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8호(2010년 여름호)흐름진단/소설/김동윤
페이지 정보

본문
|흐름․진단/소설|
디스토피아로 가는, 끈적거리는 욕망의 실체
김동윤|문학평론가
∙김혜정의 「모나리자의 변명」(≪리토피아≫, 2010년 봄호)
∙김현영의 「피의 피」(≪자음과모음≫, 2010년 봄호)
∙한유주의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문학동네≫, 2010년 봄호)
∙김혜정의 「모나리자의 변명」(≪리토피아≫, 2010년 봄호)
∙김현영의 「피의 피」(≪자음과모음≫, 2010년 봄호)
∙한유주의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문학동네≫, 2010년 봄호)
1.
이상 저온으로 한반도에는 4월 중순에도 눈이 내리고, 추위는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 기상 관측 사상 가장 추운 4월이었다고 한다. 5월 들어서는 성급한 더위가 찾아왔다. 하긴 따뜻한 봄이 오래 지속되었다고 해도, 어디 꽃놀이라도 나가 볼 현실이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물속으로 나는 비행기/하늘로 가는 돛단배”라는 김광석의 노래가 저절로 읊조려진다. 봄의 소설들도 그걸 입증한다.
2.
어떤 여자가 있다. 비좁은 고시방에 틀어박혀 입사시험준비를 하면서 수십 통의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보험회사 영업사원에 응시했다. 168센티미터의 키에 통통하면서도 라인이 살아 있는 몸을 주시한 영업소장이 엉덩이를 슬쩍 더듬었고, 여자는 그런 모욕을 감수한 덕에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여자가 지닌 모나리자의 미소는 명품무기로 활용되었다. 여자는 눈썹마저 모나리자처럼 밀어버린 터였다. 고객은 주로 남자들이었다. 대여섯 번씩 만나 노래주점까지 함께 가고 몸을 더듬는 짓도 눈감아 주면서 매출실적을 올렸다. 보너스까지 받은 여자는 고시원을 탈출하여 원룸에 입주했다. 원룸은 여자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그 무렵 여자는 외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볼에 실리콘을 넣어 코와 볼 사이의 주름을 없앰으로써 귀족처럼 보이게 하는 이른바 ‘귀족수술’을 하자, 고객들의 반응이 좋아져서 매출은 더욱 늘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귀족수술의 성공을 계기로 여자는 당분간의 삶의 원칙을 미모로 가꾸는 데만 투자하기로 정했다. 그것만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장의 잔고가 줄어드는 것이 불안했지만 얼굴만 작아지면 돈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여자는 수시로 뜯어 고치며 섹시한 몸을 만들기에 전념한다. 이쯤 되면 심각한 성형중독이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그건 ‘너’, 바로 ‘너’다. 수많은 ‘너’가 바로 그 어떤 여자다. 김혜정은 「모나리자의 변명」에서 성형중독증의 여자를 기어이 ‘너’로 등장시키고 말았다. ‘너’는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성형열풍에 감염된 군상들이다. 다음은 ‘너’가 시도한 갖가지 성형수술 중의 일부다.
네모형인 얼굴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였다. 옆으로 퍼진 광대뼈를 줄이고 각진 턱을 깎아내는 것은 물론, 늘어진 부위를 밀어 올려 부드럽고 귀여운 카리스마로 바꾸는 것, 비로소 너만의 황금비율을 찾아냈다.(72쪽)
이러한 성형의 결과는 무척 놀라웠다. 숱한 남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너’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해 갔다. 대단한 변신이었다.
높은 콧대와 날렵한 콧날, 둥글고 커다란 눈, 도톰한 입술로 변모할 때마다 너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너는 점점 요요해지고 매력덩어리가 되어 갔다.(…)
트레이너의 본격 조언을 받으며 운동하는 중에도 틈틈이 체형의 좌우대칭이나 피하지방의 불균형한 분포를 막기 위해 카이로프 락틱, 즉 척추교정과 경락마사지를 받는 것은 물론, 피부의 탄력을 높이기 위해 보톡스와 필러, 메조테라피를 주사했다.
