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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책冊크리틱/조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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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58회 작성일 11-03-1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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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김남일 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 2010)

■김선우 소설, <캔들 플라워>(예담, 2009)


검은 꽃의 슬로건 혹은 없는 적을 위한 찬가讚歌

조효원|문학평론가

<천재토끼 차상문>과 <캔들 플라워>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일화anecdote로서 등장하였다. 이 두 작품을 소설이 아닌 ‘일화’로서 규정(해야)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소설 본유의 특성이라 할 ‘복잡성’에 대해 의도적/의식적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질서는 이때껏 단 한 번도 어그러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니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달성되거나 완성된 적이 없었고, 그 어그러짐 때문에 생겨나는 수많은 차이와 차별과 차등으로 인해 세상에는 갈등과 이별과 시차時差/視差가 항시 존재해 왔다. 요컨대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복잡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회 경험’이 많은 어른들이 젊은이보다 더 현명한 것은 바로 이 복잡성에 대한 지식—물론 이 지식 또한 매우 불충분하며 기껏해야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근대 문학의 권좌權座를 차지한 소설은 바로 이러한 세상의 복잡성을 가장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문제적인 방식으로 담아내는 예술 장르이다. 물론 이것은 소설의 이념형ideal type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많은 소설들이 복잡한 세상의 견고한 철옹성을 공략하려다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거나 처절하게 갈기갈기 찢기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의 복잡성은 너무나 강력하여 수많은 개념의 속사포에도 끄떡없으며, 또한 너무나 철저하여 그림자처럼 치밀한 묘사의 침입까지도 번번이 패퇴시켜 버린다. 그러나 이 패배와 실패는 결코 내다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보물이다. 소설의 공격이 치열해지고 그에 따라 세상의 방어가 치밀해지면 질수록, 다시 말해 소설과 세상 사이의 긴장이 팽팽해지면 질수록, 비평가와 독자의 보물창고에는 지혜의 편린들이 더더욱 풍성하게 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재토끼 차상문>과 <캔들 플라워>는 이와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저 전쟁터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서서 의아한 눈빛으로 ‘도대체 왜들 저렇게 싸우는 거야?’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눈에 세상의 복잡성을 붙잡고 씨름하는 소설()들의 고뇌는 전혀 생뚱맞은 모습으로 비친다. ‘그건 전혀 필요 없는 싸움이야’, 라고 그들의 눈빛은 말한다. 세상의 복잡성은 이들이 가진 ‘확고한 원리의 안경’을 통과하면서 매우 단순ㆍ명쾌해진다. 겉으로 내보이는 스타일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이 깊은 지점에서 확고부동한 친연성을 소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들을 공히 ‘일화’로 규정하는 것은 타당성을 얻는다. 가령 다음의 두 문장을 보자.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순간, 내게 인간은 다시 단순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너무나 예의가 없었다. 어찌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김남일, <세상의 어떤 아침>, 강, 1997, 「책 뒤에」 중에서

스스로 최고 경지의 불법을 얻었으면서도 재가신도로 남아 중생이 앓는 병을 함께 앓으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 유마힐은 자기의 방에 수많은 방을 들인 광장의 구도자였다. 다른 경전들이 보이는 비교적 순연하고 온건한 말하기 방식이 아니라 쾌도난마하는 논객이며 자유분방한 비판자로서의 유마힐. 그는 어떤 보살의 권위에도 주눅들지 않고 심지어 붓다 앞에서조차 논리 정연한 설법과 영감에 가득 찬 게송을 노래할 줄 아는 자유로운 철인이었다.

