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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2010년 여름호)산문 1960년 4월 젊은 그대에게/김태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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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89회 작성일 11-03-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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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1960년 4월, 젊은 그대에게’
들길 지나며*
  -신동엽 시인에게
김태형 시인



제1신
어제 하루는 고단했습니다. 누군가를 불러내려다가 그만두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려는데 낯익은 백발의 어른 한 분이 굳은 입술을 다물고 피곤한 듯 서 계시네요. 부당한 해임에 맞서 출근투쟁을 하고 있는 그이 앞을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몇 발짝 옆에 멈춰 서서 속으로만 힘내시라고 마음을 전하고 왔습니다. 같은 칸에 타게 되면 꼭 이기시라고 주먹에 힘이라도 쥐어 보이려 했는데, 열차는 서로 다른 칸의 문을 열어놓았네요.
일찍 잠에 들었다가 깨어보니 캄캄한 새벽입니다. 먼 금강 줄기 내려다보며 머루알 깨무는 날들이 하루하루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긴 밤을 새며 견뎌보려 합니다. 어느새 흰 물굽이가 내려다보이는 듯한 아침입니다. 창밖엔 작은 눈송이들이 펄펄 내립니다. 중부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렸습니다.
잠 덜 깬 아들 녀석을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고 오는데, 반쯤 눈 녹아 쌓인 길이 질척거립니다. 황폐한 땅에도 아침이 온다고 하셨지요. 새벽이면 아득한 평야에 어디서든 가벼운 휘파람 소리가 울린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밤새 제 눈에는 물먹은 별이 뜨지 않았나봅니다. 석류알처럼 피어나던 얼굴은 기억에도 아득할 뿐입니다. 어제 빌려 쓰고 온 우산이 신발장 앞에 아직 젖어 있습니다.

제2신
상기된 얼굴과 맑은 두 눈으로, 숨결도 뜨겁게 집에 들어선 당신은 거리에서 본 희망을 그대로 품에 안고 있었겠지요. 젖은 발을 말리려고 부스러진 나뭇잎과 검불 따위를 긁어모아 피우던 주먹만한 모닥불이 황토현 잔솔밭과 우금치 계곡에서만 타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서 그 불꽃이 점점 커다랗게 타오르고 있었겠지요.
밤늦은 시간 홀로 책상에 앉아 시를 쓰며 당신은 외세에 굴하지 않은 민중의 푸르른 생명력에 당신의 시를 바쳤습니다. 강은 유유히 흘러야 하고 아무리 준령의 고갯길이 높아도 길은 막히지 않고 어디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물새가 이른 아침 눈을 뜨고 노루와 곰이 산마루를 넘는 곳에서 당신은 진정 살아 있음의 숨결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벽을 넘어서고 무너뜨리는 데 일생을 다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벽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습니다. 맹렬해지고 있습니다. 벽의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벽 앞에만 서면 주먹이 되기도 하고 눈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어둔 벽에 바짝 귀를 대고 살았습니다. 쫓기거나 골목 안쪽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습니다.
벽을 무너뜨리고 나면 벽을 넘어서고 나면 그래도 뭔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기 전에는, 모두가 같은 하루를 살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높은 벽을 둘러치고 소수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분단 상황을 고착화하려는 저들의 거짓 기호는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제도화된 권력을 만들어냈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버젓이 부르짖는 자들 앞에서 ‘혁명’은 지난 시대와 함께 사라진 사어死語일 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쓰지 않는 무형명사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자가 카드 한 장 들고 여행을 떠나는 자유의 나라에서 풍요의 나라에서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벽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왜곡하는 말장난이 정치성이 되고, 요란스런 처세술이 전위가 되는 나라에서 당신의 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제3신
당신께 쓰는 이 편지를 아직 다 쓰지도 못했는데, 문득 이 편지를 어디에 부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시처럼,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마는 그리움으로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하고 혼자만 간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의 시를 잊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부슬비 내리는 종로5가 네거리에서 마주쳤던 소년을 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한때는 죄 없이 크고 맑았던 한 소년의 눈동자가 있었을까요. 그 소년은 당신에게 동대문이 어디인지 물었었지요.
작년에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좁은 골목길 앞에서 약도를 펼쳐 길을 묻던 그 순간 저는 당신이 만났던 그 소년을 떠올리고는 오랜 기억 하나를 더듬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보다 어떤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고야 말았습니다.
1894년 3월, 1919년 3월, 1960년 4월, 그리고 2009년 5월의 저녁길을 저는 헤매고만 있었습니다. 저녁노을이 드리워진 들길에서 수수밭 붉게 물든 어느 사잇길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다고 하셨지요. 스칸디나비아 어디인가 대통령이 자전거 뒤에 막걸리를 싣고 시인의 집을 찾아가는 그 길도 석양으로 밝게 저무는 길이었지요.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에 제 편지를 부치려 합니다. 수수한 차림의 서민 대통령이 아니라, 격식 없이 평등한 국무총리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시인으로 말입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국회의원과 장관이 아니라, 장학사도 위원장도 무슨무슨 회장도 아닌 오로지 시인이 되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그저 정권만 바뀐 게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편의 권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아니 보다 많은 자본을 축복할 수만 있다면 도덕성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한 수많은 국민이 있는 한 권력은 더욱 더 타락할 것입니다.
삼십리 시골길을 자전거 타고 가는 대통령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에 줄 서 있는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시인의 집에 막걸리병을 들고 찾아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될 세상이라면, 누군가에게 제 삶을 내맡겨야 하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야 할 자유는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의 집에는 곰나루의 아우성을 건너와서 언제나 초례청 앞에 서 있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이 찾아가야 하고, 삼천리 마을마다 논밭에서 비로소 움튼 이른 봄의 살아 있는 숨결이 찾아가야 합니다.

제4신
지난 해 당신께서 작고하신지 40주기를 맞이했습니다. 부여에 신동엽문학관을 세운다는 착공 소식도 전해옵니다. 당신의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많은 후학들이 모여 신동엽학회를 세웠습니다. 외세와 분단, 민주화 등 역사와 당대적 현실 문제에 천착하셨지만 그 중심에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자유’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로 모든 것을 읽어내려는 좁은 시선은 진정한 당신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결코 굴레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편협한 시선은 때로는 억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당신의 문학 세계는 새롭게 읽히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작고하신 이후에 태어났지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자랐던 저에게도 맑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셨기에 언젠가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날이 오리라 기다려봅니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난 게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실 것입니다.
이제 곧 사월입니다. 아니, 언제나 사월이었지요. 그게 사월의 ‘정신’이었습니다. 사월은 갈아엎는 달이라 하셨지요. 가슴에 속잎 돋아나는 사월은 곰나루에서 광화문에서 남일당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진달래 피어 능선마다 출렁이듯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가슴마다 사월을 품고 있습니다. 논밭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듯, 세상을 갈아엎어 푸른 보리밭 비단결처럼 출렁이듯 당신의 시를 읽겠습니다.
어느 들길 지나는 길손이 되어서 당신을 부르던 하늘을 올려다보겠습니다. 마치 당신의 숨결처럼, 내 눈빛과 맑은 하늘 사이를 바람 한 점 스쳐가겠지요.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신동엽, 「담배 연기처럼」에서

김태형∙1970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추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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