어느새 너는 심장을 제외하고 진짜는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누가 봐도 풍만하고 탄력 있는 가슴, 살짝 도드라진 쇄골, 실팍한 골반, 쭉 뻗은 종아리, 탱탱한 엉덩이, 굴곡 없는 얼굴뼈와 근육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73쪽)
몸에 대한 ‘너’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몸에 수시로 손대고 기를 쓰고 관리하는 동안에 잔고가 바닥나고 카드가 늘어나면서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친구들은 만나기조차 꺼렸고 영업소장도 괴물취급하면서 퇴사를 종용했다. 꼭지가 돌 지경이 된 ‘너’는 모두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더욱 당당한 자신을 되찾고자 했다.
‘너’는 또 몸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콧대를 더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수술은 큰 부작용을 낳았고 몇 번의 재수술도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너’의 엄마는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덤에서 막 기어나온 것 같잖아.”(76쪽) 하며 흉측한 짐승 보듯 욕을 했다. 빚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몸을 굴리는 ‘일상탈출’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성매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시로 남자를 만나 여관과 모텔에 드나들었다. 이제 “보험설계사로 버는 수입보다 부수입이 많아졌다.”(75쪽) 1920년대 평양의 복녀가 서울에서 21세기형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낮에는 보험설계사로 고객을 상대하고 밤에는 일상탈출의 남자들을 상대하며 두 개의 얼굴로 살아가는 건 스릴 있었지만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결국 ‘너’는 한 가지 직업에만 충실하기로 하여, 회사에 사표를 내었다. 「감자」의 복녀 식으로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일본말로 하자면 ‘삼박자三拍子’ 같은 좋은 일”로 생각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많던 밤의 고객들은 점점 너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재수에 옴 붙었다는 말까지 해댔다.
급기야 직업적으로 몸을 굴리기 위해 ‘너’는 미인촌까지 찾아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 업소들의 반응은 “딴 데 가서 알아봐. 주제를 알아야지.”(66쪽)라는 것이었다. ‘매력덩어리’였던 ‘너’가 미인촌에서도 거부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너’의 주변에서 비비(개코원숭이)가 보이는 것이었다. 비비가 나타났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와 키들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너’도 쇼윈도에 비친 개코원숭이를 보았다. “민소매 셔츠에 벌겋게 부풀어 오른 배꼽 아래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걸핀 꼴이 사뭇 우스꽝스러웠다.”(65쪽)
‘너’는 K와의 재회를 위해 찾았던 동물원에서 다시 비비를 만나게 된다. K는 한때 마음은 물론 몸을 나눈 사이였다가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해 버린 남자다. ‘너’는 “반드시 성공해서 그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69쪽)던 터였다. K와의 재회는 “변모한 너를 보는 순간, 그가 뼈저리게 후회할 거라 생각”(69쪽)하여 시도한 특별 이벤트였다. 그런데 다시 만난 K는 ‘너’를 보더니 도망갔다.
‘너’는 동물원의 벤치에 누웠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각기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한다는 자각, 헛되이 살아왔다는 자괴감”(75쪽) 등으로 상념에 잠기던 ‘너’는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몸이 축축하고 손발이 저렸다. ‘너’는 근육을 풀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흠칫 놀랐다.
팔과 다리가 온통 털투성이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두 발뿐 아니라 두 팔까지도 아래로 길게 늘어진 채 손바닥은 땅에 대어졌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손톱과 발톱은 네 몸에서 자란 것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웠다. 이빨에서 나는 딱딱 소리도 평소의 이빨 부딪치는 소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 너도 모르게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락없는 짐승의 웃음소리였다(78쪽)
‘너’는 사육사에 붙잡혀 우리에 가둬졌다. 우리엔 ‘학명Papio/분류 긴꼬리원숭이과 개코원숭이속’이라는 표지판이 있었고, 여남은 마리의 개코원숭이들이 ‘너’를 노려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비비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쯤 되면 잦은 성형의 결과인 ‘너’의 몸은 가히 사이보그 수준이라고도 하겠지만, 작가는 ‘너’를 사이보그가 아닌 개코원숭이로 만들었다. 잘 보이기 위해 미모로 고쳐지던 ‘너’는 동물원에서 확실한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관광객들에게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사이보그가 아닌 개코원숭이가 되었다는 점, 이것이 오히려 더 의미 있는 발상이다. ‘너’를 개코원숭이로 변신시킴으로써 이 소설이 상식적인 세태풍자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게 되었다. 실종된 봄의 문제작으로 손색이 없다.