―김선우, <물밑에 달이 열릴 때>, 창작과 비평사, 2002, 230-1쪽

<세상의 어떤 아침>이든 인간이란 다만 뻔뻔스럽고 뻔뻔스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지나친 뻔뻔함에 대항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아파하면서도 주눅 들지 않은 채 쾌도난마하는 자유로움 외에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끼고 있는 ‘확고한 원리의 안경’이다. 따라서 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뻔뻔한 세상에 대해서 변함없이 ‘절망’하는 김남일은 이렇게 말한다.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명 유나바머. (…) 18년간 우편물 폭탄으로 3명을 살해하고 23명을 부상시킨 후, 1996년 동생의 신고로 FBI에 체포된다. 그 직후, 이 소설이 싹텄을 것이다. (…) 나는 속절없이 허무주의에 빠졌고, 그러던 중 내버려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에 비례하여 점점 더 근본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 하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근본주의는 없는가. 처음부터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생성이 아니라 소멸을 목표로 삼는! 놀랍게도 나는 그 길을 발견해냈다. 소설의 주인공 차상문을 토끼(더 정확히는 토끼 영장류)로 바꾸자 눈앞이 환히 보였던 것. 토끼라면 유나바머와 달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테러’, 즉 ‘장엄한 전쟁’을 가능케 하리라 싶었다.”(<천재토끼 차상문>, 작가의 말 중에서)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김선우 역시 ‘유나바머’에 대한 열광을 표현한 바 있다. “편리와 진보와 문명의 이름으로 포장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브레이크 없는 광신이 계속될 때, 나와 당신의 거처에 어느 날 검은 꽃 한 송이가 배달되어 올 것입니다. 검은 꽃이 째깍거립니다. 검은 꽃이 폭발합니다. 검은 꽃은, 우리가 기르고 있는, 우리들의 맹신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꽃입니다. 그 후엔 무엇이 남게 될까요?”(<물밑에 달이 열릴 때>, 「유나바머」 168쪽) 이제 우리는 이들이 끼고 있는 안경이 같은 곳에서 제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바로 ‘유나바머’ 회사에 의해 만들어진 안경이었던 것이다. 김남일이 구입한 제품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테러’라는 긴 상품명을 달고 있는 반면, 김선우의 안경은 ‘검은 꽃’이라는 예쁘고 섬뜩한 이름으로 출시된 상품이라는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하므로 이들의 싸움은 복잡성을 목표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이들의 확고한 안경에 비춰볼 때 너무나 부질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근본적인’ 싸움을, 그러므로 훨씬 더 ‘장엄한 전쟁’을 치르려 한다. 복잡성을 분석하고 해체하려는 과학자들의 길고 지루한 고투를 지켜보다 못해 결국 지쳐버린 이들은 그보다는 단 한 방의 ‘테러’가 훨씬 더 효과적일 거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테러리스트들의 이름이 바로 ‘천재 토끼 차상문’과 ‘지오/희영()’이다. 그리고 이들이 벌이는 기묘한 테러 행위는 두 소설의 ‘일화성逸話性’을 이루는 중핵이다. 우선 차상문의 이상한 테러는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목도된다.

“네, 바로 그 돈 낼 때 말이어요. 조금 불안하지 않으셔요? 저는요, 방금 분명히 돈을 건넸는데 그쪽에서 안 받았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표도 안 주고…….”

“뭐?”

세 명의 선배가 거의 동시에 거의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들었나 싶었을 것이다.

“전 그게 너무 불안해요. 시장에 가도 마찬가지여요. 그래서 꼭 물건을 먼저 받은 다음에야 셈을 치른답니다. 그런데 극장이나 시외버스는 매표 창구 자체가 다르잖아요. 그쪽에서는 나를 보지만, 내 쪽에서는 그저 조그만 구멍으로 손만 겨우 보게 되어 있고…….”

“어, 그러니까 네 말은…… 그쪽에서 네 돈만 홀랑 받아먹고 표를 안 줄 수도 있다, 이거지?”

“네.”

“햐, 역시 넌 천재다, 천재! 세상에, 그럴 수도 있구나, 정말. 하지만 토끼야, 너 실제로 그런 적이 있니? 극장이나 차부에서?”

