는 거울처럼 사이클의 뒷면을 보지 않고 탑승하지만 

사이클은 내 불안한 뒷면을 떠나보내며 산다. 

내가 정해놓은 시간에 태엽을 풀고 당기는 사이클 

나는 각기 다른 10분을 통과하고 있다. 

10분은 모두 외부다.

들추는 것도 잡아당기는 것도 없는 사이클을

오늘을 축으로 떼어놓았다 맞추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사이클」 전문

먼저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정각’, ‘10분’, ‘빠르고 늦은 맞춤’과 같은 시어들이다. 일상적으로 아무런 ‘긴장된 의식’ 없이 사용하는 ‘시간’에 대한 어휘들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결코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어휘들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각’이라고 ‘의식’하는 순간, 그 지점은 이미 ‘과거의 한 점’으로 밀려나고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부재를 의식하는 순간, 부재는 다시 과거의 한 점으로 밀려나고, 이처럼 반복만이 거듭될 뿐이다. 그럼 ‘나’는 ‘현재/부재’, 아니면 ‘부재이면서 현재’인 순간을 ‘의식’하는가? 하여간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생생의 시간”은 “현재과거미래가 동시 탑승”한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각기 다른 10분을 통과하고 있다.//10분은 모두 외부다.”라고 한다. 결국 ‘10분’이란 ‘미분적 시간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들추는 것도 잡아당기는 것도 없는 사이클을//오늘을 축으로 떼어놓았다 맞추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라는 시인의 ‘탄식’이다. 의식으로 확보할 수 없는 시간을, 또는 ‘사이클’을 “오늘을 축”으로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일상적 삶이 시인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불편함이 시인의 이른바, “유쾌한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이는 곧바로 진정한 ‘자아’의 문제로 연결된다. “음악 속에 드라마 속에 누군가 시퍼런 수술용 드릴과 칼날을 숨기고 당신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면 당신 안에 있는 「그대」라는 단단한 벽을 뚫고 「그대」를 훔치기 위해 벼리고 있었다면 당신은 그대로 두고 「그대」를 훔쳐갔다면, 당신이 내일의 눈을 뜨고 거울을 닦으며 훌쩍 떠나고 싶다면 당신 속의 살아온 날이 문득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대는 오래 전 당신이 아니고 당신 또한 오래 전 그대가 아닙니다.”(「팝콘효과」) 잔상殘像이 무의식 속에 작동하는 원리를 이용한 ‘팝콘효과’를 마치 우리의 ‘자의식’에 사회가 가하는 압력으로 비유한 이 작품은 ‘당신/그대’의 분리를 통해 ‘주체’로서의 ‘자아되기’의 어려움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컵」이라는 작품에서는 길들여지는 ‘여성’이라는 문제로 다시 확산된다. 그런데 ‘자아’란 ‘자의식’ 못지않게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제한된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를 시인은 다음과 같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낯선 공기처럼 끼어들었다/우리는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우리를 나눠가졌다/우리는 흩어졌다 뒤를 돌아보면 또 뒤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갔다/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 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달라붙어 있다/우리는 여름과 여름 사이 
―「백미러」 부분

이 작품의 ‘우리’는 앞의 「팝콘효과」의 ‘그대/당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갖는데, 이는 “낯선 공기처럼” 공간과 “여름과 여름 사이”처럼 시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가 아니고 둘인데, 그렇다면 ‘자아’와 ‘타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우리’의 존재 양태는 “따로 또 같이”, ‘나눠가졌’고 “가까이 달라붙어”, “어떤 식으로든 존재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근접성, 또는 친긍성의 인식은 ‘긍정/부정’ 양면으로 다 이해 가능한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으로 미루기로 한다.

3. 꼴라쥬-공간을 겹치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시간의 파동에 따라 생성, 보존, 재생되기는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적 특질을 우선적으로 따져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특정한 시간에는 가령, ‘배가 고프다’, ‘졸린다’, ‘춥다’, ‘외롭다’ 등과 같은 습관적 기억에 더 잘 반응하게 되지만, 특정한 공간, 가령 ‘조국’, ‘고향’, ‘학교’ 등과 관련해서는 보다 심원하고 복합적인 ‘회상적 기억’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한 기억이 제 나름의 독특한 형태로 구성된 공간은 바로 자신이 ‘방’이 될 것이다. 권정일 시인은 그 “방 주위의 여행”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겹쳐짐, 또는 가로지르기를 능숙하게 보여주고 있다.

침대
홀로 여행하기 좋은 암자죠 스프링 위로 수억만 리 시간이 벌거벗고 묵은 체위의 배설을 위하여 춤을 춥니다. 말달리자 말 달리자 잠 너머 잠, 꿈의 출입구로 자전하는 애마여, 가끔 태몽을 꿉니다.

거울
나보다 먼저 웃지 않아요.
나보다 먼저 늙지 않아요.