3.
어떤 남자가 있다. 모자란 적도 넘친 적도 없이 비교적 평범하게 자랐으며 자기 아들도 평범하게 키웠다고 여기던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남자는 10년 넘는 냉담 끝에 성당을 찾았다.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고해소 안에는 막 서품 받고 온 젊은 신부가 앉았다. 남자에게는 고해성사도 10여 년 만의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남자는 냉담을 풀고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아니, 냉담을 풀 자격도 없다고 자학했다. 그렇다면 신에게 구원받지 못할 존재라는 것인가? 그를 둘러싸고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이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현영의 「피의 피」는 충격적인 내용의 고해성사로써 독자를 단단히 붙들어둔다. 남자는 사흘 전에 하나뿐인 아들을 죽였다고 했다. 아들의 시신을 사흘 동안 방치하면서 “첫날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현실을 가늠할 수 없었고 둘째 날엔 현실을 부정했으며 셋째 날에 비로소 자책했”(457쪽)다고 털어놓았다. 남자는 왜 친자를 살해했던 것일까?
평범한 생활을 무난하게 영위하던 남자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 때문이었다. 마흔 살에 회사에서 정리해고 되면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여기던 삶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중고 휴대폰에게 갈 데가 어디 있”(464쪽)겠는가. 변변한 직장을 찾기가 힘들었다. 비정규직 혹은 아르바이트 두세 개를 뛰면서 버텨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공장에 일용직 잡부로 들어갔다가 암에 걸렸다. 아내 말고도 그 전후로 두어 명 암에 걸렸는데 회사 쪽에선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며 한푼도 안 내놓았다. 아내는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는 해에 40년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남자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세에서 월세로, 월세에서 깔세(보증금이 없는 대신 몇 달치 월세를 선불로 내고 지내는 것)로 거처를 옮겼다. 나중에는 고시원에서 살기도 했고, 가게에서 의자를 이어 붙이고 자기까지 했다. 깔세에 살 적에 선지해장국집을 열었는데, 이삼 년 장사가 잘 되던 해장국집도 그 동네가 재개발지구가 되는 바람에 쫓겨나야 했다. 그 무렵 아들은 이름이 웬만큼 알려진 사립대학에 들어갔고,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하고 입대했다. 남자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간도 쓸개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이 살”(470쪽)면서 아들의 학비를 미리 장만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입대한 지 1년도 안 되어 의가사제대를 했다. 내무반 동료들의 목덜미를 죄다 물어뜯었다며 정신이상으로 제대시킨 것이다. 병원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단이 나오자, 서둘러 복학을 시켰다. 그러나 아들은 복학한 지 5년째 되어도 2학년이었다. “정말이지 망할 놈의 스펙”(472쪽)을 쌓는 여자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고수입’으로 유혹한 피라미드 회사에 취직하면서 학업을 등진 것이었다. 아들의 여자친구는 키 때문에 취업이 안 될 것 같아 얼굴에 손대기 시작했다가 성형외과에 연계된 대부업체에 낚였다. “성형수술 때문에 진 빚을 못 갚는 애들은 또 그 대부업체와 연계된 술집으로 보내진다”(472쪽)니, 아들은 그런 여자친구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모든 사실을 안 남자는 아들의 가슴에 말뚝을 박았다고 했다. 아비로서 절망감과 배신감을 참지 못했을 것임이 짐작된다.