차상문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지? 그럼 됐지, 뭐가 문제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라도 만일 진짜 큰돈을 내야 할 때라면…… 아니면 이사 갈 때 집문서를 넘겨줄 경우…… 하나 둘 셋 동시에 돈하고 표, 혹은 집문서를 넘겨줄 경우…… 하나 둘 셋 하고 동시에 돈하고 표, 혹은 집문서를 맞바꿔야 하는데 0.01초 차이로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전혀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79-80쪽)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세상의 ‘교환’ 원리에 가하는 테러이다. 천재 영장류가 세상에 던진 폭탄은 바로 저 기묘한 믿음—돈을 주면 물건을 준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을 겨냥한 것이다. 이것은 일견 엉뚱하지만, 그러나 실로 가뭇없이 비장한 테러리즘이다. 마치 ‘사무라이’의 칼날처럼. “사무라이는 만두를 먹지 않았는데도 만두를 훔쳐 먹었다고 우기는 만두가게 주인 앞에서 제일 먼저 제 아들의 배를 갈라 그것이 누명임을 밝혀낸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허위 사실로 가문의 명예를 심히 훼손시킨 만두가게 주인의 목을 베고,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속죄하고 제 이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배를 가른다.”(50쪽)

그렇다면 지오/희영의 테러는 어떤 것일까?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출제를 마무리한 다음 주 문제지의 마지막 질문, 희영이 좋아하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중의 일부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왜? 도대체 왜 이런 시를 보여주고 ‘다음 중 이 시인의 작품이 아닌 것은?’ ‘이 시의 주제는?’ ‘바람벽의 의미로 옳지 않은 것은?’ 따위를 객관식 문항으로 물어야 한단 말인가. 눈물이 핑 돌면 그뿐 아닌가.(126쪽, 강조는 원문.)

도서관도 레인보우 마운틴처럼 지오 앞에 펼쳐진 무궁무진한 놀이터였다.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 모험가들, 철학자들, 혁명가들을 만나는 독서의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기한 모험의 시간이었다. 날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하루가 너무 짧아 지오는 늘 아쉬웠다.(226쪽)

이들의 테러가 세상의 ‘교육’ 원리를 향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를 읽고 이것저것 따지면서 온종일 정해진 ‘교과서’만 봐야 하는 이상한 제도를 이 두 테러리스트는 견디지 못한다. 세상의 학교가 요구하는 ‘객관식’ 정답에 대해 테러리스트 희영이 던지는 눈물 폭탄과, 고시考試를 위한 전쟁터로 변해 버린 도서관을 ‘놀이터’로 삼아 마음껏 독서하는 지오의 ‘모험’은 공히 <캔들 플라워>의 장엄한 엠블렘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엠블렘이 구현하는 형상figure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이다. 이 철학자의 먼 후계자들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타인에 대한 지배욕이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면, 자기들이 그렇듯이 남들도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할 것 같아. 정말 한심한 일이지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면 그건 그들의 불행이지 어쩌겠어.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말해 줄 수밖에.”(220쪽)

소설 장르와 그것을 둘러싼 여러 다양한 담론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구축해 온 어떤 ‘협약pact’에 대해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강력하게 이의 제기하는 이 두 ‘일화’의 영웅적 도발이 앞으로 어떤 효과를 산출할 것인가는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이 두 ‘일화’는 적확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격상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언어철학자 르세르클이 말하듯 슬로건은 발화의 진정한 최소 단위로서 언제나 ‘사태에 개입’하는 형태로 현현한다. 그리고 이처럼 가장 미세한 기저 차원에서의 개입과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감응하고 반응할 수 있는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저 테러리스트들의 지극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 반대의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즉 그들의 슬로건은 (존재한 적이) ‘없는 적을 위한 찬가讚歌’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개입과 변화란 언제나 예기치 않은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법이니 말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들의 영웅적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20세기 독일 최대의 법학자 라드브루흐의 말이다. “웅변은 웅변자 자신이 그 웅변에 심취되는 최초의 희생자가 될 때 가장 위험한 것이다.”



조효원∙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와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10 현재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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