서재 
생물들의 광장
인간의 진열장

니체(걸어온다) 파이프를 문 하이데거(앉아있다) 나는 루쉰과 중국을 (동행한다) 맑스(혁명을 한다) 화요일이었던 남자 모리씨(연애를 한다) 알랭 드 보통(불안을 집필중이다) 촌철살인의 시인들(턱을 괴고) 죄송하지만 박철 선생은 아직도 영진설비 돈 갖다 주러 가나요? 

시든 장미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즐거운 묘비명이여!
가시에 찔렸군요…… 그 후 
릴케라는 이름의 화병에 흘러내린 피
목이 꺾인 채 방치되어 있군요.
푸른 알약을 삼키던 계절은 악천후였어요.
CGV에서 다시 보는 영화 
K2 베이스캠프에 활짝 핀 삶은 
설산처럼 희망을 데리고 놀아요.
시든 너처럼 씁쓸하군요.

흔들의자 
관절에서 무릎
표류하는 중이에요

우두커니, 방주 모서리까지

* 메스트르의 소설 제목

주) 4B연필 2개, 지우개 1개, 연두형광펜 1개, 잉크가 마른 만년필 1개, 맥주 3병, 반생의 여행 그리고 자화상, 여행은 다른 자화상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내 방 주위의 여행」전문

방 안의 풍경은 이렇게 겹쳐진다. ‘침대’는 ‘암자’라는 공간과 ‘벌거벗’은 시간으로, 거기서 화자는 ‘태몽’을 꾼다. ‘서재’에서는 ‘니체’, ‘하이데거’, ‘뤼쉰’, ‘맑스’, ‘모리스’, ‘보통’ 등 과거의 인물들이 ‘걸어온다’, ‘앉아있다’, ‘동행한다’, ‘혁명한다’ 등 현재형 동사들과 만나, 시적 화자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하는 ‘틈’을 생성한다. ‘꼴라쥬’가 이질적인 매체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자연스럽게 인식되어 온 폭력적 현실의 낯선 모습을 드러내는 수법이라면, 이를 차용借用한 권정일 시인은 ‘종이에 인쇄된 문자’라는 단일한 매체 내에서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꼴라쥬’함으로써 ‘낯선 시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완전한 책」을 꿈꾸는 시인의 원대한 포부에서 발원發源한 열망과 좌절일 텐데, 그 표상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s# 읽기 
지나간 것은 읽지 않는다. 읽는 순간 모든 것이 지나간다. 바둑이를 읽는 순간 바둑이가 지나가고 영희 철수를 읽는 순간 영희 철수가 지나가 버린다. 김소월을 읽는 순간 진달래꽃이 지나가고 읽는 다는 것은 외로움이다. 슬픔이다. 나는 지나가면서 공란이 많은 페이지를 넘긴다.

s# 받아쓰기 
핏덩이로 어머니를 받아쓴다. 햇살과 바람과 비와 벼락을 받아쓰고 나무 산 강 바다 꽃 나비를 받아쓰고 연필과 책가방을 받아쓰고 사내아이를 받아쓰고 술과 사랑을 받아쓰고 연어 요리를 받아쓰고……, 당신 대신 여자를 받아쓰면서 기호가 되고 숫자가 되고 느낌표가 되고 물음표가 되고 마침표가 된다. 

s# 띄어쓰기 
햇볕과 어둠은 띄어 쓴다. 소녀와 소년은 띄어 쓰고 사랑과 이별도 띄어 쓴다. 행복과 불행은 띄어 쓰고 전쟁과 평화도 띄어 쓴다. 남과 북은 띄어 쓰고 여보 당신도 띄어 쓴다. 띄어쓰기는 띄어 써야 한다. 앞면을 뒤집어 뒷면이 나오는 것은 띄어 쓴다. 빛의 색은 앞면에 어둠의 색은 뒷면에 쓴다.
―「국어-완전한 책」 전문

일찍이 마르쿠제는 폭압적 ‘현실원칙’을 벗어나는 미적 차원을 언급하면서, 그 미적 형식에 충실할 경우 예술은 “다른 경험이 다다를 수 없는 하나의 차원, 즉 그 속에서 인간 존재, 자연 그리고 사물이 이미 확고하게 설정된 기존의 현실 운용 원리라는 법칙에 더 이상 수렴되지 않는 하나의 차원을 활짝 열어놓는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적 형식’을 ‘시적 형식’으로 바꿔 권정일 시인이 마지막 인용 시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하여 보다 쾌활한 ‘분노’를 “유쾌한 상상력”으로 고발하고, 조롱하고, 돌파해주시길 심약하고 미약한 필자는 진심으로 바라며 이 어설픈 글을 맺는다.

시집 '완전한 책' 
시 한 편에 120원 정도가 
권장소비자가격 

詩는 생물
詩는 소똥

100원에도 팔리지 않는 
이건 혁명이다 
어둠의 총성이 짜낸 
피륙의 적정가격 

내가 발화하는 지점 
자라지 않는 
양철북을 두드리며 
365일 휴일도 없이 
야근에서 숙직까지 
눈알 달궈 만들어낸 
시 한 편의 가격 

킬로그램 당 140원 
폐이지 가격보다도 낮은 

도대체 100원
―「희망소비자가격-완전한 책」 전문

백인덕∙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추천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