이 작품에서 남자가 시종일관 진술하는 가난한 이들의 실상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진 거라곤 빚과 나이밖에 없는”(468쪽) 이들이 거침없이 양산되고 있건만, 이들에게는 보험도 없고 복지도 없다. ‘루저’들에게는 설 땅이 없다.
남자는 정리해고된 후에 아들 학원비만 빼고는 다달이 들어가는 걸 다 끊었다. 보험들도 모두 해지했음은 물론이다. “꼬박꼬박 보험료 내는 동안은 보험료 탈 일이 없”(463쪽)었으나, 해지한 다음에는 보험금이 절실한 상황이 연이어 생겨났다. 삼성화재나 삼성생명에서 이건희․이재용 부자는 천문학적인 이득을 챙겼지만,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가입자 혹은 해지자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굶어죽을 수는 없어 빚이라도 한번 내는 날에는…… 영영 갚을 수가 없어지는”(464쪽) 그런 사회다. 그래서 남자는 묻는다. “날품도 팔고, 여자 같으면 거시기도 팔고, 장기도 팔고, 영혼도 팔고…… 팔 건 다 팔았는데, 더 이상 팔 것도 없는데 빚은 여전히 남아 있다면 누구 잘못일까”(464쪽)라고. 이렇게 우리는 땀 흘려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전화위복도 없고, 새옹지마도 없고, 개천에서 용 날 리도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한번의 실패가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값진 경험으로 변모하는 세상이 더는 아니더라고요. 점점 바닥인 거예요. 완전히 바닥에 닿아도 치고 올라올 수 없어요. 외려 바닥을 뚫고 밑으로, 더 밑으로……끝내는 지옥에 떨어지는 거예요.(465쪽)
제목에서도 말하듯, 피의 문제는 이 작품의 또 다른 핵심어다. 그것은 혈육인 자식 교육과 직결되는 일이요, 앞서 살핀 가난의 문제이기도 하다. “옛날에야 소만 팔면 됐지만 지금은 가진 거 다 팔고도 모자라 빚까지 져야 자식새끼 겨우 월급쟁이로 만들까 말”(472쪽)까이기에, 이 소설의 남자는 아무리 어려워도 아들 과외비는 지출한다. 자식이야말로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남자에 따르면, 아들은 “피를 빨아먹어야 사는”(457쪽) 흡혈귀였다고 한다. 어미의 젖이 안 나오자 젖꼭지를 깨물어 피를 빨아먹는 “젖도 피도 구분 못하고 빨아대”(459쪽)던 아이였다고 한다. 선지해장국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요리하지 않은 선지도 즐겨 먹었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내무반 동료들의 목을 깨문 것도 피를 빨기 위해서다.
물론 이는 은유로 읽힌다. 부모는 피를 뽑아주고 자식은 피를 빨아먹는 형국을 말한다. 줄 것은 피 밖에 없고 받을 것도 피뿐이다. “과외가 결국은 그 부모들 피 빨아먹는 것”(467쪽)이라는 서술도 작품에 나온다.
모든 것을 바쳐 도와준 여자친구가 아들에게 통보하는 이별 사유도 가난의 문제요 피의 문제다. “부모 피나 빨아 먹는 (…) 애들이 같이 살면 영원히 그렇게 산다는”(473쪽) 것이 여자친구가 헤어지자는 까닭이다.
“네 아비 피라도 쪽쪽 빨아 먹”으라는 말에 아들은 “그러고 싶어도 더 빨아먹을 것도 빨아먹을 힘도…… 없”(475쪽)다고 답한다. 결국 죽음밖에 없다. 달리 택할 길이 없다.
이 소설은 2장으로 짜여진 소설이지만, 제2장은 신문기사 1건만을 그 내용으로 하는바 남자의 고해성사로만 이루어진 제1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사인은 목매달아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476쪽)는 제2장의 신문기사는 고해성사가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제 아들은 비록 흡혈귀였으나 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약해빠진 놈은 아닙니다. 아비가 죽이면 죽을지언정, 그것만은 분명, 기억해주십시오. 그러니 아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요.”(475쪽)라는 발언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결과는 달라질 게 없다. 아들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아비도 온전한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것.
4.
어떤 여자와 어떤 남자가 있다.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겨울날, 문학을 전공한 여자와 화학공학을 전공한 남자가 대화를 한다. 자주 식탁을 공유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 서로 가까운 사이인 듯하지만 소통은 그다지 여의치 않다. 생각의 영역이 꽤나 달라서 삐걱거리면서도 함께 지내는 게 심상치 않다. 그런 여자와 남자가 ‘대재난’을 말한다. 대재난 이전에는 그러했다는 둥, 대재난으로도 세계의 본질은 교정되지 않았다는 둥……. 대재난이라니, 무얼 두고 이들은 그렇게 말하는가.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그러는가.
한유주는 지적 사유로 야만과 폭력으로 일그러진 현대문명을 읽어낸다는 평판의 작가답게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를 통해 지구를 대재난 속에 몰아넣었다. 세계의 절반이 물에 잠기는 끔찍한 대재난이 지구에 찾아왔다. 일본은 80%가 물에 잠겨 후지산 정상만이 남아 있을 정도였고, 독일은 아예 물속에 들어가 버렸다.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한국은 30%가 잠겼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한꺼번에 줄었다. 그래서 대재난이 일어난 지 꼭 3년이 되어 그들은 “삼십억 명이 동시에 제사상을 받드는 날”(250쪽)을 맞는다. “하필이면 우리의 시대에 일어난 거지”(247쪽)라고 했을 뿐, 이미 예고된 재앙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음은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대재난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순간이 곧 영원이 되었다.”(244쪽)고 작가는 말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오십 대 오십의 확률 게임의 승자가 되었”(247쪽)지만 그들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문영)가 “우리도 어차피 익사하겠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255쪽)이라고 했듯이,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대재난 이후에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스워”(247쪽)졌음은 당연하다.
인력引力은 끌어당기는 힘이요 척력斥力은 서로 밀어내는 힘이다. 이 작품에서 과학도인 ‘그’는 척력을 사용하고, 문학도인 ‘나’는 인력을 사용한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니 그 둘은 합쳐지기 어렵다는 것이겠다. 말하자면 이 사회에서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통섭하지 못하는 상황을 엄청난 재난을 통해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재난의 지구에서 과학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다고 인문학도 다른 길이 있는 건 아니다. 대재난을 맞기까지 경고를 무시하고 설마설마 하며 그렇게 걸어왔기에 재난이 벌어진 후에는 무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작가 한유주가 우리에게 보여준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그다지 먼 미래는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다음은 바로 눈앞의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말하는 듯하다.
달라지고 있던 것들만이 지속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한강의 폭이 넓어졌다. 수위도 올라갔다. 물길을 통해 달에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244쪽)
현재 저돌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대운하 사업으로 이어질 것임도 일러준다. “간척지들과 방조제들이 가장 먼저 수장 의식을 치렀다.”(245쪽)는 서술에서는 새만금지구를 비롯한 간척사업들이 떠올려진다. 자연을 거스르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참혹한 산물들이다. 정말 섬뜩하다.
작가는 말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모두 익사하리라.”(245쪽) “우리는 멸종할 것이다.”(254쪽)
5.
처녀가 원숭이로 변신하고, 피 빨아먹는 아들을 죽이더니(혹은 부모의 피를 빨아먹던 아들이 자살하더니), 급기야 지구촌이 대재난을 만나고 말았다. 봄을 빼앗긴 채 여름을 맞아야 하는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착잡하다. 그렇다면 아예 이참에 여름을 더욱 뜨겁게, 치열하게 살아볼 일이다.
김동윤∙1964년 제주 출생. 2001년 ≪리토피아≫를 통해 본격적인 평론활동 시작. 저서 <우리 소설의 통속성과 진지성>․<기억의 현장과 재현의 언어>․<제주문학론> 외.
- 이전글38호(2010년 여름호)흐름진단/시/장이지 11.03.11
- 다음글38호(2010년 여름호)정신과 전문의 김승기 시인의 시 읽기/김승기 11.03.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